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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80화 (277/450)
  • 54화. 점창 (2)

    강엽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정안을 발동한 채로 전각을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를 두들겨봤다.

    그렇게 얼추 확신을 얻고 나서야 대답했다.

    [침입자를 대비한 것 같군. 정해진 곳을 밟지 않으면 안쪽에 신호가 가는 진법이 깔려 있어.]

    [...무턱대고 들어갔으면 위험했겠네.]

    백서희는 새삼 혀를 내둘렀다.

    싸움이 한창인 와중에 방사에 몰두해서 뭐 하는 병신인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대비가 철저하지 않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은신술을 지녔어도 진법의 존재를 모른다면 영문도 모르고 당했을 것이다.

    ‘지붕 위에 넷, 벽 뒤에 셋, 대들보 위에 하나.’

    그 외에 여기저기 숨은 놈들까지 합치면 스무 명이 넘는다.

    맹월림의 정예인 만큼 하나하나가 웬만한 은패급보다 고강한 수준.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기실 진짜 문제는 호위들을 제거한 이후였다.

    [녀석들의 몸에 술법이 걸려 있어. 금륜사에서 봤던 경계조 놈들과 같은 술법이야.]

    [어휴, 정말 징글징글하게 대비해놨구만.]

    만약 두 사람의 은신술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강엽에게 정안이 없었다면 진작에 들켰겠지.

    사전에 파악한 대로 안전한 길만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간다.

    이 와중에도 곳곳에 은신한 호위들이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으나, 두 사람을 잡지는 못했다.

    숨소리는 물론, 옷자락을 끄는 소리조차 일절 내지 않고 유유히 감시망을 통과한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들킨다면... 그건 지독하게 운이 안 따른 거지.’

    그러나 곧 난관에 부딪쳤다.

    매복한 자들보다도 강한 호위들이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민망한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는데도 개의치 않고 형형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강엽은 근육의 짜임새와 전해지는 기감으로 그들이 상당한 기량을 쌓은 절정고수임을 알아봤다.

    [이쯤 됐으면 그냥 돌파하는 게....]

    백서희가 제안하려는데, 안쪽에서 열띤 신음이 잦아들더니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위들, 배가 좀 허하구나. 시장하니 술상을 내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호위들이 대답한 뒤에 강엽은 전각을 지키고 있는 기척들 중 하나가 멀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시비들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화려한 술상을 대령했다.

    시비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펴본 호위들은 은막대를 들어 술이나 요리에 독이 있는지 꼼꼼이 살펴봤다.

    ‘진법을 설치하거나 매복을 둔 것까지... 전장에서 방만하게 행동하는 것치고는 꽤나 신중하군.’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시비들이 술상을 들고 안으로 가자, 강엽과 백서희도 얼른 뒤에 따라붙었다.

    조금 전까지 남녀가 운우지락을 나누던 방엔 후끈한 열기와 함께 땀냄새와 체취가 가득 풍기고 있었다.

    바지만 입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조각처럼 단련된 상반신을 드러낸 채 침상에 걸터 앉았다.

    그 뒤에선 반라의 여인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는데, 작은 손짓에도 치명적인 색기가 묻어났다.

    ‘색공(色功)을 익혔나?’

    이성을 현혹하는 사마외도의 공부.

    사내가 여인의 정기를 갈취하는 채음보양술이나, 반대로 여인이 사내의 정기를 갈취하는 채양보음술 역시 색공의 한 갈래였다.

    ‘강한 여자다. 만만치 않아.’

    색공을 수련한 듯한 정황과는 별개로, 여인의 몸에선 주력의 냄새도 짙게 풍기고 있었다.

    지난날 암시장의 싸움에서 모산혈조의 대제자를 칭했던 심윤 못지않은 기운을 지닌 걸로 보면 마찬가지로 모산혈조의 제자일지도.

    [시비들이 물러나면 기습한다.]

    지금 싸웠다간 애꿎은 시비들까지 휘말릴 수 있다.

    백서희가 끄덕이며 대답하려는 때였다.

    “잠깐, 이상한 냄새가 섞였는데?”

    천인장으로 여겨지는 사내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호위들의 눈썹이 구붓하게 휘어졌다.

    “이상한 냄새라 하시면...?”

    “술이나 음식 냄새는 아니군. 땀냄새? 아니군. 나와 봉매의 냄새는 아니야. 계집 냄새인데?”

    “송구합니다. 시비들을 즉시 내보내겠습니다.”

    호위들이 시비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시비들도 혹시나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하는 기색이었다.

    사내가 손을 들며 제지했다.

    “아니, 아니! 기다려라. 시비들의 냄새도 아니야. 아무렴 내가 저년들을 몇 번이나 봤는데 헷갈리겠느냐?”

    그 말에 시비들이 나가다 말고 멈칫했다.

