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요선 (5)
찰나간에 완성된 심상절예.
이제껏 강엽이 견식한 심상절예, 심지어 광명마교주의 것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빠른 출수였다.
끼이이이이익......!
소름끼치는 소성과 함께 지반이 갈라진다.
‘문?’
두 쪽으로 갈라지며 열린 지옥문의 형상에 강엽이 미간을 굽혔을 때.
“불가능해! 고작 망령 같은 놈이 어떻게 심상절예를...!”
요선이 파리하게 질린 몰골로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휑하니 드러난 나락에서 핏빛 사슬들이 세 교왕을 향해 쏘아졌다.
세 교왕들이 생전의 무공을 구사하며 병장기를 휘둘러 튕겨내거나 날랜 경신술로 피했지만,
불현듯 닥친 묵직한 압력이 그림자를 뭉뚱그려 만든 세 교왕의 육신을 짓눌렀다.
그 사이 교왕들을 꿰뚫은 핏빛 사슬들이 그들을 나락 너머로 끌고 가려 할 때였다.
“어딜 감히!”
표독하게 외친 요선이 손바닥을 펼쳐들었다.
무언가 움켜쥐는 시늉과 함께 핏빛 사슬들이 움츠러들었는데, 그 모습에 요선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제대로 된 심상절예가 아니군! 이만하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도...!”
바로 그때.
정수리 위쪽에서 또다른 지옥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주먹이 그녀가 있던 곳을 내려찍었다.
어찌나 큰지 주먹의 크기가 사람과 견줄 만했다. 팔뚝까지 헤아리면 어지간한 거목에 필적하는 거체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피떡이 되었을 터.
“크윽...!”
요선은 운 좋게 피했다. 어깨가 뜯어지면서 걸레짝이 되었지만, 금안이 빛을 발하자 시간을 되돌리듯 뼈가 붙고 새살이 돋는다.
하지만 억제된 것처럼 무척이나 느린 회복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여우 계집.]
진조가 싸늘히 일갈했다.
[짐이 영락했어도 네년보단 고강하다. 네년은 그 몸뚱이의 혼백을 억누르느라 심상절예도 못 쓰지 않느냐? 쓰는 순간 심령이 흔들려서 육신의 주도권을 잃게 될 테지.]
“......!”
요선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발디딘 곳에서 또다시 지옥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손아귀가 들이닥친 것이다.
실로 거대한 체구인데도 소리보다 빠른 출수.
다섯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긋자 대들보가 산산이 박살나고, 그 위의 지붕까지 터져나가면서 음울한 하늘이 언뜻 드러난다.
남은 여섯 개의 꼬리를 호신강기 삼아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물러난 요선이 아연해했다.
“진짜도 아닌 찌꺼기... 더군다나 온전치 않은 상태인데도....”
진조의 몸 곳곳에 결손된 부위는 강엽에게 흡혈귀의 능력을 물려주면서 생긴 것.
이제는 대부분의 능력을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조의 저력은 여전히 가늠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괜히 혈마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게 아니지.’
만약 진조가 잠들지 않고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했다면 고금제일인이 됐을지도 모르지.
강엽이 그리 생각하면서 전면을 바라볼 때, 붉은 사슬에 옥죄인 교왕들이 무저갱 너머로 끌려갔다.
요선이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으나 검붉은 거인의 팔이 나타나서 진로를 방해한다.
-쿠오오오오오오!
요선을 굽어보는 마신상(魔神像).
진조를 감싼 마신상의 눈이 호선을 그리는 순간, 거대한 일수가 그녀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그 여파만으로 땅이 조각나고 심법진의 풍경이 찢겨나가며 그 너머의 공간이 훤히 드러난다.
[됐군.]
-키에에에에엑!
진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교왕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락으로 끌려가고,
[오라, 짐의 군세여.]
칠흑같이 시커먼 지옥 밑바닥에서 수천, 수만의 마귀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강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심상절예는 뭐지? 한 가지 공능만 가진 게 아닌 것 같은데?”
세상 모든 심상절예를 봤다고 할 순 없어도, 지금까지 겪은 심상절예는 이렇지 않았다.
모두 그들의 근원이자 이상향을 보여주듯 한 가지 공능만을 보이지 않았던가?
[심상절예와 술법의 통합이니라.]
“...합쳤다고?”
[심법진이 완성되면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인 ‘심상법(心像法)’으로 승화한다. 그걸 심상절예 안에 녹여내면 이런 짓도 가능해지는 게지.]
