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소요 (2)
급하긴 하지만 일행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강엽은 새롭게 얻은 일월신마공을 점검했고, 완안극은 금사하를 데리고 점창산과 근처 부족들의 영역에 있는 독물을 수집했다.
그리고 백서희는 가르침을 받았다.
츠가아악!
허공을 가른 쌍검의 궤적이 그보다 조금 더 긴 검과 얽혔다.
몸을 틀어 중요한 방위를 선점한 백서희가 유려하게 원을 그렸다.
상대의 검격을 흘려버리고, 곧장 요혈을 향해 척초를 날린다.
쐐애애애애액!
시원한 쾌검에 상대는 검신을 살짝 기울이며 전면을 틀어막았다.
척초의 궤적을 비틀겠다는 의도.
목표를 잃은 검극은 허공에서 흔들리고, 상대의 검은 반대로 기세를 얻어 벼락처럼 허공을 갈라왔다.
공방의 주도권을 빼앗겼으나 백서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수로 쥔 우검으로 내리꺾는 일격을 흘리고, 살짝 회전하며 검파를 쥔 손목을 비틀었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당!
콩 볶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점창파 사일검법의 구곡전척(九曲箭剔). 아홉 번을 꺾는 화살이라는 의미 그대로 예측하기 힘든 검로였다.
“탄자결이 생명이니라. 손에는 힘을 빼고, 하체와 허리에 탄성을 부여하거라. 그래야 추진력이 발생한다.”
“하압!”
낭랑한 기합과 동시에 근육이 수축, 빛처럼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척초를 뿌린다.
세 갈래로 나뉜 분검(分劍)이 늑골 주변의 요혈을 동시에 노리자 상대가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제법 잘 따라오는구나!”
투아앙-!
허공에서 부딪치는 검극. 사전에 합을 맞췄다고 해도 믿기지 않을 신기였다. 맞닿은 극점을 중심으로 대기가 구겨지듯 실금 같은 기파가 사방으로 짓쳐들었다.
“점창의 무공엔 뒤가 없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지. 초식의 명칭에 유독 궁(弓)이나 전(箭), 사(射) 등이 많이 붙은 이유도 그래서란다.”
“모든 싸움을 단기결전으로 치를 수는 없을 텐데요.”
“그렇지. 고수의 싸움일수록 투로가 중요한 법. 연계를 짜맞춰두지 않으면 되레 당하는 법이다.”
“그래서 탄자결이 중요하고요. 첫 화살이 실패로 돌아가면 연사를 준비해야 할 테니까요.”
“잘 아는구나.”
작게 웃음을 흘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허리를 활처럼 튕기며 검격을 날렸다.
스아악!
불티를 튀기며 스쳐지나간 검격. 앞서와 달리 백서희의 검이 위로 튀며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반동을 받은 백서희의 몸이 연속으로 회전했다.
퍼억!
마치 둔기로 때리듯 묵직한 소리.
그녀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제가 이겼어요, 사형.”
“...허어.”
옆구리를 비스듬히 짓누르는 검날. 반대쪽 손엔 전혀 다른 초식을 장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백서희가 좌우의 쌍검으로 서로 다른 동작을 구사할 수 있기에 쓸 수 있는 기예.
그 일격은 두 사람의 뒤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연달아 뚫고, 두꺼운 바위마저 깨부쉈다.
만약 전력을 다했다면 수십 장은 더 나아갔을 터.
점창파 장문인, 만궁통천(彎弓通天) 종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수염을 쓸었다.
“실전이었다면 구멍이 났겠구나. 방금 건 역만거궁(力挽巨弓)이냐?”
“역시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사일검법을 익힌 세월이 몇 년인데 못 알아볼까. 전력을 다하면 웬만한 호신강기는 단숨에 부수겠다.”
기실 호신강기는 옷처럼 상시로 두르는 기예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넘기기 위한 기예.
하나 백서희의 사일검법은 호신강기를 뚫고 그 너머에 있는 몸뚱이까지 쪼개버릴 정도였다. 쌍검이라 전력이 분산됐음을 감안해도 놀라운 위력이었다.
