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82화 (279/450)

54화. 점창 (4)

점창파는 한바탕 시끌벅적해졌다.

무림맹으로 갔던 척무경이 무당제일검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다른 일행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백서희와 정체를 숨긴 완안극은 예외로 두더라도, 낭인전의 금패급 고수는 홀대할 수 없었다.

입적한 장문인을 대신해서 임시 장문직을 맡은 전대 장문인이 일행을 불러들였다.

‘저 노인이 낙일신검(落日神劍) 문자경인가.’

이미 스무 해도 전에 속세를 떠난 전대의 기인.

옛날에 강호를 떠난 인물이 제자의 죽음으로 인해 장문직에 복귀해서 위기에 처한 점창파를 이끌고 있었다.

현진궁(玄眞宮)이라는 편액이 걸린 도관에서 낙일신검을 만난 강엽은 이채를 발했다.

‘강하다.’

워낙 노구인 만큼 장문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웬걸.

실제로 접해보니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깊을지언정 눈빛만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또렷했다.

그러면서도 속을 짐작할 수 없을만치 그윽했는데, 일세를 풍미한 노고수의 관록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초음을 쓰면 들킬 공산이 커.’

여지껏 그런 느낌을 받은 고수들은 광명마교주와 천하팔존, 혹은 그에 준하는 자들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낙일신검 역시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절세고수라는 뜻.

‘함께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 고수야. 이들이 현 점창파를 떠받치는 기둥이겠지.’

낙일신검을 보좌하는 여섯 명의 노인들 모두 중단전을 개방했고, 그중 한 명은 정기신 합일을 이루었다.

일행이 공수를 취하자 낙일신검이 백염을 쓰다듬으며 환대했다.

“어서 오시게, 무당의 현운.”

“무림 말학 현운이 삼가 장문인과 여러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좋지 않은 때에 찾아뵈어 송구스럽습니다.”

“허허,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가. 자네들은 본산을 도우러 온 지원군인 것을. 척무경 그 아이에게 자네들이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지 들었네.”

척무경은 이 자리에 없다. 존장들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한 뒤 다른 이들과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낙일신검의 말이 이어졌다.

“스승께선 무탈하신가?”

“언제나처럼 건강하시지요. 사부님께서도 장문인의 안부를 무척이나 궁금해하셨습니다.”

“다시 일하려니 죽을 맛일세. 원래라면 밑의 아이들이 이 자리에 앉아야 하거늘.”

일대제자들 중에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있긴 했지만 작금의 위기를 헤쳐나갈 정도는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고수가 절실한 시점에서 낙일신검의 복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한데... 자네 말고 이토록 강한 후배들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구먼. 그것도 두 명이나 말일세.”

전대의 노고수답게 강엽과 완안극이 매우 비범한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현운이 작게 끄덕거렸다.

“척 도우에게 들으셨겠지만, 강엽 도우의 공이 매우 컸습니다.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었지요.”

“무슨 말씀을. 현운 도장님은 큰 도움이 되어주셨습니다.”

발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도 입을 여는 것은 큰 무례이나 그걸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낙일신검이 강엽을 돌아보자 눈처럼 새하얀 눈썹 아래로 형형한 눈빛이 드러났다.

“...강호에 신성이 나타났구먼.”

절세고수의 안목이라면 강엽이 백도가 아님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낙일신검은 그 부분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으려는 듯 강엽의 공적만을 치켜세웠다.

“점창은 자네들의 노고를 기억할 걸세. 본산의 사정이 어려운지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먼.”

“괘념치 마십시오. 귀빈 대접을 바라고 온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무엇인가?”

“식량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

점창파로서는 민감한 주제였다. 낙일신검은 좌우에 시립한 점창육로(點蒼六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중 한 노인이 무거운 탄식을 쏟아내며 말했다.

“자네들을 믿고 허심탄회하게 말하겠네. 본산의 제자들과 도우러 온 협사들, 그리고 피난을 온 사람들까지 합쳐서 이천 명이 넘는 인원들이 있네. 하지만 남은 식량은... 배급량을 줄였는데도 열흘치에 불과해.”

그나마 쌀은 거의 떨어졌고, 잡곡을 섞거나 기존에 만들어뒀던 벽곡단을 배급하는 게 전부였다.

“피신 온 사람들도 건량 정도는 들고 와서 얼마간은 버틸 수 있었네. 본산 역시 공양받은 미곡이 있어서 여유가 있었지. 원래라면 그랬을 게야.”

