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16화 (311/450)

61화. 요선 (3)

천하팔존.

광명마교주를 비롯한 사마외도의 초고수들이 대거 등장한 이후로 조금 퇴색되긴 했지만,

그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의미는 천하팔존 중 몇 명이 물러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빈자리는 광명마교주와 염왕이 채웠다. 설령 또다른 천하팔존이 강호를 떠난다 한들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터.

그리고 여기, 천하팔존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젠장! 이지를 잃었다면서? 허초에 하나도 안 걸리는구만 이지를 잃기는 개뿔이!”

사자염도 하후진.

전신에 푸른 창염을 두른 그가 대도를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공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뒤이은 충돌음.

터엉!

매서운 도격이지만 신유는 족격으로 받아치고, 반동으로 이 보 가량 물러났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썹은 치켜뜬 게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하후진이 씩 웃으며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슬쩍 후볐다.

“기분 나쁘면 어쩔 건데? 혈교한테 속절없이 당한 스스로를 탓하쇼!”

도발과 동시에 다시 한번 대도가 짓쳐들어오자 신유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일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하후진이 방어로 돌렸을 때는 이미 족격이 날아온 뒤.

시커먼 선이 허공을 도려냈다.

“이런 씹...!”

쿠와아아앙!

전신을 감싼 창염과 너울지는 공력 경파가 충돌, 천지 사방에 푸른 화마를 뿌렸다.

떨어지는 불꽃을 피해 전권을 누빈 백서희가 훤히 빈 신유의 등짝을 향해 검초를 뿌렸다.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한달음에 거리를 좁히고, 모든 공력을 일점에 집중한 척초로 기습.

하지만 신유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마냥 검극이 피부를 찌르기 전에 막아냈다.

우우우우우웅-!

넓게 벌어진 육각의 호신강기가 검극을 비스듬히 튕겨내자 백서희는 잇몸을 악다물었다.

‘일격으로 안 된다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좌검을 휘두른다. 역수로 쥔 검이 푸른색 광채를 토하며 하단을 휩쓸었다.

신유는 위쪽으로 반격초를 꽂으려고 했으나, 연계를 잇기도 전에 웅혼한 공력이 밀려들어왔다.

소림칠십이종절예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굳건한 종아리 비복근에서 끌어올린 발경 격타가 신유의 옆구리를 노리고 쏟아진 것.

소림 불문의 신공절학은 천하팔존에게도 만만치 않은지 신유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머리 위에서 날아오는 검초를 막아야 할지, 옆구리를 파고드는 전강의 일장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전신을 살라먹을 기세로 들이닥치는 푸른 불길을 막아야 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죽어어어어엇!”

기합성을 토한 하후진이 도격을 내지르는 동시에,

신유의 삼면에서 똑같은 육각의 호신강기가 나타나 공세를 막아냈다.

콰콰콰콰콰콰쾅......!

땅거죽이 뒤집히고 깨진 청석 파편이 튀는 가운데 백서희가 잔기침을 콜록 내뱉었다.

“어우, 괴물 같은 영감님. 욕 나오게 강하네.”

하후진의 미간에도 깊은 골이 파였다.

“쓰벌, 돌겠구만. 심극은 쓰지도 않았는데.”

심극을 쓰지도 않고 일행을 압도한 신유의 기량.

만약 일대일로 싸웠다면 몇 합 붙어보지도 않고 처참하게 패했을 터.

하후진이 자괴감에 중얼거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전강이 쓴웃음을 흘렸다.

“상대는 수십 년간 천하팔존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오. 이렇게 버티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물론 천하팔존 사이에도 간극은 있다. 하나 신유 역시 이지를 잃었기에 다소 수동적으로 변했다.

만약 그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싸움에 임했다면 이미 저승길 문턱을 밟았을지도....

“하지만 천하팔존도 인간이오. 벽을 넘은 초고수 세 명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터.”

심극을 안 쓰는 건지 못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유기적으로 몰아붙이면 이길 수 있으리라.

“퉤! 힘내봅시다. 강엽 그놈도 혼자서 교왕과 싸우는데, 우린 한 놈도 감당하지 못하면 나중에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지.”

