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고립 (1)
태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두메산골.
작은 산골마을은 때 아닌 방문자들로 인해 시름을 앓고 있었다.
“여기요. 쭉 들이키세요.”
“감사합니다... 쿨럭!”
탕약을 마신 척마대원이 기침을 하며 선지피를 웩 토했다.
졸지에 탕약이 바닥에 엎어졌지만, 여인은 담담하게 그릇을 챙겼다.
“죄, 죄송합니다, 당 소저.... 우읍!”
“괜찮아요. 탕약은 다시 가져올게요.”
“...전 죽을 겁니다.”
“그런 말 마세요. 마음을 굳게 먹어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죠. 살아서 돌아가자구요.”
누더기를 꽉 쥐고 울먹이는 사내의 모습.
사내를 위로한 당묘정은 바로 옆의 사람들에게 탕약을 건네면서 임시 병동을 한 바퀴 순회했다.
개개인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다들 탕약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거나 피를 토하기 일쑤.
그럼에도 당묘정은 한 번도 안색을 흐리지 않고 동료들을 위로하며 밖으로 나왔다.
혼자가 되어서야 그녀는 벽에 기대 긴 한숨을 흘렸다.
“대체 언제쯤 되어야 이 사태가 끝날지....”
이토록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린 적이 있던가.
천하제일의원이라 불리는 약선, 아니 본가에 계신 숙부님이 왔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나마 경상을 입은 자들은 간단한 조치만 취해도 나았지만, 중상을 입은 자들은 침술과 탕약을 병행해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몸을 침습한 사기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는다.
그러면 망자로 전락해서 동료들을 향해 마수를 뻗는 악순환의 반복.
죽어가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고, 괜찮은 사람들도 병동으로 걸음하기를 꺼려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지....
“당 소저, 약초 캐왔소이다!”
별안간 저편에서 망태기를 짊어진 거구의 사내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광경에 당묘정이 작게 웃었다.
“고생하셨어요, 황보 공자. 쉽지 않았을 텐데....”
“하하, 이런 일엔 몸 튼튼한 사람이 나서야지. 게다가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 어렵진 않았소.”
“망자들은 없었고요?”
“몇 마리 어슬렁거리긴 했소. 한 방에 박살을 내줬지.”
사내, 황보진악이 껄껄 웃으며 두꺼운 근육을 불끈거리자 당묘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등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말도 마시지요. 황보 시주가 더 죽이겠다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머리에 헝겊을 두른 여인. 이마의 계인과 목에 건 염주가 그녀가 비구니임을 알려주었다.
“혜심 스님도 가셨네요?”
“황보 시주에게만 맡길 수는 없으니까요. 혹여나 독초를 약초로 착각해서 뽑을 수도 있구요.”
“거, 소창후도 너무하시오. 아무렴 내가 그런 걸 착각하겠소?”
“그래요? 한번 검사해볼까요?”
소창후가 눈매를 가늘게 뜨고 흘겨보자 황보진악은 찔리는 게 있는지 딴청을 피웠다.
“험! 나, 난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이만! 그럼 나중에 봅시다, 당 소저!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러주시오!”
“나중에 뵈어요.”
당묘정이 쿡쿡 웃자 황보진악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소창후가 코웃음을 쳤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군요.”
“황보 공자에게 너무 엄한 거 아니에요?”
“쯧, 옆에서 따라다니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저기 들어있는 건 독초 반, 약초 반이었을 겁니다.”
그나마 소창후는 아미산에서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약초를 딴 경험이 있지만, 황보진악은 귀하신 공자님인 데다 성격도 꼼꼼하지 않아서 이런 일에 서툴렀다.
“그래도 천성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당 소저는 어떠세요?”
“그, 글쎄요.”
“취향은 아닌가 보네요.”
“....”
당묘정이 애매하게 웃자 소창후가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지금이 좋은 때는 아니지요. 몸은 괜찮습니까? 힘들어보이는데....”
“아직은 버틸 만해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당묘정의 눈밑엔 숨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밤잠까지 거르면서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거의 쉬지 못했기 때문.
소창후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스쳤다.
“좀 쉬엄쉬엄 하세요.”
“다들 고생하시는데요.”
“그래도 차 한 잔 할 여유는 있겠지요?”
“약차라도 좋다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벌겋게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보면서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나무잔을 매만진 당묘정이 물었다.
“언제 여길 나갈 수 있을까요?”
“일단 현운 도장께서 괜찮아지셔야죠. 차도가 있습니까?”
