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00화 (296/450)
  • 58화. 막간二 (2)

    강엽은 당천경의 의뢰를 수락했다.

    보수가 많기도 했지만, 의뢰에 담긴 속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화문을 정상으로 돌리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건가.’

    태화문이 사천삼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본단의 힘이 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천의 흑도가 태화문주의 명령에 움직이기 때문.

    흑도 방파들이 혈교도들을 돕는다면 그 폐해는 혈라분이 퍼지는 것만큼이나 심각했다.

    ‘문제는 조영옥을 찾는다고 해도 그 이후가 쉽지 않다는 건데....’

    천운으로 조영옥이 살아있고, 그녀를 찾는다고 해도 태화문을 정상으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혈교의 주력이 태화문을 장악했을 테니 혈로를 뚫어야 할 터.

    ‘흑도는 이해득실에 민감한 자들. 태화문의 사령탑이 바뀌면 흑도들 역시 사태를 관망할 가능성이 크다.’

    사천삼패를 비롯한 백도 정파들은 각지에서 미쳐 날뛰는 혈교도들과 흑도 사파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혈라분까지 퍼지면서 막아야 할 적들이 배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

    ‘사천 무림에 두 명의 교왕이 파견된 것도 무시할 수 없고.’

    혈음마군과 혈산패군이 운남을 휘저었던 것처럼 두 명의 교왕이 혼란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만한 전력이라면 사천삼패도 안심할 계제가....

    “주인님, 완안극입니다!”

    “...들어와라.”

    문 바깥에 다가온 기척.

    강엽의 허락이 떨어지자 완안극이 요란스럽게 인사했다.

    “하하, 오늘도 힘세고 강한 아침입니다. 주인님께서도 기체후 일향만강하십니까? 어제 찾아뵈려고 했는데 두 분이 점창산 아래로 가셔서 못 뵈었습니다. 우연히 주모를 요 앞에서 뵈었는데 얼굴이 밝으시더군요! 두 분께서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신나서 떠들던 완안극은 강엽의 눈밑에 짙은 그늘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안색. 진조의 후예이자 심상지경의 절대고수가 녹초가 된 채 의자 위에 늘어져 있었다.

    강엽이 째릿한 눈짓을 보내고 나서야 신색을 수습한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주인님, 제게 좋은 탕약이 있는데....”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앉아.”

    “흠흠, 이상한 소리라니요. 소생 완안극, 주인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쯤 하지. 손님도 있지 않나?”

    강엽이 뒤를 가리키자 완안극은 객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예. 전에 말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금사하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하면서 강엽이 고개를 들자 처연한 분위기의 여인이 간신히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예... 은공.”

    “앉아.”

    허공섭물로 의자를 끌자 금사하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소곳이 앉았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까는 모습에 강엽은 입 안이 썼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의기소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계속 이런 상태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내가 누군지는 말할 필요 없겠지. 서희와 완안극이 잘 설명했으리라 생각한다.”

    “.......”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움직이지만, 살짝 들어올린 눈빛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녀가 찬찬히 입술을 깨물었다.

    “살고 싶지 않아요.”

    “....”

    “죄송해요. 구해주신 건 고맙지만... 정말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사문도 잃고 몸도 망쳤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강엽도 나무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지. 난 네게 관심 없다. 점창육로의 숙군백이 살려달라고 해서, 그리고 내 수하가 설산검호에게 부탁을 받아서 살려준 거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 위에 비스듬히 손을 괴는 방만한 품행.

    완안극이 잠시 당황했지만, 강엽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금사하를 응시했다.

    “네가 겪은 불행은 동정하지만, 내가 그 불행을 보상해줄 방법은 없다. 원수들이 죽었어도 네가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겠지.”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금사하의 모습. 그러거나 말거나 강엽은 무심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니 자결하겠다면 막지 않겠다. 다만....”

    의도적으로 말을 멈추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 금사하의 시선이 강엽과 얽혔다.

    “네가 자결하면 설산검문의 맥은 완전히 끊어진다. 검문의 원수들을 해치운 내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섣부른 결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강엽이 뒤편에 있는 서랍에서 책자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놓자 금사하의 눈이 커졌다.

    “이건...!”

    “설산검문의 비급이지.”