“지금은 아니라는 거군요.”

노인이 무겁게 고갯짓을 했다.

“피난을 온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게 문제였지.”

맹월림에 의해 터전을 잃은 부족들, 그들의 등쌀을 못 이긴 사람들이 점창파로 도망쳤다.

“물론 본산의 식량도 한계는 있네. 하나 그들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미 맹월림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점창파에게마저 버림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좌중의 분위기가 절로 숙연해졌다.

“맹월림이 피난민들을 잡진 않았나 보군요.”

“...놈들의 술수였지. 우리가 피난민을 거절하지 않을 걸 아니까. 우리 식량을 소진시키려는 셈일세.”

천라지망은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막은 게 아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자들을 막았을 뿐.

“그러면서도 병장기를 착용한 자들은 철저하게 솎아냈지. 무림인이 들어온 건 두 달 만이라네.”

다른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기였지만, 강엽과 안안극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았다.

점창육로 중 한 명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강엽이 되물었다.

“낭인들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음?”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의뢰비야 일을 끝낸 뒤에 분타에서 수령하니 그렇다 쳐도, 피난민들이 불어나는 상황에서 식량난을 겪는다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암만 명분이 좋아도 병사들이 잘 먹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는 법입니다. 관병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돈에 움직이는 낭인은 더하겠지요.”

상대가 점창파인 만큼 처음 얼마간은 불만을 속으로만 삭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주인님의 말씀이 옳소. 배급량이 줄었다면 낭인들의 생각도 달라졌을 것이오. 그들은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족속이니까....”

완안극은 강엽의 말을 거들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면서 살짝 말끝을 흐렸다.

목구멍에서 맴도는 말은 많지만 혹시나 강엽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기색.

점창육로는 웬 소년이 그들에게 하오체를 쓴다는 사실에 살짝 멈칫했지만, 바로 그 시점을 노려 강엽이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낭인전의 의뢰비는 일을 끝낸 뒤에 분타에 가서 수령합니다. 그러니 몇 달간은 죽치고 있었어도 불만이 없었을 겁니다. 오래 버틸수록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식량이 떨어지는 건 다릅니다.”

“그들이 싸우는 걸 거부할 거다?”

“최악의 경우엔 맹월림과 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함께 싸우던 아군이 등을 찌를 수 있다는 말에 점창육로는 설마 하는 분위기였다.

강엽이 내심 쓴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낭인은 지는 싸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어허, 이자가...!”

“공을 세운 것은 알겠지만 말을 가려서 하게! 우리가 질 거라니!”

“그럼 왜 농성만 하고 계십니까?”

강엽이 눈도 깜짝 안 하고 묻자 점창육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때 뒷전에 물러났던 낙일신검이 논의에 참여했다.

“본산은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네. 자네들이 오기 전에 무림맹과 우방에 서신을 보냈네.”

“그 우방이 설산검문입니까?”

“그들을 아나?”

“얼마 전에 멸문했습니다.”

“...!”

“멸문이라니!”

둔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진 낙일신검과 점창육로의 얼굴들.

황망한 시선을 받은 현운 도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 도우의 말은 사실입니다.”

여강의 거점을 치면서 겪은 일화를 들려주자 다들 아연해졌다.

숫자는 적어도 점창파와 비견되는 명문검파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눈앞이 아득해진 것이리라.

“...우방은 설산검문만이 아닐세.”

“사천삼패를 말씀하시는 거겠군요.”

어렵사리 말을 꺼낸 낙일신검이 작게 고갯짓을 하자 강엽이 짐짓 한숨을 쉬면서 서찰을 꺼냈다.

“그게 무엇인가?”

“하오문이 보내준 서찰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들이 하오문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었지. 대체 뭐가 적혀 있길래....”

곧 서찰을 읽어내려간 낙일신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참말인가!?”

“장문인?”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혔길래 그러십니까?”

서찰을 읽지 못한 것은 일행도 매한가지였다.

강엽을 제외한 모두가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내자 낙일신검이 힘없이 주저앉으면서 이마를 쓸어올렸다.

“...태화문주 번천광야가 숨을 거두었다고 하네.”

“예에!?”

사천삼패와 어깨를 견주는 흑도 대방파. 그 정점에 군림한 번천광야 조광해가 끝내 병사한 것이다.

‘매병을 앓았으니 살 날이 많이 남진 않았겠지.’

젊은 시절 온갖 무공을 섭렵하다 주화입마에 빠지고, 그게 하필 매병의 증상으로 나타났던 것.

