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9화 (314/450)
  • 61화. 요선 (6)

    심극과 심상절예의 차이는 무엇인가.

    둘 다 심상에 근본을 두었으며, 외부로 발현되면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각인처럼 새겨진다.

    그럼에도 둘의 간극은 극명했다.

    ‘위력 문제가 아니야.’

    답은 진조가 했던 말에 있었다.

    -심법진이 완성되면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인 심상법으로 승화한다.

    심상절예도 마찬가지였다.

    ‘대자연의 섭리에 간섭하는 일격.’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는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지극히 당연한 대자연의 섭리.

    그 광대한 삼라만상에 자신만의 섭리를 새겨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강엽을 에워싼 여섯 절세고수들의 심극은 바늘로 툭 터뜨린 공기방울마냥 지워졌으니까.

    심극의 주인들, 영마들 또한 어둠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빛과 소리마저 빨아들이는 새카만 공허.

    탐욕스러운 심상은 요선이 발동한 심법진을 남김없이 흡수한 뒤에야 만족하며 물러났다.

    “.......”

    아무것도 없는 폐허의 전경.

    전각도, 그 주변을 둘러싼 널따란 광장과 우울한 회색빛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자리한 삼라만상이 말끔히 사라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만 기다렸지.”

    끈적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찰나.

    콰직!

    “커억!”

    곧게 뻗은 섬섬옥수가 몸뚱이를 뚫고, 복강에 숨겨진 장기를 한 줌의 혈수로 만들었다.

    “심상절예 때문에 호신강기에 돌릴 공력까지 쥐어짰군. 초고수답지 않게 무방비해.”

    “큭, 어떻게...!”

    심법진과 함께 사라졌을 요선이 어떻게 멀쩡한 자태로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오장육부가 녹는 고통에 강엽이 잇새 사이로 억눌린 신음을 토하자 요선이 야릇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생기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몰골조차 몹시 사랑스럽다는 듯이 뒷목을 핥으면서 웃는다.

    “세상 모든 걸 부정하는 심상절예. 훌륭하긴 하지만, 네 심상절예는 완성되지 않았어.”

    만약 강엽의 심상절예가 완전했다면 여섯 영마는 물론 그녀조차 완벽하게 소멸시켰을 터.

    하지만 이제 막 태동한 심상절예는 여섯 영마를 지우고 심법진을 부쉈을지언정 요선까지 죽이진 못했다.

    “그래도 칭찬해줄게. 정말 간발의 차로 살아남았거든.”

    “...운이 없었군.”

    “진조도 아니고 그 후예한테 이 정도까지 밀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촤아악!

    강엽의 몸에서 손을 빼낸 그녀는 혀끝에 감도는 피를 맛보고 세차게 전율했다. 영물의 내단처럼 농밀한 선천지기가 여과없이 느껴진다.

    “...맛있어. 정말로 극상의 진미야.”

    그동안 강엽은 꾸역꾸역 재생력을 발휘해서 구멍을 메꾸려 했지만, 요선이 남긴 마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치료를 방해했다.

    심지어 활명술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

    “크윽!”

    “헛수고야. 내가 진조를 죽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아니? 주지육림도 멀리하고 밤낮으로 그자만 생각하며 나 자신을 연마했어.”

    그녀는 힘겹게 기어가는 강엽의 복부 아래 발등을 넣으며 그 몸을 강하게 뒤집었다.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뻗은 강엽의 위로 올라가서 진하게 입을 맞췄다.

    강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고운 나신이 더럽혀지는 것도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광기.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게걸스럽게 피를 탐한 그녀가 몽롱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아, 최고야! 살려두고 싶을 정도로...!”

    양쪽의 금안이 환한 광채를 뿜어내자 그녀의 둔부에서 탐스러운 꼬리들이 흘러나왔다.

    검은 꼬리들이 살랑거리며 강엽을 더욱 옥죄였다.

    “그래, 이렇게 죽이면 아쉽지! 빌어먹을 진조만 봉인하면 돼! 그럼 널 가질 수 있어!”

    이내 환부에서 흘러나온 피를 강엽의 피부 위에 찍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린다.

    강엽의 경맥을 틀어막은 마기를 그 안에 남겨둔 채 억지로 상처를 틀어막은 것.

    본래의 재생력에는 미치지 못하나 피가 멎으면서 환부가 메워지고, 새살이 올라왔다.

    “그 정마안도 도려내주지!”

    정마안에 당해 조영옥의 혼백이 요동치지만 않았어도 이토록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광기 어린 미소를 흘린 그녀가 긴 손가락을 뻗어 강엽의 양눈을 찔렀다.

    “크악...!”

    안구가 뜯겨나가는 고통에 강엽이 비명을 지르자 요선이 깔깔 웃었다.

    “걱정하지 마. 영원히 장님으로 살진 않을 테니까. 네게서 진조의 흔적을 빼앗는 것뿐이야.”

    대신 지독한 쾌락을 맛보게 해줄게.