흙먼지를 뱉어낸 하후진이 전신에 두른 창룡갑의 불길을 더 키웠다.

정기신을 합일하여 벽을 넘은 뒤 미숙했던 창룡갑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이젠 그 자신이 불길에 화상을 입을 일도, 어설픈 불장난으로 아군에게 폐를 끼칠 일도 없었다.

전강이 백보신권을 격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행은 다시 신유에게 달려들었다. 백서희와 하후진이 양 날개처럼 진형을 넓게 펼치면서 신유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 사이로 침투한 전강이 근접 백타를 벌였다.

쾅! 쾅! 콰아아아앙-!

천하팔존의 절기와 소림칠십이종절예. 천하를 논하는 신공절학들이 서로를 강타하고 짓이겼다.

점창의 쾌검과 염왕의 패도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천하팔존의 아성에 흠집을 낸다.

“으랴아아아아아!”

염강(炎罡). 극점을 넘어 점점 탈색되는 듯한 화염의 강기가 육각의 호신강기를 부수고,

빛살처럼 쏘아진 후예사일이 경추 깊숙이 박혔다.

“끄헉...!”

싸움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신유가 비명을 터뜨린 순간.

우우우웅!

“주심...!”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에서 진기를 의지대로 다스리며 활화산처럼 발출하는 회심의 족격.

신검합일과 대응되는 상승기예가 펼쳐지는 순간, 전강이 앞을 막으면서 양손을 내밀었다.

활짝 피어난 연꽃의 형상을 그리는 기파.

소림칠십이종절예, 금강반야신공(金剛般若神功)의 불문 공력이 주심을 상쇄시켰다.

파파파파파파팍!

하박과 주먹이 부딪치고, 족격과 슬격이 부딪친다.

다시 호신강기를 깨버린 하후진의 일도가 신유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크윽...!”

무참하게 일그러진 신유가 반격을 꾀해보지만, 이번엔 백서희의 쌍검이 종아리와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족법을 주력으로 삼은 신유에게는 상당한 치명상.

눈을 부라리면서 백서희를 향해 격공을 뻗었지만, 그 조짐을 눈치챈 전강이 한발 앞서 관수를 찔렀다.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어깻죽지가 파열된다. 잠시 주춤한 신유의 턱주가리에 장저가 박혔다.

빡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치솟은 신유의 면상.

하나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휘돌리면서 다리를 휘두르자, 시커먼 먹선이 일대를 파죽지세로 휩쓸었다.

“정신 차리시오, 신유!”

“망할, 소용없수다!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후진이 이를 빠득 갈면서 염도를 휘둘렀다.

-초열도(焦熱刀).

염왕도문의 후반 삼초식. 허공에 무수한 궤적이 그어지고, 그 뒤를 따라 불길이 일었다.

빠져나갈 공간을 일체 주지 않고 퍼붓는 궤적에 신유도 주춤했다.

하지만 염왕도문의 절초도 역부족이었던 걸까.

화아아아아악!

한순간 뿜어낸 강대한 기파가 일대를 진공으로 만들어 불길을 꺼트렸다.

콰직!

그때 소리없이 다가온 백서희의 검이 신유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쳇!”

베었다고 여긴 찰나 손가락 한마디만한 호신강기가 검세를 막아냈다.

그나마 검풍이 튀며 경동맥 주변이 살짝 베였지만, 목숨을 거두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전강, 소림의 아라한이 뛰어오르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투아아아아앙!

대포처럼 터진 선풍각(旋風脚)이 호신강기를 박살내고, 몸이 꺾인 신유가 지반 깊숙이 박혔다.

충격파를 맞고 내려앉은 구덩이.

그 안에 대 자로 뻗은 신유를 향해 하후진이 뛰어올랐다.

꾸아아앙!

호신강기를 짜낼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물아붙이는 필살의 도격.

신유의 육신이 더 깊숙이 매몰되고, 푸른 창염이 그 위를 덮었다.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는 깊은 구멍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하후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해치웠나?”

“너, 너! 그거 말하면 안 되는데...!”

백서희의 지적에 하후진도 창백하게 질려서 아차 했지만 불길한 말은 씨가 되는 법.