매병에 걸린 시점에서 번천광야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리란 것은 예견된 미래나 다름없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이 그것만은 아닐 텐데요.”

“번천광야의 관을 안장한 날 대공자와 이공녀가 충돌하고, 그 결과 이공녀의 세력이 지리멸렬해서 잔혹하게 숙청당했다는 것 말인가?”

“태화문의 대공자는 혈교와 손을 잡았습니다.”

“서찰에도 그리 나와 있군. 혈교로 추정되는 세력이 개입한 난입한 정황이 있다고. 풍도마장이 사망하고, 이공녀의 세력은 와해됐다고 말일세.”

“...!”

장례가 끝나자마자 칼부림을 한 것과는 별개로 조영옥이 패했다는 소식은 좋지 않았다.

혈교가 태화문을 사천 공략의 첨병으로 삼는다면 사천삼패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질 테니까.

“사천삼패의 힘이 막강해도 혈교가 쳐들어온다면 자기네 앞마당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빠듯할 겁니다. 점창파까지 도울 여력은 없겠지요.”

“허,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지원군은 오지 않습니다. 무림맹도 광명마교 때문에 병력을 뺄 형편이 안 되고요.”

마치 시한부를 선고하듯 확정된 미래를 내놓는 강엽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제 저희끼리만 싸워야 합니다.”

“전력이 부족하네.”

“아뇨. 퇴로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항복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우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게 무슨?”

“척무경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점창산에 오르기 전에 천라지망을 이끄는 천인장을 죽이고, 놈들의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요.”

지금쯤 맹월림의 수뇌부도 급보를 전해들었으리라.

자존심이 있는 대로 뭉개진 그들이 이전처럼 점창파를 고사시키는 느슨한 전략을 취할 리 만무.

“피를 보는 게 두렵다고 다시 천라지망 같은 거나 친다면 맹월림의 결속력이 떨어질 겁니다. 맹월림주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터. 이번엔 거칠게 나올 겁니다.”

방파대전. 어느 한쪽이 완전히 절멸당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 찾아온 것이다.

“낭인전부터 단속하는 게 급선무겠지요. 그들 중 가장 높은 자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아무도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 * *

“대광추(大廣椎) 이만세다.”

운남의 유일한 금패급 낭인.

낭인전에서도 몇 안 되는 금패급, 심지어 금지패라서 그런지 강엽 앞에서도 뻣뻣하게 굴었다.

하지만 초음으로 그를 살핀 강엽은 실망감을 느꼈다.

‘진멸신권에 한참 못 미치는 자였군.’

낭인패의 등급은 조직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등급이 같아도 실력은 떨어질 수 있다.

‘그래도 삼화취정 정도는 기대했는데....’

상단전이 발달하긴 했으나 정기신이 합일하여 천지의 기운과 소통하는 경지는 아니다. 이만하면 천인장을 상대로도 쩔쩔맬 게 뻔했다.

“그 유명한 귀영을 보니 반갑군. 내가 낭인패 등급이 높으니 지휘는 계속 맡아도 되겠지?”

“마음대로 해라.”

이만세가 나이와 경력에서 윗줄임에도 딱히 대접해주지 않는 태도.

이만세의 뺨이 씰룩거렸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강엽의 어깨를 두드렸다.

“젊은 친구가 호쾌하구만! 그래, 잘 생각했네. 이백이 넘는 낭인들을 지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착각하지 않는 게 좋겠군.”

“응?”

“내가 넘긴 건 어디까지나 현장 지휘권이니까. 대전략은 내가 정한다.”

“...대전략? 자네가 이 군세를 이끌겠다고?”

“점창파의 장문인과 원로들도 동의한 사안이야.”

엄밀히 말하면 강엽은 전술의 큰 줄기를 결정할 뿐, 점창파를 지휘할 권한을 갖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만세는 후자라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이상하군. 그럴 리가 없는데....”

“낭인들을 살려서 데려가겠다고 낭왕과 약속했다. 당신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강엽이 순식간에 화제를 돌렸음에도 이만세는 지적하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

“...낭왕께서 말인가?”

“낭왕은 무림맹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난 낭왕의 대리자로서 운남에 온 거고.”

점창파를 돕는 것이 낭왕의 뜻이니 반기를 들면 낭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는 엄포.

애초에 의뢰주들을 저버리고 배신을 하는 것은 낭왕삼칙에도 어긋나니 처신 잘하라는 경고였다.

이만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소문대로 정말 소전주(小殿主)가 됐나 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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