말하자면 마신상은 심상절예고, 지옥문은 심상법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진조의 심상이야말로 술법과 무공을 결합한 완전무결한 술법무공일 터.
[저 마귀들은 모두 짐이 잡아먹은 놈들의 망령이다. 놈들의 피에 담긴 혼백과 영성이 짐의 심상에 녹아든 게다. 이를테면 망자의 기억이라고 할까. 그걸 심상법으로 구현한 게다.]
이미 완성되었기에 진법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잔재만 남은 상태에서 강엽에게 대부분의 능력을 물려주었음에도 진조는 그토록 고강했다.
[하지만 역시 한계가 있군.]
그 말과 동시에 지옥문이 닫히고, 진조를 감싼 마신상 또한 허공에 녹아내리듯 천천히 사라졌다.
진조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저년의 말대로 짐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니....]
심상절예의 위력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전성기만은 못하다는 뜻이리라.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애초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제부터의 난관은 홀로 극복해나가야겠지.
[그럼 무운을 빌겠다.]
건너편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는 요선을 힐끗 일별하면서 희미해지는 진조의 신형.
그때까지도 두려움에 허옇게 굳어졌던 요선이 그 모습을 보고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사, 사라졌어?”
혹시나 다시 진조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하, 그럼 해볼 만하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교왕으로 둔갑했던 세 개의 꼬리.
아직 여섯 개의 꼬리가 남아있긴 하지만, 비대했던 존재감은 눈에 띄게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요선은 득의양양해하면서 여섯 갈래의 꼬리를 터질 듯이 부풀어올리며 강엽을 향해 쏘았다.
“물론이지!”
강엽은 어둠 속에 녹아들어 꼬리를 피했지만, 요선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교소를 흘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꼬리를 세 개나 잃은 건 뼈아프지만, 그 덕에 골칫덩이를 치웠으니까!”
진조에게 겁을 먹긴 했어도 그녀 역시 한때 혈마를 지척에서 보필했던 측근.
설령 심상절예가 봉인되었다 할지라도 먼 옛날부터 쌓아온 힘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쿠우우우우우웅!
자신의 몸을 떠난 꼬리들이 흐물거리면서 형상을 갖추어가는 모습에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어찌 보면 내 꼬리는 진조의 심상과 비슷하지. 그자처럼 어마어마한 군세를 부릴 순 없지만....”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들이 병장기를 들고 일어섰다.
생전의 이목구비까진 재현하지 못했으나, 그 안에 갖춘 기척은 팔대교왕에 필적하는 수준.
요선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놈을 죽여라, 영마(影魔)들이여!”
* * *
-끼아아아아악!
갖가지 병장기로 무장한 영마들이 괴성을 질렀다.
외양은 몰개성할지라도 농밀한 기파로 사위를 옥죄이는 존재감은 만만히 볼 수 없을 터.
그들이 본격적으로 생전의 무공을 출수하기 전에 강엽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쿠웅!
진각을 밟자 지면이 출렁이듯 흔들린다.
단순한 충격으로 땅을 흔드는 게 아니었다. 아까 전 진조가 그랬듯 무거운 압력으로 지면을 찍었다.
‘기껏해야 흉내만 낼 뿐이지만....’
하지만 팔대교왕에 버금가는 강자들을 잡기 위해선 기동력을 꺾는 게 선결되어야 했다.
단지 운신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을 넘어, 용천혈 자체를 묶어두는 진각.
거인의 손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운 중압감을 발현, 영마들을 인정사정없이 찍어눌렀다.
-끼기기기긱...!
영마들의 무릎 관절이 꺾이고 뒤틀리는 꼴에 요선의 아미가 하늘을 향해 솟았다.
“상대의 운신을 묶는 보신경이라고?”
“의외로 근골이 튼튼하진 않군.”
영마들과 달리 강엽은 무거운 기파 안에서도 움직이는 데 하등 지장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영마를 향해 빛살처럼 질주하며, 발검과 동시에 참격을 퍼붓는다.
뒤늦게 그 움직임을 쫓은 요선이 무어라 외치고, 영마가 호신강기를 둘렀지만 이미 늦었다.
자성검법 일초식 뇌령, 가장 단순하지만 빠른 쾌검이 영마의 상반신을 비스듬히 가르고 지나갔다.
-키아아아아악!
길게 갈라진 육신에서 검은 먹물이 솟구쳤다.
사람이었다면 심장이 쪼개져서 즉사했겠지만, 영마는 애초에 요선이 만들어낸 망령.