무저갱 깊숙한 곳에서 절대고수의 의념이 지상까지 퍼져나왔다.

-유하무환(流霞無患).

신선이 빚은 술 한 잔에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월하누각(月下樓閣) 환담가인(歡談佳人).

달 아래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환담을 나눌지니.

-풍류무쌍(風流無雙).

풍운아만이 진정으로 무적이리라.

“심극...!”

설마 이제 와서 심극을 쓸 줄이야.

세 사람의 안색이 일제히 해쓱해졌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대응해야 한다.

그렇게 일제히 절기를 쏟아붓는 순간, 압도적인 의념의 파동이 세 사람이 있는 곳을 뒤덮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궁......!

멀리서도 훤히 보일 만큼 눈부신 포말이 치솟았다.

* * *

“쿨럭!”

백서희는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위험했어.’

시기적절하게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극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겠지.

“하아, 하아....”

쓰러진 두 사람을 일별했다.

정면에서 심극을 받아낸 전강은 정신을 잃었고, 구명절초로 간신히 길을 열은 하후진은 탈진했다.

그 사이로 몸을 날린 그녀 역시 기혈이 끓어오르면서 중한 내상을 입은 상황.

‘천하팔존... 괴물 같네.’

새삼 이런 괴물들을 연달아 쓰러트린 강엽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이 됐다.

그때였다.

“허, 이런 일이....”

왠지 허탈감에 찬 목소리.

그녀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리자 신유가 입가 사이로 피를 흘리며 쓰게 웃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요?”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심극을 쓴 게 원인인지, 아니면 심극이 뚫리고 부상을 입은 게 원인인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유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깨어나자마자 보는 게 절세미녀라니 기쁜데...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커억!”

기어이 허리를 꺾으면서 피를 토한 신유의 모습.

검파를 쥔 손을 내려놓은 백서희는 이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고민됐다.

어쩌면 신유가 다시 정신이 회까닥 돌아서 죽이려들지 않을까?

“후, 걱정 말게... 요녀의 섭혼술은 깨졌으니....”

“천하팔존쯤 되는 분이 섭혼술에 당했다고요?”

“평범한 섭혼술이 아닐세. 그건....”

말하다 말고 신유가 흠칫 굳어졌다.

백서희는 그의 상처에서 무언가 빠져나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털?”

“그 요녀의 것이지.”

눈처럼 하얀 털. 주먹만한 털뭉치가 심장 부근에 박혀 있었던 것.

저런 게 어떻게 사람의 몸속에 있을까 의문이 들었을 때, 털뭉치가 급속도로 덩치를 키웠다. 이내 온전한 형상을 갖춘 길고 탐스러운 털뭉치.

백서희는 당혹스러워졌다.

“...꼬리?”

누가 봐도 짐승의 꼬리였다.

아마 개나 늑대가 아닐까?

‘아니, 여우일 수도....’

신유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게 문제였지. 어찌 한 건지 몰라도 이게 내 몸에 심어지는 순간 저항할 수 없었네.”

그때 털뭉치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신령스러우면서도 요사스럽게 느껴지는 기운.

그리고 저편에서 높고 장대해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심상의 파동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그 요녀가 정체를 드러내려나 보군.”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진 꼬리가 저 스스로 살아 움직이듯 퍼덕거리더니, 잠시 후 완전히 사라졌다.

“당신을 그리 만든 요녀... 호교사천인가요? 대체 정체가 뭐죠?”

“사람으로 둔갑한 요괴일세.”

“네?”

“미안하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어쨌든 사람은 아닐세. 그것만은 확실해.”

우우우우웅......!

태화문의 경내 곳곳에서 빛줄기가 솟구쳤다.

기둥처럼 솟구친 아홉 개의 빛줄기가 한 점에 모이며 문주전 아래에 내리꽂히는 광경.

짐승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가득 메웠다.

* * *

“...결국 이리 되는구나.”

대공자는 피를 토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이게 오라버니가 원하던 결말이었나요?”

그렇게 말하는 조영옥도 멀쩡한 몸은 아니었다. 옷은 찢기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고운 피부에 흉한 상처가 벌어지며 혈인이 됐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겼다.

