소설리스트

흡혈왕-337화 (331/450)
  • 65화. 생사 (4)

    술법을 금하는 심법진.

    처음부터 이렇게 의도한 건 아니었다.

    백지 상태의 심법진 위에 심상을 덧씌우는 과정에서 혈라지망이 스며들었던 것.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혈라지망이야말로 내 술법의 총화니까.’

    심극, 나아가 심상절예가 무공의 총화라면 심법진은 술법의 총화.

    하지만 그렇게 만든 심법진은 혈라지망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했다.

    본디 혈목과 연계하여 그간 익힌 술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혈라지망의 특성.

    하지만 심법진은 오히려 정반대로 술법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절대금술(絶代禁術)의 영역으로 변모했다.

    오죽하면 진조도 어이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심법진을 만들었다고 비아냥거렸을까.

    -네놈이 만든 심법진은 술법관을 담기에 너무 작고 조악하다. 그래서 이리 비틀린 게야.

    심상법의 경지로 접어들었다면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심법진으로는 부족했다.

    -네놈이 심상절예를 터득했다고 심상법을 바로 터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류귀종인 만큼 두 경지는 비슷한 구석이 많지만,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니까.

    이미 심상지경에 올랐으니 계기만 주어지면 심상법을 터득하겠지만, 당장은 무리라는 뜻.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급조한 심법진만 해도 술사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쿠오오오오오오-!

    거대한 혈라수(血羅樹)를 중심으로 혈목들이 울부짖듯 고동친다.

    하늘은 낙조에 삼켜진 것처럼 붉어지고, 대지 역시 시뻘건 줄기들에 뒤덮여 타오르듯 시뻘게진 참경.

    ‘밑밭을 깔아둔 보람이 있군.’

    본래의 혈라지망처럼 혈목과의 연계를 통해 구현해야 하는 조건.

    모용세가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불러낸 혈목은 단순히 망자들을 치우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둔 포석이었다.

    휘우우우우우우.......!

    [...어처구니가 없군.]

    모용세가의 내원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한 채 회오리치는 붉은 격벽.

    사방을 쭉 둘러본 마의가 혀를 내둘렀다.

    [술법을 금하는 심법진이라... 술사라면 절대로 바라지 않을 심법진이다.]

    술사가 술법을 못 쓴다면 범부와 다를 게 뭔가.

    심상이란 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지만 끔찍했다.

    [상대의 힘을 제약하는 심법진은 종종 봤었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제약한 심법진은 없었다. 너 자신에게도 강력한 제약을 걸었기에 성립하는 심법진일 터.]

    심상법과는 달리 심법진은 술법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고, 그렇기에 강엽 역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강엽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무심히 뇌까렸다.

    “인신공양을 통한 심상의 변질.”

    [...!]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겠지. 심상의 형태를 억지로 비트는 것 말이다.”

    타고난 수명을 극복하여 죽음마저 정복하겠다는 미친 발상을 현실로 옮기려면 이치를 초월해야 한다.

    하늘이 정한 법칙마저 능멸하여 자신의 법을 새기는 심상의 힘만이 유일한 해답.

    -우우우우우우우......!

    술법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망자들,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혀 괴물로 전락한 이들이 울부짖는다.

    마의는 그들의 몸뚱이를 진축으로 삼아 인신공양의 술법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아아앙!

    농밀한 경파를 부딪쳐 서로를 밀어낸 두 여인이 땅에 착지했다.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호각.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누르며 강엽의 옆으로 후퇴 보법을 펼친 약선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살풍경한 심법진이구나.”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그녀가 제때 막아주지 않았다면 심법진을 펼치는 동안 육사도의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지금은 인질들부터 구해야지.”

    사실 약선이 말하지 않아도 일행이 기둥에 묶인 이들을 구하고 있었다. 사슬 위에 붙은 부적을 떼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약선이 두 사람을 견제하는 동안 강엽 역시 혈목을 불러내서 일행을 구했다. 가장 먼저 백서희를 구한 강엽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으음....”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백서희는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강엽을 알아보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꿈 아니지?”

    “현실이야.”

    “하늘도 붉고 막 이상한데?”

    “내가 만든 심법진이거든.”

    눈을 몇 번 껌뻑인 그녀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은 콜록거리는 기침으로 변했고, 입가를 따라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강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해방됐음에도 불구하고 골수까지 찬 사기는 그대로였다.

    “으음, 나 몸이, 이상한데... 으슬으슬 떨리고....”

    “금방 나을 거다.”