    입맛을 다신 그녀가 피에 젖은 흑포 자락을 찢고, 강엽의 혈도를 빠르게 찍으며 색공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육신의 고통과는 달리....

    “...어?”

    주르륵.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문질렀다.

    손등에 피가 잔뜩 흐르고 있었다. 좀 전까지 쾌락에 젖어 맛봤던 강엽의 피가 아니라....

    “...내 피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막 강엽을 덮치려고 했던 그녀는 목구멍에서 울컥 치솟는 핏물을 웨엑 게워냈다.

    “이, 이게 왜...?”

    “이제 겨우 통하는군.”

    불현듯 귓가를 파고든 싸늘한 음색.

    퍼뜩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가 불신감 역력한 얼굴로 강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눈을 잃어 장님이 되었을 강엽이다.

    한데 시각이 멀기는커녕 지극히 멀쩡한 모습으로 좌우의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설마 벌써 재생력을 되찾을 리가? 내 마기로 쐐기를 박았을 텐데...!”

    “내가 말했지.”

    강엽은 담담하게 운을 뗐다.

    경악과 불신이 역력한 요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게 냉소했다.

    “그 몸, 주인에게 돌려줄 거라고.”

    “개소리는 작작해!”

    조영옥의 혼백이 안쪽에서 발악하고 있긴 해도 일시적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 지난다면...!

    “커헉!”

    다시 피를 토한 그녀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더 이상 강엽은 없었다.

    “어디야!? 어디 간 거냐고!”

    아홉 개의 꼬리를 폭사시키면서 어둠 속을 휘젓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강엽의 목소리만이 울릴 뿐.

    “혈독이라고 하지. 네가 당한 수법 말이다.”

    “거기구나!”

    쌍장을 내밀자 파도처럼 일어나는 마기.

    목소리의 진원지를 강타하면서 공간을 으깨버렸지만, 강엽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등골이 오싹해진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꾸아악!

    “끄윽!”

    유령처럼 뻗어나온 손아귀가 가녀린 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쥐며 높이 들어올렸다.

    기습으로 인해 뚫린 상처는 옅은 흉터만 남아 있었고, 재생력을 방해하기 위해 주입했던 마기 또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 언제부터...?”

    앞뒤 다 자른 질문.

    그러나 강엽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처음부터.”

    금호요안으로 강엽을 꾀어내렸던 그녀가 역으로 정마안에 당해 심령이 흔들리지 않았던가.

    조영옥의 혼백을 자극한 것과 별도로, 이미 요선은 그때부터 정마안에 휘둘리고 있었다.

    강엽을 뒤에서 찌른 부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며, 마기는 진작에 혈공진기 안에서 녹아버렸다.

    강엽의 눈을 찔렀다고 여긴 것 역시 착각이었다.

    “솔직히 심상지경에 오른 고수가 이렇게 맥없이 환술에 걸릴 줄은 몰랐다. 혼백이 몸에 완전히 안착되지 않아서 생긴 부작용이겠지.”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영혼백육이 합일되면서 조영옥의 의념이 사라졌겠지만, 그전에 강엽이 들이닥쳤기에 결합이 단단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안에선 조영옥의 의념이 반항하는데, 밖에서도 연달아 격전을 치렀으니....’

    말하자면 내우외환에 시달린 셈.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차분히 관조하기도 전에 심상절예를 연이어 두 번이나 겪지 않았나.

    “끄으윽!”

    목을 조르는 악력에 요선의 눈이 하얗게 넘어간다.

    주인의 위기에 아홉 꼬리들이 제멋대로 꺾이고 꼬이면서 한껏 독오른 뱀처럼 강엽을 노렸다.

    요선은 목이 부러질 것 같은 압력에서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강엽을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콰직! 쿠드득...!

    날카롭게 벼려진 꼬리들은 강엽이 아니라 저들끼리 얽히고 부딪치면서 내분을 벌였으니까.

    “뭐, 뭣...!”

    “이제부터 네 꼬리는 내 거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지.”

    “아, 안 돼! 컥!”

    “돼.”

    목뼈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악력으로 조이면서 그녀의 단전에 다시 혈공진기를 주입했다.

    호신강기로도 막지 못해 여과없이 내부로 침투한 암경이 육신을 장악한 요선의 의념을 흔들었다.

    금안이 반대쪽으로 넘어간 채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에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흘렸다.

    ‘단순히 죽이는 게 목표였다면 이렇게 우회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요선은 강엽의 힘이 모자라서 심상절예가 닿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일부러 멈춘 것이었다.

    만약 무광암이 그녀에게 닿았다면 조영옥의 육신도 통째로 분쇄되었을 테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요선을 죽이더라도 반쪽의 승리가 되지 않겠는가?

    조영옥의 의념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모를까, 해볼 만한 수단이 남아있다면 죽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리라.

    그렇기에 그녀의 심령 깊숙이 남아있는 정마안의 기운을 재차 발동시켜 그녀의 감각을 희롱하고, 자신을 공격하게끔 유도해 혈공독수를 심었다.