대공자가 힘겹게 웃었다.

“하하...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

그래, 이런 결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대공자도, 조영옥도 문주가 되길 원했을 뿐, 태화문이 거덜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옛날로 돌아가도 난 혈교의 손을 잡겠지.”

“그건...!”

“그렇지 않고선 널 이기지 못할 테니까.”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출발선은 같지 않았다.

대공자가 더 일찍 태어났고, 장남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지원을 받았으니까. 공을 세울 기회도 많았다.

만약 조영옥이 평범했다면 그가 무난히 문주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조영옥은 타고난 무재로 그의 뒤를 따라잡았고, 마의 벽을 넘고 삼화취정을 이뤄냈다.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넌 아버지조차 뛰어넘었겠지. 난 그걸 참을 자신이 없었다. 쿨럭!”

마른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온다. 이미 심맥이 끊어진 대공자는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회광반조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목전에 뒀음에도 대공자는 형형한 눈빛으로 누이동생을 노려보았다.

“말해봐라... 넌 왜 문주가 되고 싶었느냐?”

장남이니까. 첫째니까. 언젠가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참 하찮은 이유였지만, 대공자는 태화문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왜 태화문의 문주가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조영옥은 아니지 않은가?

“...대단한 이유는 없어요.”

조영옥의 만면에 쓴웃음이 어렸다.

“절 무시한 놈들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거든요.”

어릴 적엔 무공이 재밌어서 익혔고, 커서는 그녀를 무시한 자들을 누르기 위해 무공을 익혔다.

강해지면 어른들의 칭찬을 받은 게 기뻤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열심히 해도 저는 후계자 경쟁엔 끼지 못할 거라고요.”

지금이야 대공자와 조영옥의 구도로 굳어졌지만, 원래는 더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다.

“그게 짜증났어요. 나보다 못한 놈들이 후계자랍시고 세력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한 마음이었지만....”

하지만 때로 작은 동기가 원대한 행보의 첫걸음이 되는 법이다.

조영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수련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은 잊고 야망만이 남았다. 아비의 눈에 들기 위해 공을 다투고, 함정을 꾸며서 경쟁자들을 실각시키고, 사람들을 권력과 재물로 부렸다.

“저는 범속한 사람이에요. 나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진 사람을 보면 빼앗고 싶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복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권력에 중독됐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권력자들이 그렇지 않은가.

“혹시 뭐 엄청난 대의명분을 기대하셨다면... 실망시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큭큭...!”

대공자가 웃었다.

“그래, 너나 나나 똑같구나. 다만 네가 더 절실했을 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대공자의 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물가물해진 얼굴로 누이동생을 바라본 대공자가 부탁했다.

“혹여 내 사람들이 살아남는다면... 해치지 말아다오.”

“제 사람들을 죽인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난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회유하고 싶었어.”

조영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엽이 혈안사군을 운운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 시점에서 대공자의 진의를 알 수 있었으니까.

풍도마장을 비롯해서 그녀의 사람들을 죽이고 시신을 모욕한 것은 혈안사군의 독단이었겠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한다.”

대공자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지도, 혈교와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지만.

누이동생을 대등한 경쟁자로 여긴 그는, 태화문의 미래를 그녀에게 맡기고 영면에 빠졌다.

그 사실에 조영옥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곱씹을 때.

“안타깝네. 제 손으로 혈육을 죽이다니.”

“...!”

뒷목에 닿은 숨결. 솜털이 쭈뼛 곤두선 조영옥이 대도를 휘둘렀지만 상대는 멀찍이 물러났다.

조영옥의 미간이 구겨졌다.

“당신?”

“반가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귀밑까지 입술을 찢는 여인.

그 순간, 백옥같은 손이 튀어나와 얼굴을 찢어버렸다.

사람의 거죽을 찢고 나온 나신의 소녀.

양눈에 금안을 박은 백발의 소녀가 아홉 갈래의 꼬리를 살랑거렸다.

“네 몸이 탐나는데, 나한테 줄래?”

피를 묻힌 채 활짝 웃는 소녀의 얼굴에선 감히 저항할 수 없는 마성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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