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태화 (4)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혈안사군은 그 목소리에서 더없이 위험한 마성(魔性)을 감지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상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존재라고 판단하자마자 몸이 반응한 것.
터억!
창졸간의 출수는 닿지 못했다. 호신강기에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담은 반탄강기(反彈罡氣). 심후한 공력이 실린 기습이 되레 튕겨나왔다.
자신의 공력을 한 손으로 흩어버린 혈안사군은, 앞을 막아선 중년인을 발견하고 시퍼런 살기를 일으켰다.
“이 새끼들이...!”
“진정하시지요, 누님. 혈천성군께서 특별히 모시라고 하신 분입니다.”
“검... 아니, 혈천성군이?”
무심코 검마라고 부를 뻔한 실수를 급히 목구멍 너머로 삼켰지만 소용없었다.
“검마라고 불러도 된단다.”
중년인에게 보호받은 여인이 대뜸 말해버렸으니까.
내심 무위를 가늠할 수 없는 대적을 경계하고 있던 혈안사군의 표정이 악귀처럼 썩어문드러졌다.
“...너 누구지? 그 이름을 아는 이들은 본교에서도 극소수인데?”
교주와 신녀, 그리고 팔대교왕뿐.
외인인 주제에 교의 비밀을 탐구했던 모산혈조도 호교사천이 봉인됐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본녀가 누구냐고?”
여인의 입가에 떠오른 야릇한 미소.
혈안사군은 굳게 입을 봉인했으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렸다.
‘무슨 놈의 염기(艶氣)가...!’
엄밀히 말해 여인은 평범했다. 미인이긴 하나 혈안사군을 감탄시킬 정도는 되지 못했다.
한데도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요동친다. 조그마한 몸짓 하나에도 시선을 빼앗기고,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혈룡검군과 태화문의 대공자도 뜨겁게 갈구하는 눈빛을 보낼 정도였다.
여인인 혈안사군도 몸이 달아오르는데, 건장한 사내들은 얼마나 큰 충동을 느끼겠나.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이지를 잃은 것처럼 탁한 눈빛을 번들거리는 중년인뿐.
절세고수의 감이 속삭인다. 그녀의 출수를 튕겨낸 중년인보다 뒤에 숨은 여인이 몇 배는 위험하다고.
“이 쌍년이 무슨 사술을...!”
“어머, 실수했네. 주의를 놓치면 이렇게 되어버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손가락을 딱 튕기자 두 사내가 헐떡이듯 막힌 숨을 토해냈다.
“헉!”
“커억! 후욱...!”
그들을 못마땅하게 흘겨본 혈안사군이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격동했지만 절세고수의 부동심으로 억눌렀다.
“혈룡, 본녀가 누군지 말해줄래?”
“아, 예... 누님, 저분은....”
“호교사천인가? 검마와 같은?”
그녀가 먼저 내뱉는 말에 혈룡검군이 말문을 잃자 여인이 교소를 내뱉었다.
“호호, 멍청하진 않은걸. 본녀는 요선이라고 한다.”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를 말에 혈안사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흥, 처음에만 좀 당황했을 뿐이야.”
다혈질적인 성미이긴 해도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래, 호교사천 요선. 그럼 저놈은 누구지? 공력이 뿌리 깊은 나무처럼 묵직하던데... 설마 불괴강시인가?”
“사람이지. 이지를 잃은 꼭두각시. 예전에 꽤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음, 누구라고?”
“신유입니다, 요선님.”
혈룡검군의 말에 대공자와 혈안사군이 깜짝 놀랐다.
대공자는 천하팔존이 혈교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혈안사군은 신유가 뇌옥을 나왔다는 사실에.
“아, 그래. 생각났어. 천하팔존인지 뭔지라고 했지? 심상절예도 못 쓰는 놈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이라니. 너무 한심해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야.”
“...당신 시대에 유난히 괴물들이 많았을 뿐이야. 근데 이런 대화를 여기서 해도 되나?”
이 자리엔 대공자도 있다. 비록 남편으로 삼긴 했지만 그녀는 공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검마를 비롯한 호교사천의 존재는 교의 최고기밀.
아무리 태화문이 산하 문파라고 해도 내밀한 사정을 함부로 내보여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아, 그건 괜찮아졌습니다.”
“말이 이상한데?”
“얼마 전까지라면 누님의 말씀대로 안 됐겠지만, 마침 교왕의 자리에 공석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혈안사군의 표정이 사납게 굳어졌다.