    강엽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전각의 지붕 위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마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새로운 술법을 발동하지 못한다 뿐이지, 기존에 발동된 술법은 그대로 유지되는군.]

    기존의 술법까지 무너졌으면 망자들 역시 한 줌의 재로 흩어졌겠지.

    그러나 망자들은 그대로였고, 마의가 발동한 인신공양의 술법진도 와해되지 않았다.

    [단순한 문제군. 너희를 붙잡아서 제물로 공양하면 그만이다.]

    -쿠오오오오오!

    그가 손을 들어올리자 망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만든 망자들을 소모하겠다?”

    [시간은 좀 걸려도 망자 따윈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장강을 건너면 대방파가 둘이나 있지 않나?]

    무당파와 제갈세가. 호북의 대방파들을 습격하여 똑같은 일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쿠구구구구궁...!

    “뭐, 뭐야!?”

    “쿨럭! 이래서는 승산이...!”

    지축이 흔들릴 만큼 파도처럼 몰려오는 망자들의 군세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식겁했다.

    강엽의 품에 안긴 백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돌겠네, 진짜....”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강엽은 다소 굳어졌을지언정 불안이나 좌절감 따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자, 귀영. 어찌할 거냐. 그들을 구해가며 이 많은 군세를 쓰러트릴 수 있나?]

    “그래서 지원군을 불렀다.”

    강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법진의 일각이 허물어지며 바깥의 정경이 드러났다.

    구멍을 통해서 검은 물결이 쏟아지며 망자들을 향해 하강한다.

    피막 달린 날개를 홰치는 짐승들.

    “...박쥐?”

    육사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을 가렸음에도 청각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박쥐들이 난입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끼에에엑!

    콰직! 쉬아아악!

    초음의 파동을 듣고 날아온 박쥐들은 망자들의 눈알을 쪼아먹고 살점을 할퀴었다.

    그에 망자들이 귀찮다는 듯이 손발을 휘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귀찮게 군다.

    강엽이 박쥐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행도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세상에....”

    하늘과 땅이 핏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수백의 망자들과 박쥐들이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야말로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인외지경의 혈전.

    쿠어어어어어엉!

    혈목이 그 지옥도에 한 폭을 더했다.

    땅을 뚫고 자라난 붉은 줄기들이 박쥐들을 뚫고 들어오는 망자들을 일제히 꿰뚫은 것이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한 강엽이 시선을 돌려 품에 안긴 백서희를 내려다보았다.

    눈밑에 짙은 그늘이 진 채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는 힘겨워하면서도 애써 미소 짓고 있었다.

    “...이기고 와.”

    “그래.”

    마주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강엽은 어느새 뒤에 온 완안극을 향해 말했다.

    “부탁한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완안극 역시 안색이 창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인한 흡혈귀이기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을 뿐.

    그때 약선이 말했다.

    “내가 마의를 맡아도 되겠나?”

    “쉽지 않을 텐데요.”

    약선도 육사도와 맞설 만큼 강하지만 마의는 격이 다른 절대고수였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한 팔을 수복하여 만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닐세.”

    갑자기 끼어든 이는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었다. 다소 낯빛이 초췌하긴 해도 목소리는 또렷한 편이었다.

    그가 눈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 무당의 명도(明到)일세.”

    작금의 강호에선 도명보다도 검선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절대고수. 그가 가슴께까지 내려온 백염을 쓸어내리며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자네가 누군지는 청수 그 아이에게 들었네. 본산이 크게 빚을 졌군.”

    “강엽입니다.”

    강엽은 짧게 소개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격식을 차릴 계제가 아니었다.

    검선이 손을 뻗자 부러진 나뭇가지가 날아와서 주름진 손에 안착했다.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세월과 함께 빚은 선기(仙氣)로 사기에 저항하긴 했지만 만전은 아니었다.

    ‘아마 심상절예는 쓸 수 없겠지.’

    초음의 파동으로 검선의 몸 상태를 살핀 강엽은 그의 경맥 곳곳이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검선의 말마따나 싸워야 할 때.

    검선뿐 아니라 정신을 차린 이들은 급한 대로 부러진 혈목이나 돌 따위를 주워들고 있었다.

    “빈도가 약선과 함께 마의를 붙잡고 있겠네. 자네는 저 여인을 쓰러트리고 합류하게.”

    지금의 몸상태로는 육사도도 까다로운 적수다.

    그러나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은 헝겊으로 눈을 가린 여인.

    마의의 곁을 떠난 육사도는 박쥐들과 혈목을 베며 전진하고 있었다.

