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생사 (3)
콰아아앙!
모용세가(慕容世家)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
선두에서 대문을 부순 연가휘는 미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살다 살다 팔가의 대문을 부술 줄이야....”
과거 정마대전을 일으켰던 선조들이 구파의 산문을 부쉈느니, 팔가의 담장을 넘었다느니 하는 무용담은 숱하게 들었지만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그것도 무림맹의 편에 가담한 이후에 이렇게 될 거라곤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강엽이 피식 웃었다.
“그냥 즐겨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도 아닌데.”
“하하하....”
머쓱해진 연가휘가 뒤늦게 당묘정과 남궁상아의 눈치를 볼 때 약선이 핀잔을 줬다.
“그보다 앞이나 봐라.”
“이게 모용세가라니....”
당묘정과 남궁상아는 낙담했다.
한때 장원을 꾸몄던 관목들과 기화요초들은 시들고 문드러져서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다.
누런 낙엽 더미가 발치를 휩쓸고, 사방에서 진동하는 악취가 코끝을 찌르고 들어온다.
약선도 콧잔등을 찡그렸다.
“세월이 무상하군. 그토록 아름다운 장원이 이리 망가지다니....”
약선은 모용세가주의 초대를 받아서, 당묘정과 남궁상아는 용봉지회의 일원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과거의 성세를 기억하는 만큼 풍비박산이 난 모용세가의 처지가 크게 다가올밖에.
-크르르르륵....
“여기도 망자들이 있군요.”
말라비틀어진 나무 뒤편.
연가휘가 방천화극을 고쳐잡고 한 걸음 나서는 찰나 월동문과 담장을 넘어 수많은 망자들이 나타났다.
바깥도 망자들이 나타나서 사위를 에워쌌기 때문에 일행은 오도 가도 못하는 난관에 부딪쳤다.
약선이 콧방귀를 꼈다.
“힘으로 뚫어야 하나?”
아무리 일행에 절세고수가 두 명이나 있어도 이렇게 많은 숫자와 싸우는 건 부담이었다.
망자들을 다 쓰러트린다고 해도 그 뒤에 있을 마의와의 싸움이 한없이 불리해질 터.
“당장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음?”
강엽의 말에 일행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자 그가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좌우로 나뉜 망자들 사이로 나온 젊은 여인.
검은 헝겊으로 눈을 가린 여인을 알아본 남궁상아가 눈을 부릅떴다.
“육사도...!”
광명마교주가 남궁세가를 무너뜨린 뒤, 남직례성의 문파들을 방문해서 힘으로 굴복시킨 초고수.
마의에 이은 또다른 강적의 등장에 일행의 근육이 긴장감으로 뻣뻣해질 때 그녀가 두 손을 모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척마대의 잔존세력과 고명하신 약선,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둔 그녀가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진조의 후예.”
“...진조?”
직감적으로 그것이 강엽을 부르는 호칭임을 눈치챈 일행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교주는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어쩌면 이 자리에서 그가 흡혈귀라는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엽은 당황하지 않았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지.’
기실 광명마교주가 굳이 진실을 숨겨줄 이유는 없었다.
흡혈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맹이나 백도 무림이 강엽을 껄끄러워하지 않겠는가?
“육사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진조의 후예.”
“차라리 귀영이라고 불러라. 진조의 후예라고 불리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나아.”
“그러지요.”
“그래서 굳이 마중을 나온 이유가 뭐지? 설마 얌전히 목 바치려고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여러분을 안내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뭐?”
이해되지 않는 말에 강엽뿐 아니라 일행 모두가 인상을 찡그리자 육사도가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약선님께서는 들으셨을 겁니다. 삼사도가 무엇을 하려는지 말입니다.”
약선도 마의가 광명마교의 세 번째 사도의 직위를 꿰찮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늘한 기도를 발하며 육사도를 노려봤다.
“자신의 염원을 이루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우리가 순순히 그 꼴을 보리라 생각하나?”
“대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뭐라고?”