“누님의 짐작이 맞습니다. 위에선 태화문의 문주께 교왕의 자리를 하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안이 아니라 하사.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에 대공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미욱한 몸이라서 그 같은 중책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구려. 이 몸은 아직 교왕의 자격에 합당한 공을 세우지도 못했소만.”
“알고 있습니다. 하나 사천 제일의 흑도 방파의 주인께 교성의 자리를 드리는 건 실례겠지요.”
“음...!”
“받아들이세요, 문주님. 본교의 날개 아래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충심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혈룡검군의 말에 혈안사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가 이렇게 달변이었던가?”
“...라고 혈천성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랬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이구, 골이야.”
미간을 문지른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위쪽에서 당신을 확실히 붙잡고 싶은가 본데, 받아들여. 어차피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잖아?”
말은 조곤고곤하지만 눈빛은 강압적이다. 만약 거절하면 좋은 꼴을 보진 못하겠지.
“...알겠소. 내 부족한 몸이지만, 교왕의 자리를 받아들이겠소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의식은 훗날 전쟁이 끝나면 본교에 들러 치르시지요.”
그때쯤이면 대공자도 교왕의 지위에 합당한 무위를 갖추었을 터.
대공자가 이를 악물었다.
“...알겠소.”
“자, 그럼 내 볼일부터 말해볼까?”
별안간 요선이 손뼉을 치자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진기를 일으켰다.
요선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교왕들은 알겠지만 이 육신은 원래 내 몸이 아니야. 내 ‘심상’을 담기엔 역부족이란 말이지.”
“...강해지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것도 방법이겠지. 실제로 검마는 그런 식으로 한계를 넘었으니까. 하지만 빠른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 말은?”
“사실 처음엔 혈안 네 몸을 빼앗을 작정이었지. 하지만 여기 와서 생각이 바뀌었어.”
“남의 몸을 빼앗는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 하네?”
“이젠 아니니까. 더 적합한 몸을 찾았거든.”
“누구... 아, 설마?”
“네 생각이 맞을 거야.”
요선의 만면에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문주의 누이가 사천삼미라 불리고, 심지어 삼화취정에 올랐다면서?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어디 있지?”
* * *
일행은 시간을 두고 움직였다.
적들의 주의를 끄는 게 계획의 첫 단추인 만큼 충분한 인력과 시간이 요구됐던 것이다.
태화문의 장원이 자리한 달주를 비롯해서, 사천 일대 대도시들에 같은 방문(榜文)이 붙었다.
[매혼(賣魂) 패륜(悖倫) 징벌(懲罰)]
[칠월 칠석의 날에 조상이 일군 문파를 외세에 팔아넘긴 매혼자에게 생사결로 죄를 묻노라.]
[태화문 흑호선 조영옥 포고.]
성도, 중경, 의빈, 광안....
“역시 주인님께선 계획이 다 있으셨군.”
그리고 노주.
허겁지겁 달려온 방도가 떼어온 방문을 읽은 완안극은 이것이 강엽의 계책임을 알고 환하게 웃었다.
단목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방문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노주 저잣거리에 쫙 붙었다고?”
“예, 예! 너무 많아서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충 봐도 백여 장은 훨씬 넘어보였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방문을...?”
“하오문을 부리셨겠지.”
완안극이 픽 웃으며 말했다.
단목정은 물론, 수련하다 말고 불려온 금사하도 하오문이란 말에 봉목을 크게 떴다.
“놀랄 거 없다. 단목 방주는 알고 있지 않나? 주인님께서 하오문주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예, 그렇다면 이건....”
“선전포고다. 날짜까지 명시하지 않았느냐. 혈교와 태화문이 한 방 얻어맞은 거다.”
“하지만 이공녀는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세력이 없는데 맞설 수 있을까요?”
“세력이 없기는. 사천삼패가 있지 않느냐?”
“예?”
“성도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전장이 형성됐다. 지금까진 혈교가 공격하고, 사천삼패를 비롯한 백도 정파는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하나 이 선전포고를 계기로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어.”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돼요, 만독자 어르신.”
금사하의 물음에 완안극이 팔짱을 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초리.
“혈교도 눈치챘을 거다. 이건 태화문의 이공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녀의 뒤에 협력자가 붙었다고 생각할 거다. 경각심이 들겠지.”
“태화문을 방어할 거란 말씀이군요.”
단목정이 말하고, 완안극은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일방의 주인이라서 그런지 대세를 판단하는 안목은 단목정이 금사하보다 더 뛰어났다.