    “나무 주제에 창술을 쓰다니....”

    그녀는 혈목의 움직임에 상승 무학의 묘리가 녹아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전후사방 포위한 혈목들이 차륜전을 하듯 쉴 새 없이 파상공세를 펼치며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몸에 닿지 않는다.

    서걱!

    눈을 가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사방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간파하여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내고 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가만히 있는데 혈목들이 알아서 피해가는 것 같았다.

    쉬아아아악!

    정수리 위에서 쏟아진 날카로운 섬광도 딱 반 걸음 물러나는 보신경으로 흘려버린다.

    본래라면 그런 식으로 흘려버릴 수 없었겠지만, 강엽은 그 작은 움직임 안에 무수한 근육의 발경 묘리가 깃들었음을 알아보았다.

    지극한 정중동의 무학을 구사한 육사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의문했다.

    “음? 삼사도가 아니라 저부터 노리는 겁니까?”

    “그쪽은 따로 간 사람들이 있거든.”

    장내를 살펴본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갸름한 턱선을 작게 움직였다.

    “아하, 약선은 그렇다 치고 검선까지.... 심신이 피폐할 텐데도 싸우다니. 과연 천하팔존이라 할 만하군요.”

    강엽이 끼어든 뒤부터 박쥐나 혈목은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결 여유롭게 강엽과 말을 섞으면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귀영, 당신이 대단한 고수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만전이 아닙니다.”

    진통제로 고통을 가라앉히긴 했지만, 육신의 손상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 형편.

    미려한 입매를 씰룩거린 그녀가 검을 들었다.

    “당신의 전력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교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쩌어엉!

    느닷없이 측면에서 나타나서 일검을 휘두른다.

    손바닥을 들어 검격을 막은 강엽은 날붙이를 통해 들어오는 암경을 흩어버리며 일장을 날렸다.

    싸늘한 한빙지기가 쏟아지며 전면을 하얗게 얼려버리는 찰나.

    쐐애애애액!

    경쾌한 발놀림으로 신형을 반전한 육사도가 강엽의 배후를 점하고 어깻죽지를 베었다.

    바로 그때 허리춤에 있던 자성검이 저 스스로 뽑혀나와 육사도의 검격을 막아냈다.

    뇌기는 못 써도 어검술을 쓸 수는 있다.

    “큭...!”

    그러나 검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황.

    육사도가 빈정거렸다.

    “무리하시는군요.”

    가뜩이나 부상으로 신음하는 판국에 심법진까지 펼쳤으니 몸에 막대한 부담이 갈 수밖에.

    쩌엉!

    두 번의 검초로 자성검을 멀리 내동댕이친 육사도가 검극을 세워 어깻죽지의 거골혈을 찔렀다.

    혈라지망의 술법도 쓰지 못하고, 뇌기도 못 쓰는 지금 강엽은 호신강기를 두를 수도 없는 마당.

    그러나 강엽이 어깨를 내밀고 근육을 모으자 맑은 파찰음을 내며 불티를 튀겼다.

    “금강불괴...!”

    왼손의 한기로 흐릿한 칼날을 벼려낸 강엽이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쳤다.

    바로 그때였다.

    -심극.

    육사도의 전신에서 강렬한 심상이 뿜어지며 강엽의 몸을 밀어낸 것은.

    -만검어리(萬劍魚麗).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검의 폭풍이 금강불괴를 뚫고 강엽의 전신을 갈래갈래 찢어발겼다.

    뼈와 근육이 끊어지고, 피안개가 뿜어지며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는 넝마조각이 된다.

    “후우...!”

    기습적으로 발한 구명절초로 위기를 넘긴 육사도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위험했....”

    그녀의 말이 멎었다. 넝마주이로 남았어야 할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문득 뒤에서 오싹한 살의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그녀가 몸을 돌리며 검신을 세웠다.

    콰아아앙!

    “...어떻게?”

    멀쩡한 강엽의 모습을 본 그녀는 놀랐다.

    ‘손맛은 진짜였는데?’

    이형환위나 환술 같은 걸로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다면 즉시 알아챘을 터.

    그때 강엽의 육신 일부가 핏빛 안개로 화했다.

    그리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그녀를 쳐서 십 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커억!”

    “쓸 만한걸.”

    강엽이 입매를 당겼다.

    -혈무화(血霧化).

    스스로를 안개로 바꾸는 능력.

    강엽은 흡혈귀의 능력을 모두 손에 넣고 완전한 진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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