“...!”
기습적인 선언에 일행이 허를 찔린 것처럼 흠칫하자 육사도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물론 여러분이 훼방을 놓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와 이들을 뚫고 가는 것보다는, 그냥 함께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르르르르...!
육사도의 도발에 호응하듯 사방을 포위한 망자들이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이 모용세가의 무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일행이 살기를 피워올리는 바로 그 순간.
아아아아아아아!
내원에서 메아리친 거친 술법의 파동이 모용세가의 경내 전역을 휩쓸면서 지나갔다.
그에 일행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을 때, 육사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무심히 이어졌다.
“아무 의미 없는 저항을 이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얌전히 따라오시렵니까?”
“....”
시간은 없고 적은 강하다.
설령 기적적으로 육사도를 뚫고 마의를 덮친다고 한들 그때는 이미 한참 늦었을지도 모르는 일.
강엽이 나선 건 그때였다.
“안내해라.”
“강 무사님?”
일행이 뒤에서 놀란 얼굴로 불렀지만, 강엽은 육사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마의가 이제 와서 나를 부른 건 내게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만약 목숨을 원했다면 이 자리에서 싸웠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다른 걸 원한다는 거지.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직 무사하다는 뜻도 되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함부로 일행을 죽였다간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다.
강엽이 그렇지 않냐는 듯이 보자 육사도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이 틀렸나?”
“...따라오시지요.”
짧은 한숨으로 강엽의 말을 넌지시 긍정한 육사도가 몸을 돌렸다.
* * *
모용세가의 심처에 있는 내원.
가주와 직계 혈족들을 비롯하여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실로 살풍경했다.
수백 명은 족히 넘을 듯한 망자들이 기묘한 배치대로 서 있었고, 한쪽엔 기둥에 묶인 사람들이 있었다.
막 월동문을 통과해서 안쪽으로 들어온 강엽은 머리를 푹 숙인 백서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녀뿐 아니라 완안극, 청수와 소창후 등 척마대원들도 정신을 잃고 기둥에 매달린 상태.
그때 남궁상아가 경호성을 질렀다.
“장문인...!”
무당파의 장문인 검선.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몰골로 기둥에 묶인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약선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검선뿐만이 아니군. 모용세가의 가주와 태상가주도 있다. 다들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데....”
“위험한 상태입니다.”
강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행을 보자마자 정안과 초음으로 살핀 결과 대다수가 사기에 물들어 있었다.
‘아직 망자로 변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적들의 진의를 의심하여 바깥에서 싸움을 벌였다면 영영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강엽이 나서려고 할 때, 싸늘한 음색과 함께 서늘한 예기가 살갗을 겨누었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시기를. 저들은 아직 살아있고, 당신이 협조하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전 강엽이 의문했던 말을 확정 짓는 언동.
허공에서 무거운 중저음이 울렸다.
[육사도의 말이 옳다.]
가장 크고 화려한 가주전의 지붕에서 일행을 오시하는 가면의 사내.
그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내 초대를 받아줘서 고맙군, 귀영. 그리고....]
강엽의 뒤에서 주먹을 꽉 쥔 약선에게 시선을 옮긴 마의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물론 불청객들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주마. 난 관대하니까.]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군. 이 난장을 피우고 그딴 양심 터진 소리가 나오나?”
약선이 어이가 없어서 따졌지만 마의는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난 딱히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니다. 죽여야 하니까 죽인 거지. 죽일 필요가 없다면 안 죽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얘기를 참 고상하게 말씀하시는군.”
대화의 요점이 묘하게 어긋난다는 걸 두 사람도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서로 할 말만 하겠다는 듯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보다못한 강엽이 끼어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흠, 그래... 저 녀석과 대화하는 건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겠지. 중요한 건 대법이니까.]
약선이 울컥해서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그전에 마의가 빠르게 말을 이어붙였다.
[너라면 알 거다. 내가 원하면 저들을 당장 망자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귀찮게 죽일 필요도 없어. 손가락만 튕겨도 망자가 된다.]