당묘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정신을 차리시긴 하지만, 아직 거동은 무리예요. 내상도 내상인데 마의가 심어놓은 사기가 워낙 심해서....”
검선을 끌고 가는 마의를 공격하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당시에 마의도 중상을 입은 상태여서 망정이지, 만약 멀쩡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청수 도장은 검만 휘두르고 있고, 제갈 소가주는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고... 다들 혼란스러워하는군요.”
“혜심 스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당묘정의 질문에 소창후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이 마을을 떠나고 싶습니다. 주민들이 망자로 변해버린 마을... 저 안에 있는 동료들이 낫지 않는 건 이 마을에 사기가 짙게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떠날 수가 없지요.”
산 아래엔 망자들이 득실거린다.
대부분의 망자들은 양민들이 변했기 때문에 강하지 않았지만, 드물게 까다로운 개체도 존재하는 바.
맹수들도 망자가 됐는데, 웬만한 고수는 단숨에 찢어죽였다.
“후우, 가문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겠죠?”
“사천도 난리가 났으니까요. 태화문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도 있고....”
“그 사람도 거기 있을까요?”
소창후의 표정이 묘해졌다. 당묘정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 그녀도 같은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겠지.
“현운 도장님께서 강 시주가 사천으로 가셨다고 했으니 그렇겠지요. 그보단 우리가 문제입니다.”
적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원군은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
이도 저도 못하고 하루하루 말라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버티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던 평온도 불시에 깨져버렸다.
대애애애애앵-!
마을이 떠나가라 거칠게 울리는 파찰음.
학사처럼 얼굴이 하얀 청년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다 깨진 솥뚜껑을 시끄럽게 두들기고 있었다.
“제갈 소가주?”
백도제일술가 신기제갈의 후계자.
무림맹 총군사이자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의현의 아들이기도 한 제갈세옥이 심각한 낯빛으로 소리쳤다.
“술법진이 깨졌소!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소이다!”
“...!”
안색이 변한 두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 * *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세옥.
호광 강호에서 술룡(術龍)이라 불리는 그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술법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
그는 바깥에 모여든 망자들을 속이기 위해 술법진을 펼쳤다.
산길을 우거진 숲으로 위장한 데다 실수라도 이쪽으로 오지 않게끔 방향 감각을 왜곡시키는 술법진.
그 외에는 별다른 공능이 없지만 이지가 없는 망자 따위가 파훼할 술법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만든 술법진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에 이성이 하얗게 마비되었다.
“맙소사,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상황을 파악한 척마대원들과 무림인들이 사색이 되어 움직였다.
어딘지 음울한 기색을 띠는 청수가 날카로운 기세를 벼린 채 다가왔다.
“어떻게 할 겁니까?”
현운 도장이 정신을 잃은 지금 무리의 좌장은 제갈세옥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공을 강해도 그처럼 작전을 짤 역량이 안 된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제갈세옥이 뒤늦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퇴각할 생각이오. 더 깊은 곳으로.”
“여기서 더 들어갈 데가 있나?”
황보진악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콧김을 뿜자 제갈세옥이 참담하게 이마를 쓸어올렸다.
“성의 경계를 넘을 작정이오.”
“...!”
충격적인 선언에 좌중이 요동쳤다.
그야 호광성 밖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지만, 제갈세옥의 결정은 임무지를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소. 적들은 다수인데 우린 소수요. 심지어 지치기까지 했소이다.”
“부상자가 많아요. 들것에 실어 움직인다고 해도....”
당묘정이 우려를 드러냈다. 지금은 해가 떨어진 밤이었다. 척마대원들이 고수라 하나 험준한 야산에서 부상자들을 운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제갈세옥이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당묘정의 동공이 흔들렸다.
“설마... 버리려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전우를 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럴 바엔 다 같이 맞서 싸워야지!”
“당연히 아니오. 다만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부상자들을 들것으로 옮기는 동안 누군가는 남아서 적들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
“나는 남겠소. 내가 제안했으니까 남아야지. 다만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소. 날 도와줄 사람들이....”
“저도 남겠습니다.”
청수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도사인데도 살기를 한껏 드러낸 기세.
이어서 황보진악과 소창후가 자원했다.
“사내라면 물러설 수 없지. 나도 싸우겠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선뜻 자원한 건 아니었다. 몇몇 무인들, 특히 낭인들은 계산적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부상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척마대를 중심으로 동료들을 지킨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당 소저는 후방으로 가십시오.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것은 당 소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갈세옥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눈짓을 해보이자 당묘정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럼 갑시....”