“유연하면서 탄력적인 몸놀림이다. 덕분에 한순간에 폭발적인 검격을 날리는 게지. 그런 건 누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없는 거다. 타고난 자질인 게야. 사백께서 왜 너를 택했는지 알 것 같구나.”
“.......”
전전대 장문인인 낙일신검이 거론되자 백서희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일순 흐릿해졌다.
“그분께는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어도 사일검법 같은 상승무공을 며칠 안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글이나 말이 아니라, 심상을 통해 전수받았기에 가능한 일.
심상에 녹아든 낙일신검의 감각이, 사일검법의 가르침을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삼화취정을 이루지 못했다면 소화할 수도 없었겠지만.’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강엽도 비슷했다.
배우지도 않은 일월신마공을 깨우친 것은 어디까지나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했기 때문이었다.
일월성신의 영성이 전생의 무공을 떠올리면서 심상에 각인됐던 것.
그 반동으로 심상지경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심상절예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나저나 내일 떠난다고 했느냐?”
“네. 더 머물고 싶지만 사천의 일이 급하니까요.”
“그렇겠지... 마음 같아선 더 있다 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구나.”
종현이 수염을 쓸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귀빈이 떠나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제자들을 부를 테니 저녁에 식사나 같이 하자꾸나.”
“예, 장문 사형.”
백서희는 거절하지 않았다.
* * *
일행은 아침 일찍 출발했다.
종현과 점창육로, 그리고 척무경 등의 진산제자들이 산문 바깥까지 일행을 배웅하러 나왔다.
“이렇게 보내려니 섭섭하구만.”
“서희가 점창의 제자가 되었으니 앞으로도 종종 들르지 않겠습니까?”
“허허, 하긴 자네에겐 처가나 다름없구먼.”
종현과 점창육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백서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종현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넌 우리 식구다. 힘든 일이 생기면 알려주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마.”
“감사합니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암, 그래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인 종현이 작별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
“음?”
점창파의 제자들이 의아한 낯빛으로 고개를 돌리자 몇몇 사람들이 헐레벌떡 내려오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떠나지 않은 피난민들.
죽은 이들의 장례와 허드렛일을 도우며 신세를 졌던 이들이 무언가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헉! 허억! 다행입니다. 아직 안 떠나셔서....”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겐가?”
“은인들께서 떠나신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약소하지만 새참을 만들어왔습니다.”
“새참?”
“예, 출출하실 때 드시라고....”
대표로 말한 장정이 숨을 고르며 돌아보자 한 소녀가 주춤주춤 죽통을 들고 나왔다.
백서희가 소녀를 알아보고 놀랐다.
“아, 너는...?”
일전에 넘어져서 주먹밥을 망칠 뻔했던 걸 도와주었던 소녀였다.
피난민들이 동굴에 숨었을 때도 누구보다 백서희를 따르면서 친근하게 다가왔던 아이.
백서희와 마주친 소녀가 우물쭈물하며 밀봉한 죽통을 내밀었다.
“머, 먼 길을 가신다고 들었어요.”
“응, 그렇게 됐네.”
“...다시 돌아오실 거예요?”
“아하하....”
소녀뿐만 아니라 피난민들 모두가 빤히 바라보자 백서희는 민망해져서 뺨을 긁적였다.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춘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새참은 네가 만든 거니?”
“아뇨. 엄마랑 함께....”
소녀의 모친으로 보이는 묘족 여인이 당황하며 머리를 숙였다.
백서희는 설핏 웃으며 소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다음에 돌아와서 말해줄게. 집이 어딘지 여기 계신 장문인 할아버지께 꼭 말씀드려야 한다? 그래야 언니가 찾아가지.”
“...네!”
얼굴에 환한 꽃이 핀 소녀가 힘차게 대답하자, 졸지에 장문인 할아버지가 된 종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남의 모든 부족들은 점창의 가족이란다. 가족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어린 소녀가 알아듣기에는 어려운 말이겠지.
소녀는 백서희가 돌아온다는 말에 마냥 좋아할 뿐이었다.
“다음에 볼 땐 키가 좀 더 커졌겠네. 그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야 해. 언니랑 약속이다?”
“네, 약속!”
두 사람이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나누는 동안 종현은 금사하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설산검문의 일은 유감이다.”