    반면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냄새로 사람을 구분해?’

    강엽도 감각을 집중하면 오 장 거리에서 땅을 기어가는 개미를 볼 수 있었고, 십 장 바깥에서 벌레가 날갯짓을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후각 역시 뛰어나서 먼 곳에서 풍기는 냄새를 바로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냄새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킁킁, 이상하다. 계집뿐만 아니라 이상한 냄새도 하나 섞여 있군. 사내 새끼인가? 아니, 평범한 놈들과는 냄새가 달라. 훨씬 불쾌해.”

    “어르신, 진법엔 이상이 없어요.”

    보다못한 반라의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지만 사내는 되레 역정을 냈다.

    “이년이 건방지게... 내가 착각했다는 거냐? 조금만 있으면 알아낼 수 있으니까 나대지 마라.”

    여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꿍얼거렸지만 사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를 보며 눈을 빛냈다.

    “거기냐!”

    장롱밖에 없는 곳. 하지만 사내는 감을 잡았다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손을 할퀴었다.

    구릿빛의 근육이 불끈거리는 것과 동시에 막강한 공력이 폭사됐다.

    엉거주춤하던 호위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사내는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냄새로 사람을 찾는다... 황당한 재주인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결이 일 듯이 나타나는 두 사람의 인영.

    마치 유령이 툭 튀어나온 것마냥 기괴한 광경이었다.

    채채챙!

    “이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경악하면서도 호위들은 제 상전의 앞을 가리고 침입자들을 향해 도검을 겨누었다.

    반면 시비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는지 이도 저도 못하고 사내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형국.

    두 사람을 번갈아 살펴본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하하, 저것 봐라! 내가 맞지 않았느냐!”

    여인은 그토록 자신했던 진법이 맥없이 뚫렸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는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이없어했다.

    “그걸 맨몸으로 받았다고?”

    아무리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지만 그토록 거친 경파를 맞았는데 상처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나?

    사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쳐들어온 놈들이다. 한 수 재간이야 당연히 있겠지. 그래서 너희들은 누구냐?”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검을 치켜세운 호위들을 쭉 둘러보고, 시비들을 힐끔 곁눈질한 다음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비들은 내보내는 게 어떤가?”

    “뭐야, 걱정해주는 거냐?”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사내의 입장에선 자신이 편히 생활하도록 수발을 들어준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싸움에 휘말려서 횡액을 당한다면 사내의 입장에서도 입맛이 쓰지 않겠는가.

    “타당한 의견이로군. 그런데....”

    다음 순간 빛살같은 궤적이 강엽과 백서희, 그리고 시비들을 향해서 동시에 쏟아졌다.

    허공을 뛰어넘어 적을 치는 격공의 수법이었다.

    강엽과 백서희는 그렇다 치고, 죄없는 시비들까지 노린 것은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엇 하나 노림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뭐야?”

    의지를 일으킨 순간 보이지 않는 칼날이 일어나야 했건만, 사위는 지극히 고요하기만 할 따름.

    사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격공을 사전에 막았다고?”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

    격공의 조짐과 시작점을 파악해서, 공격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시점에 쐐기를 박아 상쇄시킨다.

    강엽은 마실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지만 사내와 여인은 전신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진법과 호위들을 피해 몰래 들어왔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런 빌어먹을! 어디서 괴물 같은 게...!”

    강엽은 상대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사내의 턱주가리를 격공으로 치면서, 어느 샌가 붉게 물든 좌안으로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막 팔목과 손가락을 움직이며 수인을 맺고 있던 여인은 마안의 시선에 걸리자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죽어엇!”

    “으아아아압!”

    도검을 치켜든 호위들이 달려들었지만, 강엽에게 향하던 날붙이는 채 반도 가기 전에 막혔다.

    강엽에게 이목이 쏠린 사이 은신술로 몸을 감춘 백서희가 허공을 뛰어넘으며 검초를 뿌린 것.

    호위들 역시 고수인지라 검극을 쳐내면서 반격을 가했으나, 백서희의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푹! 푸푹!

    손목에서 발출된 강사가 눈알을 노리자, 깜짝 놀란 호위들이 고개를 크게 비틀었다.

    그 사이에 거리를 좁힌 백서희가 역수로 쥔 좌검을 뻗어 한 호위의 검을 얽어버린 다음 아래로 당기고,

    허벅지 안쪽에 정강이를 걸어, 운신이 제약된 상대의 관자놀이를 단단한 검수로 후려쳤다.

    “큭! 이년이...!”

    호신기로 막았어도 암경이 침투했기에 이마가 찢어졌다.

    큰 충격을 받은 호위가 휘청거리자 그 너머에 있던 또다른 호위가 이를 악물고 살초를 출수했다.