제갈세옥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앙-!
창졸간에 천지를 가른 한 줄기 빛자락.
소나기를 동반한 먹구름 사이로 창백한 벼락이 명멸하고 있었다.
“암만 우기라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음?”
하늘을 올려다본 제갈세옥의 표정에 금이 갔다.
아무리 산이라고 해도 먹구름의 높이가 너무 낮은 데다, 그 규모도 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먹구름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서, 설마 호풍환우의 술?”
부친인 제갈의현도 법구와 가문 술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간신히 시전할 수 있는 대술법.
비록 국지적이라고 하지만 누군가 그 술법으로 벼락을 뿌리는 먹구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말도 안 돼! 대종사만 할 수 있는 일일 텐데...!”
하지만 경악하는 제갈세옥과 달리 일행은 미묘한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그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사람과 동행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이 온 걸까요?”
“가보면 알겠지요.”
산길을 내려간 그들은 곧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두 손에 쥐고 휘두르는 초인의 신위.
새카만 소맷자락을 나부끼는 사내가 손을 뻗을 때마다 뜨거운 벼락 세례가 망자들을 쓸어버렸다.
콰자자자자작!
-키아아아아아!
사내의 손에서 춤추는 벼락의 군무가 망자들을 태우고 뻗어나간다.
휘우우우웅!
과거 무인이었던 망자들이 흘린 날붙이들이 경파에 휩쓸려 잘게 부서지고, 허공섭물의 묘리로 떠오른다.
뒤이어 태극반의 묘용으로 뇌기를 두르며 맹렬하게 회전하고,
-천뢰 연환살(連環殺).
콰아아아아아앙-!
부채꼴로 뻗어나간 쇳조각들이 망자들의 육신을 꿰뚫고 저편까지 질주, 거센 충격파를 뿌리며 남은 부분까지 분쇄한다.
“.......”
산 아래에 우글거리는 망자들을 말 그대로 증발시키는 신위.
강엽을 잘 알고 있던 일행도 눈앞이 현실감이 흐려질 정도로 충격적인 신위였다.
그러나 정작 강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강엽! 이대론 끝이 없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강엽이 정면의 적을 감당하는 동안 백서희와 완안극은 각각 좌우로 퍼져서 또 다른 무리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수가 줄기는커녕 저편에서부터 검은 물결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강엽의 얼굴에 갈등이 서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당묘정이 외쳤다.
“강 무사!”
제갈세옥 등 강엽을 처음 보는 이들이 당황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수와 소창후, 황보진악도 매한가지.
“이쪽입니다!”
“음?”
강엽이 이채를 발했다.
술법진이 입구를 가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쪽에서 먼저 나올 줄이야.
“아니군. 술법진이 찢겨져서 어쩔 수 없이 나왔나?”
천뢰를 쓰기 위해 호풍환우의 술법을 쓰는 과정에서 본의와는 상관없이 술법진이 찢겨나간 것이리라.
강엽이 백서희와 완안극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리 세 사람이 어마어마한 고수라도 수천이나 되는 망자들과 싸우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제갈세옥이 당황하며 외쳤다.
“술법진을 복구시켜야 합니다!”
망가진 채로 그냥 놔둔다면 망자들이 마을까지 쳐들어올 터.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지.”
“예, 예?”
“아무래도 내 실수로 술법진을 뭉갠 것 같으니까.”
백서희와 완안극이 들어오자 강엽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제갈세옥은 찢겨나간 술법진을 기반으로 새로운 술법이 급속도로 짜여지는 것을 알고 당혹스러워했다.
“어, 어떻게 한 겁니까?”
타인의 술법을, 심지어 한차례 찢겨나간 술법진을 새로운 술법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오. 오행상생의 술법진에서 수생목의 이치대로 수기를 틀어 새롭게 진축을 세우면 되니까. 마침 호풍환우의 술로 물은 충분하니, 이 주변의 숲에 술사의 의념을 덮어씌우고....”
강엽의 설명이 이어지자 제갈세옥이 눈을 반짝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바로 앞에 망자들이 있는 것도 잊고 계속 질문할 기세였다.
일행이 이도 저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지자 백서희가 나섰다.
“어후, 피곤하니까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얘기해.”
“으음.”
신나게 설명하던 강엽이 아쉬워했지만, 백서희는 상큼하게 무시하고 당묘정의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