“장문인....”
금사하의 안색에 짙은 근심이 깃들자 종현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
“사백의 일은 네 탓이 아니다. 이미 그때 그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셨으니까. 그리고 너는 사악한 자들의 마수에 조종당하지 않았더냐?”
“....”
감사하다는 말도, 죄송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군 금사하의 눈에 눈물기가 돌자 뒤에 있던 숙군백이 나섰다.
“검문은 본산의 오랜 친구였다. 때론 경쟁하고, 때론 한 편이 되어 함께 싸우면서 우애를 다져왔지. 두 문파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라.”
“숙 사제의 말이 옳네. 검문은 멸문하지 않았네. 문주의 제자가 남지 않았던가?”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돌아오거라. 점창은 검문의 재건을 힘껏 도울 테니.”
점창육로가 차례대로 건네는 덕담에 끝내 금사하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큽, 흑...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들....”
설산검문이 건재하던 시절 두 문파는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인연을 맺었다. 금사하 역시 어린 시절 점창육로를 만난 기억이 있었다.
종현이 강엽을 돌아봤다.
“자네 어깨가 무겁겠군. 그래도 자네라면 잘 해낼 거라 믿네. 우리 사매를 잘 부탁하네.”
“다시 볼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굳게 끄덕인 강엽은 종현과 점창육로 모두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점창육로와 제자들도 두 손을 모아 화답하며, 새로운 종사가 가는 길에 무운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일행은 점창산을 떠났다.
* * *
일행은 운남을 벗어나기 전에 여강에 들렀다.
하오문 향주인 몽서양을 만나 사천 정세에 변화가 없는지 살피고, 옥룡설산에 들르기 위함.
옥룡설산에 들른 건 혹시 모산혈조가 대법을 하면서 뭔가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금사하가 죽은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할 시간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부님....”
폐허가 된 검문의 경내를 하염없이 거닐던 금사하는 문득 작은 사당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뒤를 따르던 완안극이 말했다.
“하오문 향주의 말을 들어보니 여강의 주민들이 사당을 만들고 위령패를 세웠더구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요?”
“설산검호는 협객이었다. 독과 무공에만 집착했던 나와는 달랐지.”
비록 구파의 장문인만큼 큰 명성을 누리진 못했으나 설산검호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다.
도적이 나타나면 앞장서서 싸웠으며, 기근이나 역병이 돌면 사재를 풀어 구휼미와 약재를 구했던 의인.
“이무기의 내단을 취하지 않았던 것도 만약을 위해서였을 게다. 혹여나 나중에 큰돈이 필요해지면 팔 생각으로 말이다. 자신이 취했다면 엄청난 내공을 얻었을 텐데....”
완안극이 쓰게 입맛을 다시며 사당 앞에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네 사부를 기억하거라. 그는 목숨을 잃는 그 순간까지 검문의 미래만 걱정했던 남자였다. 외인인 내게 비급을 맡기면서까지 검문의 맥이 이어지길 바랐다.”
“....”
“주인님의 말씀이 맞아. 네 목숨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검문의 미래는 네게 맡겨졌다.”
그러니 네 목숨은 검문과 함께하는 셈이지.
혼잣말을 하는 듯한 완안극의 말에, 금사하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부님....”
새하얀 매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
설산검문의 제자들이 영물로 여겼던 설응(雪鷹)이 머리 위를 돌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광경.
설응이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 금사하는 그 모습이 마치 피안으로 향하는 사부와 사형제들로 보여서,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엉? 또 우냐? 이거 원 울보가 따로 없구만.”
“...이젠 울지 않을 거예요.”
슥슥 눈물을 닦은 금사하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완안극은 킁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큰소리는 잘 치는군. 그 결심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음?”
말하다 말고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는 완안극의 모습.
금사하가 의아해하며 쳐다보는데, 불현듯 먼 곳에서 농밀한 기파의 향연과 함께 굉음이 터져나왔다.
콰아아아아아......!
산밑을 덮은 구름에 일순 구멍을 낸 거대한 충돌에 금사하의 안색이 새하얗게 굳어졌다.
“이, 이게 뭐죠?”
“주인님이다.”
완안극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산의 정상에서 강엽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