    여강의 거점에 있던 비급.

    금사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본문의 비급을 읽으신 건가요?”

    “불만인가?”

    “그야...!”

    “하지만 넌 죽고 싶다면서? 곧 죽을 사람이 남이 비급을 읽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당신은 검문의 사람이 아니잖아요!”

    금사하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자 쌍심지를 돋운 완안극이 기세를 일으켰다.

    하지만 강엽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다. 힘으로 협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주인님, 이 되바라진 계집이 주인님의 자비로 살아남았는데 은혜를 모르고...!”

    “그래서 죽일 건가?”

    “...훈계만 조금 하겠습니다.”

    “폭력을 써봤자 아프지도 않을 거다. 말로 패는 게 몇 배는 아프지.”

    강엽이 냉랭한 얼굴로 금사하를 돌아보자 그녀는 말없이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어쨌든 설산검호의 유지를 이으려면 누군가는 검문의 무공을 가르쳐야 하는데... 완안극은 독은 잘 알아도 검은 잘 모르니까. 그건 내가 더 낫지. 그래서 설산검문의 비급을 살펴본 거다. 복원할 수 있는지 말이야.”

    그 말에 금사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불가능하진 않지. 넌 모르겠지만 난 비급만 보고 무공을 복원시킨 적이 몇 번이나 있거든.”

    당장 관영신창만 해도 설산검문의 무공 못지않은 신공절학이다. 강엽은 시간만 주어지면 설산검문의 무공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거다. 혈교와 광명마교, 그 외 잡다한 문제들까지. 할 일이 많아서 설산검문의 무공에만 매달릴 수 없단 말이야. 나중 가선 비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할지도 모르고.”

    “아니, 뭐 그런...!”

    “아니면 잘못된 형태로 복원하거나.”

    금사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기색을 띠자 강엽이 차갑게 웃었다.

    “알기 쉽게 말해주랴? 내가 설산검문의 초식들을 마구잡이로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원본에서 벗어난 무공을 대충 만들고 적당한 놈들에게 전수한 다음 ‘설산검문이 부활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야.”

    “그, 그건 사기잖아요!”

    “그걸 누가 알아주는데?”

    “뭐라고요?”

    “점창파? 그때쯤이면 설산검문의 무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귀천하고 없을 거다. 물론 완안극은 기억하겠지. 근데 주인인 내가 만든 무공을 잘못됐다고 할까?”

    금사하가 돌아보자 완안극이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녀의 아미가 역팔자로 휘었다.

    “당신들은 정말....”

    “죽을 사람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겠지.”

    한마디 말로 그녀를 닥치게 한 강엽이 비급을 들어올린 다음 하얀 삼매진화로 태우기 시작했다.

    “이...! 무슨 짓이야!?”

    “이제 설산검문의 무공을 아는 건 나뿐이라는 거지. 아, 한 명이 더 있나?”

    “이, 이런다고 내가 마음을 돌릴 줄 알아?!”

    “아, 그래. 내가 설산검문의 무공을 복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귀찮아서 말이야. 그땐 낭인전에 기증할 거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설산검문의 무공쯤 되면 어마어마한 공로로 인정받겠지. 내가 낭인패에 연연할 수준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금천패가 보기도 좋고....”

    “내놔-!”

    상대가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것은 고려하지도 않는 눈빛. 반사적으로 손톱까지 세워서 달려들었지만,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강엽의 손에 덥석 잡혔다.

    “자결할 용기는 없으면서 내게 달려들 용기는 있나? 참 대단한 용기야.”

    “끄윽...!”

    질식할 것처럼 짓눌리는 고통에 손목을 잡았지만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바짝 세운 손톱은 불티를 튀기면서 미끄러질 뿐.

    그 사이 비급은 완전히 타서 하얀 잿더미만 휘날렸다.

    “시간만 낭비했군. 잡설에 소비한 시간이 아까워.”

    흥이 깨졌다는 듯 내던지자 바닥을 기어와서 잿더미가 된 비급을 끌어안은 금사하의 모습.

    그래봤자 잿가루만 휘날릴 뿐이었지만, 그녀는 그거라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 안 돼! 아, 아아...!”

    눈물 콧물 있는 대로 쏟아내며 손을 뻗지만, 잿가루는 그녀의 손을 무심히 외면했다.