고통스럽게 절규하면서도 날카롭게 관수를 모아, 작게 드러난 강엽의 가슴팍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강엽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콰직!
한쪽 팔을 수평으로 든 채 휘돌면서 관수를 흘리고, 팔꿈치 일격으로 안면을 뭉개버린 것.
직후 골통이 완전히 박살난 놈을 왼쪽에서 도격을 휘두르는 놈에게 던지고, 암신을 펼치면서 철퇴를 내려친 놈의 위쪽에서 나타났다.
높이 치켜든 뒷꿈치 족격.
하나 영마의 호신강기가 강렬한 반발을 일으키면서 강엽을 밀어냈고, 그 틈에 다른 놈이 채찍을 날렸다.
새카만 편강(鞭罡)이 길게 늘어나며 사방에서 감싸려는 광경에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잽싸게 천근추로 무게중심을 낮춰 채찍 아래로 쏙 빠져나왔지만, 이미 그곳엔 매복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흡...!”
부지불식간에 쭉 밀려난 강엽이 헛숨을 삼켰다. 손바닥을 뻗으면서 역장을 일으켰으나, 예리한 암경은 역장을 송곳처럼 뚫어버렸다.
그나마 불괴의 공능으로 막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바닥에 구멍이 날 뻔했다.
‘상처야 재생력으로 치료하면 되지만....’
문제는 독처럼 스며드는 사특한 마기였다.
놈들이 기파를 뿌릴 때마다, 경력을 쏟아낼 때마다 마기가 침습하여 공력 운용을 방해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여기에 고막을 강타하는 음공까지.
혈공진기가 절로 일어나서 심신을 보호했으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쾌감이 남았다.
“후훗,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시대를 대표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지. 전부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을걸?”
진조와 혈마가 천하를 논하던 시대와 비교해도 한참 전의 시대를 살아갔던 대종사들.
현 시대의 천하팔존과 비교하면 다소 떨어져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수들을 얕볼 순 없었다.
“심법이나 몸을 다루는 기예는 이 시대의 무공이 더 발전했을지 몰라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천지에 자연지기가 충만했던 시절. 조금 떨어지는 무공으로도 얼마든지 대종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단다.”
무공은 그 시대의 무림상을 반영하기 마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행이 달라지듯 무인들의 무공도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후대의 무림인들이 무조건 전대의 무림인들을 능가하는 건 아닌 바.
강엽의 기준에서 보면 초식에 낡은 부분이 존재할지라도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들 모두 심극의 경지에 올라선 절세고수들이었다.
구우우우우웅-!
제각각 심상의 파동을 발하면서 육신을 내려찍는 중압감을 파훼하고, 필살의 절기를 구사한다.
그들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요선이 고혹적으로 눈웃음을 쳤다.
“자, 넌 이 많은 심극을 어떻게 막아낼까?”
피할 곳은 모조리 막힌 상황.
어느덧 골통이 박살났던 영마도 제 형상을 되찾으면서 심극을 격발하고 있었다.
평범한 수법으로는 못 죽인다는 의미.
‘웬만하면 끝까지 아껴두고 싶었는데....’
혀 끝에 쓴맛이 감돌았지만, 아까워서 아껴두기만 하면 정작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법.
강엽은 자성검을 던지고 양손의 손등을 바깥으로 향해 포갰다.
연이은 격전으로 반쯤 찢어진 수투가 날아가고, 해와 달의 문양이 드러나면서 심후한 공력이 싹텄다.
-일월합신.
구우우우웅...!
백염과 빙백. 극양과 극음의 공력이 충돌, 일대에 막대한 압력을 걸면서 심극의 발동을 저지한다.
“소용없어. 잠시 막을 수는 있겠지만, 얇은 판자로 홍수를 막겠다고 설치는 꼴이야.”
콰콰콰콰콰콰쾅!
요선의 말마따나 연달아 일어난 극양과 극음의 충돌로도 여섯 심극을 완벽히 막는 데는 실패했다.
조금씩 공간을 내주면서 밀린 끝에, 이제는 고작 반 장도 안 되는 짧은 거리만 남겨둔 판국.
하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두었으면서도 강엽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일월합신은 어디까지나 시간벌기용.
상중하 삼단전이 과열될 만큼 진기를 쥐어짜내면서, 마음으로 벼려낸 검을 일자로 휘둘렀다.
심상절예 구현.
-무광암.
공간을 갈라버린 심검이, 코앞까지 접근한 심극을 모조리 삼키고 여섯 영마와 요선까지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