    설사 동료를 꿰뚫는 한이 있어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

    하지만 그가 뜻을 이루기 전에, 백서희가 한발 앞서 호위의 늑골 사이에 검을 찔러넣고, 무지막지한 공력을 발출하듯 내쏘았다.

    일순 시퍼런 빛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두 호위의 가슴팍에서 한 줄기 선혈이 솟구쳐나왔다.

    “......!”

    실로 쾌속한 순살. 사내와 여인은 개입할 새도 없었다.

    개입했어도 강엽이 막아섰겠지만.

    “뭘 보고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백서희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시비들은 화들짝 놀라 방문을 나가버렸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들은 상전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신 시비들 너머에서 전각에 매복했던 호위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시비들로 인해 길이 막힌 그들은 짜증을 내며 그녀들을 밀치고 들어왔다.

    “여긴 내가 막을게!”

    “부탁한다.”

    콰아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이 와장창 깨져나가고, 여인을 안은 사내가 활처럼 휘면서 쏘아졌다. 보신경의 최상승 경지 중 하나인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

    “밖에서 싸우자, 침입자!”

    * * *

    강엽이 뒤따라 나올 때쯤엔 소란을 알아챈 적들이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여인의 허리를 안은 사내가 사납게 일갈했다.

    “이 몸은 맹월림의 천인장인 인랑(人狼)이다! 간덩이 부은 침입자야, 무명소졸이 아니라면 이름을 밝혀라!”

    “강엽.”

    짧게 내뱉은 말에 인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신 그에게 안긴 여인이 봉목을 크게 떴다.

    “강엽? 설마 사천 무림의 귀영?”

    “귀영? 그게 누군데?”

    “본교의 불괴강시와 명도상인, 단혼마백을 죽인 위험인물이어요. 소문에 따르면 광명마교의 오사도도 저자의 손에 죽었다고 해요.”

    요 근래 수용소를 부수고 다닌 강엽이지만, 정체가 탄로날 빌미는 주지 않았다.

    맹월림과 혈교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었다.

    “어르신, 부하들을 시켜 차륜전을 펼치시지요.”

    “무슨 소리.”

    인랑이 콧방귀를 뀌며 여인을 내려놨다.

    이미 그때쯤엔 사방에서 몰려온 전사들과 혈교도들이 횃불을 든 채 일대를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살기등등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군세를 뒤에 둔 인랑이 좌우로 넓게 팔을 벌리면서 외쳤다.

    “침입자와 일기토를 펼치겠다! 천인장으로서 명령을 내리니 누구도 나서지 말라!”

    호방한 기세에 누구 하나 토달지 않는다.

    강엽이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진심이냐?”

    “물론이지!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내뱉을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데도?”

    “솔직히 네놈 이름은 오늘 처음 듣는다. 하지만 상대가 강한지 파악하는 데 명성은 필요없지. 네놈은 강하다. 강자를 눈앞에 두고 어찌 비겁하게 합공을 펼치랴?”

    의외였다. 군세를 이끄는 장수가 할 만한 발언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강엽을 잡을 자신이 있더라도 일단 수하들을 시켜 힘을 빼놓는 게 정석일 텐데.

    하는 짓을 보면 딱히 아랫사람들을 아끼는 성격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성향 자체가 호전적인 듯싶었다.

    ‘진법도 그렇고 매복도 그렇고 꽤 신중한 줄 알았는데... 신중한 건 저쪽이었나.’

    이 와중에도 심윤의 사매를 자처한 여인은 손톱을 뜯으며 초조해하다 강엽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흠칫 놀랐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긋 웃으며 교태 어린 미소를 내비친다.

    그때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다른 놈도 아니고 신녀와 사도까지 죽였다면 나 또한 전력을 다해야겠지!”

    직후 그의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쭈뼛 솟고, 잘 단련한 구릿빛의 육신 위로 수북한 털이 올라온 외양.

    주둥이가 살짝 튀어나오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오고,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이 돋아나는 것을 본 강엽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뭔....”

    아우우우우-!

    창졸간에 짐승 요괴로 변해서 달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린 놈이 낮게 으르렁댔다.

    “무릎을 꿇어라, 미천한 잡것아. 난 혈교와 맹월림의 비의로 재탄생한 몸. 위대한 인랑의 화신이니라!”

    짐승의 형상을 한 인간,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괴물이 된 맹월림의 천인장이 냅다 달려들어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자색 검날에 호신강기와 함께 다리가 잘려나가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깨개갱-!

    “.......”

    예상치 못한 광경에 모두가 얼어붙었을 때, 강엽은 쓰러진 인랑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글쎄, 위대한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피를 흘리며 움찔거리는 인랑 앞에 오연하게 선 흡혈귀가, 섬뜩한 안광을 토해내며 빈정거렸다.

    “눈높이가 다르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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