“저, 저 말이 사실인가요?”
당묘정이 경악해서 묻는 말에도 강엽은 답하지 않자 일행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엽이 되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네놈의 영성.]
“뭐?”
[정확히는 네 안에 깃든 불사의 마신이지. 그것까지 제물로 바치면 확실하게 염원을 이룰 수 있다. 너절하게 고수들 몇 명 붙잡아서 공양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나를 붙잡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
[부정하진 않으마.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난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게 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영성만 추출하겠다?”
[물론. 이건 네게도 나쁜 거래가 아닐 거다.]
“무슨 소리지?”
[괴물의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
“...!”
[영성과 함께 자리한 천부적인 자질과 능력은 잃겠지만, 지금까지 쌓은 무공은 그대로일 거다. 심상지경에 닿은 무공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지금은 바꾸기를 포기한 흡혈귀의 천형.
마의는 강엽으로 하여금 무림에 투신하도록 인도한 흡혈귀의 힘을 송두리째 뽑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덤으로 네가 원하는 사람을 한 명 해방시켜주지. 이만하면 꽤 공정한 거래 아닌가?]
강엽의 시선이 백서희에게 먼저 닿았던 것을 꿰뚫어본 통찰력. 설령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귀가 솔깃해질 만한 제안이기는 했다.
[무림 따윈 잊어라. 네 여자와 떠나서 조용한 곳에 은거해. 죽을 때까지 백년해로하며 사는 거다.]
언젠가 백서희에게 건넸던 말.
무림을 떠나서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롭게 출발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농담처럼 흘려넘겼지만, 만약 백서희가 그러자고 수긍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
침묵하는 강엽의 모습에 일행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그때, 강엽은 당묘정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머뭇거렸던 그녀는 강엽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힘없이 웃었다. 마치 강엽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존중하겠다는 듯이.
[잘 생각해봐라. 네가 광명교와 척을 진 게 있나? 오사도가 죽긴 했지만, 그건 광명교가 원한을 가졌으면 가졌지 네가 원한을 가질 일이 아니다. 네가 협조만 한다면 그 정도 은원쯤은 얼마든지....]
“무림에 와서 너무 많은 인연을 만들었지.”
[음?]
“서희가 들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거다. 그 많은 인연들을 못 본 척하고 떠날 수 있겠냐고.”
[.......]
“역시 그러지는 못하겠군.”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가는구나.]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늘어놓은 마의가 눈구멍 속에서 노란 안광을 피워올리며 중얼거렸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보란 듯이 손을 높게 치켜든 마의가 중지와 엄지를 맞부딪쳐 딱 소리를 내려는 찰나.
“아니.”
그 말을 부정한 강엽이 한 걸음 나서며 심상의 파동을 발했다.
“무슨 짓을...!”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챈 육사도가 검극을 찌르자 재빨리 끼어든 약선이 강엽의 앞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검격과 권격이 부딪치고, 투명한 파동이 광활한 동심원을 그리며 모용세가의 장원을 휩쓴다.
[이건 설마....]
그 정체를 깨달은 마의가 하던 일도 멈추고 아연해하는 순간.
-심법진 구현.
강엽의 손에서 나온 붉은 구체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장내를 가득 뒤덮었다.
쿠우우우우우웅......!
장원의 흙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굵직한 혈목.
가주전을 굽어볼 만큼 높이 치솟은 거목을 중심으로 사방이 핏빛의 수림으로 변한다.
-혈라지망.
호신강기를 넘어선 심법진.
그와 동시에 마의가 한차례 전개한 술법진의 흐름이 헝클어지면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멈춰!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드물게 격노한 노성으로 외친 마의의 모습에 강엽이 시린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한 가지 알려주마. 난 이제 술법을 못 쓴다.”
[뭣...!?]
“대신 너도 술법을 못 쓰지.”
그것이 강엽이 새로이 짜낸 심법진의 법칙이었다.
-이 안에선 모든 술법을 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