    단 한 줌도 지키지 못한 잿더미를 끌어안으면서 끅끅거리는 모습.

    “그 비급이 소중한가?”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들어? 당신이 없앤 건 검문의 삼백 년 전통이라고!”

    “그렇게 소중하면 진품을 알아봤어야지.”

    “뭐야?”

    영문 모를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금사하는 강엽이 품에서 새로운 비급을 꺼내 던지자 멍해졌다.

    조금 전 강엽이 태웠던 비급과 완전히 똑같은....

    “어?”

    “어지간히 정신이 없던 모양이야. 먹이 마르지도 않은 새 책을 못 알아보다니.”

    “...!?”

    “아무리 그래도 눈썰미가 있다면 알아봤을 텐데. 시간 없어서 표지만 꾸몄는데 낚일 줄은 몰랐군.”

    뒤늦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금사하가 능금처럼 시뻘게졌다.

    혹시나 강엽이 또 속였을까 봐 비급을 확인하고, 그것이 진품임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터뜨리며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네 거라고 한 적 없다만? 그 무공은 내가 나중에 적당히 복원해서 적당한 사람에게 전수할 거다. 암만 생각해봐도 네가 설산검문을 잇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보이는데.”

    “닥쳐, 이...!”

    무심코 쌍욕을 퍼부은 금사하가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강엽의 눈치를 살폈다.

    뒤늦게 정신이 들고 나서야 얼마나 미친 짓거리를 했는지 깨달은 것.

    강엽이 완안극을 돌아보았다.

    “완안극.”

    “예, 주인님.”

    완안극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설산검호와의 인연 때문에 금사하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일이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저 여자는 네 소관이니 책임지고 알아서 관리해라. 그리고 금사하.”

    “...네.”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금사하는 한껏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조신하게 대답했다.

    “그 비급을 가진다면 네 목숨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그래도 받아들일 건가?”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점창파에 있진 못하겠지. 폐허가 된 설산검문에 돌아가지도 못할 테고.”

    “....”

    그간의 기억이 날아간 금사하에게 있어 설산검문이 폐허가 됐다는 얘기는 와닿지 않으리라.

    그러나 간간이 지나쳤던 점창파의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봤는지 알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이 강엽의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지낼 곳 정도는 마련해주지. 하지만 설산검문을 일으키는 건 전적으로 네 몫이다.”

    “...감사합니다.”

    살고 싶은 마음은 없더라도 사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격도 없는 자들이 비급을 이었다는 이유로 후예라고 설치고 다니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고.

    사문의 비급을 꼭 끌어안은 금사하의 표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 * *

    먹구름이 잔뜩 낀 울적한 하늘.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밤처럼 어두컴컴한 사위 속에서 사슬에 묶인 사람이 끌려나왔다.

    머리는 산발이 된 데다 전신에 땟국물이 가득한 사내.

    추레한 몰골이었지만 눈빛만은 보검처럼 예리해서 그를 데리러 온 무인들도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꿇려라.”

    무정한 명령이 떨어지자 흑포를 입은 혈사교령들이 사내의 무릎 관절을 차서 강제로 꿇렸다.

    답답한 신음을 터뜨린 사내가 죽일 듯한 눈초리로 명령을 내린 자를 노려봤다.

    “혈천성군(血天聖君)...!”

    팔대교왕의 필두.

    건장하다는 것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외려 그렇기에 더더욱 비범한 남자였다.

    고수의 눈에도 평범하게 보일 만큼 완벽한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니까.

    “오랜만이다, 신유(神遊).”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이름이었다.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천하팔존.

    강호를 정처없이 유랑하며,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의심하는 호사가들도 많았다.

    하나 천하팔존 신유는 분명히 실존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만한 무력을 지닌 인물.

    그런 그가 혈교의 본단에 잡혀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무림은 한바탕 뒤집어지리라.

    “왜 나를 다시 꺼냈지?”

    “교주님께서 널 부르셨으니까.”

    “...혈교주가?”

    “기뻐해라, 신유. 넌 본교 대계의 거대한 수레바퀴로 낙점받았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너는 본교의 위대한 시조, 혈신께 가는 길에 제물로 쓰일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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