    전신의 경맥을 파괴하고, 나아가 정기신 합일의 연결을 강제적으로 뜯어버리는 혈공독수라면 요선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터.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되도록 지양해야겠지만....

    ‘그전까진 몰아붙인다.’

    혈공독수의 위력을 조절하면서 육신을 장악한 요선의 의념을 거칠게 몰아낸다.

    경맥과 신경에 반쯤 뿌리를 내린 요선의 의념을 강제로 떼어내자 창백해진 얼굴이 덜덜 떨렸다.

    하단전과 중단전까지 걷어내고 나자 남은 것은 백회혈을 차지한 상단전뿐.

    하지만 요선도 이것만큼은 내줄 수 없다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워낙 민감한 부분인 만큼 섣불리 공격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조영옥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죽을 수밖에...!]

    반쯤 메아리치는 목소리. 조영옥의 몸에서 반쯤 빠져나온 백발의 소녀가 사갈처럼 발악했다.

    [절대로 혼자 죽진 않아! 같이 죽자, 진조의 후예! 저승에서 못 다한 쾌락을 함께 누려보자고-!]

    “아니.”

    차갑게 응수한 강엽이 기광을 발했다.

    “죽는 건 너 혼자다.”

    우우우우웅...!

    오른쪽의 정안이 이혼대법의 요체를 낱낱이 풀어내고, 왼쪽의 마안이 심령을 파고든다.

    아까 했던 작업의 반복이지만, 이번엔 사뭇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

    강엽이 그녀의 의식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 * *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새하얀 꼬리에 묶여있는 조영옥의 모습이었다.

    -키이이이잉!

    일부 꼬리가 강엽의 접근을 알아채고 쇄도한다.

    그러나 강엽이 손가락을 휘두르자 육편이 찢겨지고 피가 낭자했다.

    남은 꼬리도 처리하자 조영옥이 신음을 흘렸다.

    “으윽....”

    “정신이 드시오?”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잡은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요선의 금안과는 다른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강엽을 위아래로 확인했다.

    “...강 무사.”

    “갑자기 돌변해서 날 죽이려들진 않겠지?”

    “그런 짓은 안 해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그녀는 곧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걸 알고 민망해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지만 그 어떤 사내도 보지 못한 청백지신을 강엽이 본 것이다.

    요선이 알몸으로 싸웠기에 은밀한 구석까지 안 본 데가 없었지만 그때하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강엽이 얼른 장삼을 벗어 걸쳐주었다.

    “더럽긴 해도 안 입는 것보단 나을 거요.”

    “...크흠. 고, 고마워요.”

    드물게 말을 더듬은 그녀가 장삼 자락을 여미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서 여기를....”

    [너, 진조의 후예! 감히...!]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는 전성.

    우레처럼 귓가를 강타하는 악의에 조영옥이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요선...!”

    [어딜 도망가!? 너희들은 내 거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새하얀 꼬리를 피로 더럽힌 소녀의 모습. 악귀처럼 일그러진 낯짝을 한 그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너, 태화문의 계집아! 네 욕망을 들어주려고 했건만! 감히 내 호의를 저버리고 도망가려고 하다니!]

    “호의라고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쉰 조영옥이 싸늘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게 호의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타인에게 호의를 품었겠군요. 내 몸을 빼앗은 주제에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닳아빠진 요부답게 양심 터진 소리를 하네요.”

    [넌 저 진조의 후예를 갖길 원했잖아! 난 그걸 들어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시끄러워요.”

    조영옥이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옆에 강엽도 있는데 저 여우 요괴가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강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 섞을 필요 없소. 시간 끌려는 수작이니까.”

    현실에 있는 조영옥의 육신을 터뜨려서 강엽과 함께 동귀어진할 심산이겠지.

    필사적으로 상단전을 지켰던 것은 살아남기 위함이 아니라 강엽과 함께 죽기 위함이었다.

    [알면 뭐 어쩔 거지? 저 계집을 데려나가도록 내가 순순히 허락해줄 것 같아?]

    “알 게 뭐냐.”

    심드렁하게 받아친 강엽이 품에서 작은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걸 본 요선의 눈이 경악으로 함지박 만해졌다.

    [너, 그건...!]

    “이걸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전날 광명마교주가 준 심상 조각.

    의식세계 안까지도 그를 따라온 심상 조각을 쥔 강엽이 쓰게 웃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무광암의 반동으로 인해 온몸이 너덜거리는 지금, 요선을 죽일 수단은 이것밖에 없었다.

    본래의 위력이라면 자신과 조영옥까지 휘말리겠지만, 광명마교주가 준 심상은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그 역시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던가.

    [아아아아아아악!]

    미쳐서 달려드는 요선을 향해 심상 조각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심상절예 구현....

    검결지에서 눈부신 빛이 뻗어나간다. 과거 무림맹의 대지를 갈라버렸던 필살의 심상절예.

    [안 돼애애애애애-!]

    장구한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파국에 빠트린 요녀는 마지막까지 추하게 발버둥쳤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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