“혈교와 태화문, 위지세가는 사천삼패를 몰아붙이고 있다지? 근데 섣불리 군세를 뺄 수 있을까?”
“아...!”
“못 뺄 거다. 그 즉시 사천삼패가 달려들 테니까. 뺀다고 해도 전쟁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만 뺄 터.”
심지어 풍문에 따르면 혈풍신군이라는 교왕은 별동대를 이끌고 청성과 아미의 영역을 휘젓고 있었다.
지금까진 소수 정예와 흑도의 지원에 힘입어 두 구파를 괴롭혔으나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두 구파가 혈풍신군이 태화문에 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챌 거다. 혈풍신군은 태화문에 싸움이 벌어질 걸 알아도 합류하지 못하는 게야.”
그건 지금까지 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입장은 확실하게 역전된 셈이었다.
“당문 역시 마찬가지. 혈안사군과 위지세가의 가주, 둘 중 하나만 빠져도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할 거다.”
전쟁의 향방을 뒤바꿀 일인군단이 사라지면, 병력이 얼마나 많든 오합지졸이나 진배없다.
이로써 태화문의 이공녀는 사천삼패와 손을 잡지 않고서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게 전부도 아니지. 방문은 징벌을 운운했다. 이건....”
도발.
태화문의 신임 문주에게 자격을 묻겠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오누이 간의 생사결로.
그때, 또다른 방도가 찾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하오문의 사람이 왔다는 보고였다.
“사천성을 총괄하는 당주 오 모(某)입니다. 강 무사님의 서찰을 가져왔습니다.”
“주인님의...!”
완안극이 가장 먼저 서찰을 보고 미소를 띠었다.
“주인님께서 조만간 부르시겠다는군. 그때까지 숙정방을 잘 지키라는 분부시다.”
그로부터 사흘 뒤, 태화문 휘하의 흑도 방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크아악!”
“막아! 내원에 못 가게 해-!”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굉음과 절규.
위지세가의 무인들은 자신들이 이토록 무력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팔가에 미치진 못해도,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가 서른 곳을 뽑는다면 능히 들어간다고 자부했던 대가문.
그 대가문이 궤멸하는 데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습격자는 단 두 명, 밤하늘처럼 새카만 장삼을 펄럭이는 사내와 하얀 옷자락을 흩날리는 절세가인.
고작 두 사람에 의해 세가의 타격대가 절멸했다.
“귀영...!”
빠지지지지지직-!
사내의 옷과 대비되는 하얀 뇌광이 사방팔방 휘몰아친다. 제멋대로 꺾이고 질주하는 벼락의 폭풍이 날붙이를 든 적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육안으로 보고 피하기엔 지나치게 빠른 벼락. 창백한 빛살이 번쩍일 때마다 세가의 무인들이 새카맣게 타서 쓰러진다.
‘하필 가주가 세가를 비운 사이에...!’
아니, 가주가 있어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위지세가의 가주는 삼화취정을 이뤘으나, 저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위지세가의 이인자이자 가주의 아우인 위지혁은 진저리를 치며 짓씹듯 외쳤다.
“멈춰!”
강엽은 멈추지 않았다.
진각을 밟자 대지가 출렁이며 전각까지 흔들렸고, 기파를 뒤집어쓴 이들은 내상을 입고 선지피를 토했다.
“너희는 본보기다.”
무덤덤한 목소리엔 소름끼치는 악의가 배어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적들을 쭉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전신에서 뿜은 뇌광을 철퇴처럼 휘두르며 파괴 행각을 벌인다.
“혈교에 가담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거지. 싸우고 싶지 않다면 항복하거나 도망치도록. 전의를 내려놓은 자들까지 쫓진 않겠다.”
최소한의 활로를 열어두며 차근차근 압박한다. 항거할 수 없는 괴물이 누백 년을 이어온 명문세가의 멸문을 입에 올리고 있는 상황.
[이런 건방진 종자를 봤나-!]
[다시는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찢어죽여주마!]
부재한 가주를 대신해서 세가를 수호하는 원로들.
그들의 등장에 위지혁을 비롯한 무인들이 환호하며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 등장한 원로들이 채 일 각도 견디지 못하고 고혼이 되는 걸 보고 절망했다.
“꽤 강하네. 합공만 잘했어도 고전했겠어.”
강엽이 나설 것도 없이 백서희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위지세가가 멸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비보가 태화문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