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점창 (1)
“고맙네.”
현운 도장은 감사를 표했다.
혈음마군과의 싸움으로 지친 그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찢기고 헤진 옷자락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상투가 잘린 머리는 바람결에 마구 나부끼는 몰골.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흙이 묻은 무릎과 손에 더 눈길이 쏠렸다.
“자네 덕에 사형을 온전히 안장할 수 있었어.”
현운 도장은 이제 막 만든지라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봉분을 보면서 그리 말했다.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서 혈음마군의 시신을 안장한 것이다.
손과 무릎팍에 흙이 한가득 묻은 것은 공력을 일체 쓰지 않고 땅을 팠기 때문이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없기는 이 사람아. 금마가 사형의 시신을 더는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지 않았는가?”
“애초에 제가 맡았던 놈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만.”
“그나저나....”
강엽이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혈음마군이 생전에 썼던 진마혈륜과 철갑마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것들은 안 묻으실 겁니까?”
“사형의 유품이라고 하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마병들이지 않나. 같이 묻고 싶지 않군.”
“그럼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음? 자네가?”
강엽은 쌍륜을 쓰지도 않거니와 이미 자성검이라는 절세보검이 있지 않은가.
굳이 진마혈륜을 가져갈 이유가 없을 텐데?
“완안극이 륜법을 알더군요.”
“아, 그렇군. 완 노사가.... 알겠네.”
“철갑마수도 일단은 가져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냥 버렸다가 나중에 혈교가 와서 회수하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플 테니까요.”
잃어버린 팔을 대신해주는 대신 숙주의 뇌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마병이다.
하지만 일개 병장기가 사람의 신체를 대신해주면서 진짜 팔처럼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당문의 장인들에게 주면 좋아하겠는걸.’
그러고 보면 이전에 당문에 방문했을 적에 광명마교의 방패를 넘겼는데, 그걸 연구하는 작업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만간 당문의 무인들이 운남에 온다면, 책임자에게 넌지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한데 손에 쥐고 있는 그건 뭔가?”
“설산검호의 몸에 있었던 조각입니다.”
수정처럼 생긴 푸른 조각.
더운 날씨에도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푸른 조각의 모습에 현운 도장이 퍽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어, 내단의 조각처럼 보이는구만. 손톱처럼 작은데도 범상치 않은 음한지기를 품었어.”
“예전에 설산검호가 옥룡설산에 출몰한 이룡(螭龍)을 잡은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룡은 뿔 없는 용이라는 뜻으로,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가리켰다.
완안극은 이 내단이 설산검호가 잡은 이무기의 것이라 추측했다.
설산검호는 내단을 취했다는 사실을 떠벌리지 않았지만, 그가 설산의 이무기를 잡은 것은 운남 무림에선 꽤 유명한 일화였던 것이다.
‘쥐고만 있어도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
강엽이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중천에 올랐기 때문에 하루 중 가장 뜨거울 때였다.
아무리 삼화취정에 올라 햇볕에 저항력이 생겼다고 해도 맨몸으로 노출되면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무기의 내단 조각을 쥐었을 때부터 고통이 많이 경감되었다. 내단에 깃든 음기가 햇볕의 양기를 중화시켜준 덕분이었다.
‘솔직히 이것만 있으면 흑무암쇄진이 없어도 돼.’
강엽은 불괴의 공능이 있는 만큼 완안극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완안극이 한사코 거절했다.
흑무암쇄진이 있는 만큼 내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자고로 보물엔 임자가 있는 법입니다. 저보다는 주인님께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주인님께서는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맹월림과 혈교의 뒤에 있는 모산혈조.
완안극은 강엽이 모산혈조와 원한을 쌓았다는 것을 알기에 내단을 기꺼이 양보했다.
‘단전의 축기량은 한계에 다다랐어. 내단을 취한다고 극적으로 늘어나진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음한지기는 강해질 것이다.
모산혈조와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해둬야 할 터.
금마와의 싸움에서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심상절예에 한 발짝 다가서기는 했으나, 강엽은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점창파로 가는 길이 급하긴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쉬었다 갈까 합니다.”
“그러세나. 마침 나도 심신을 추슬러야 하네.”
현운 도장 역시 단전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공력을 쥐어짠 만큼 밤낮으로 운기해야 했다.
* * *
그곳에 있는 건 거대한 백사였다.
하얀 비늘을 지닌 거대한 이무기가 혀를 쉭쉭거리며 적대감을 불태웠지만 강엽은 눈도 껌뻑하지 않았다.
“작은 조각인데도 영성이 제법 짙게 남았는걸.”
-샤아아아아악!
머리를 꼿꼿이 세운 이무기가 거리를 좁혀들어온다.
그러나 강엽은 간단히 이무기의 진격을 막고, 역으로 허공섭물을 통해 이무기의 목을 틀어쥐어 위로 들어올렸다.
온몸을 꿈틀거리면서 발버둥치는 이무기의 모습.
“하지만 한계가 명확해. 원본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조각이기 때문이겠지만....”
이무기를 건조하게 바라본 강엽이 손아귀를 움켜쥐자, 놈의 거체가 폭죽처럼 퍽 터져나갔다.
뜨거운 피 대신 새하얀 진눈깨비가 흩날리면서 강엽의 전신 모공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천교백린망(遷喬白鱗蟒).]
가만히 음기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별안간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
진조가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네놈이 경맥 안에 녹여낸 내단의 원 주인이니라. 이 시대의 중생들은 어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짐이 활동했던 시절엔 그렇게 불렸다. 북해에서나 봤던 영물을 머나먼 남쪽에서 보게 될지는 몰랐군. 옥룡설산에서 자란 놈이라고 했던가?]
옥룡설산은 여름의 무더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인 영산.
영험한 기운이 가득한 만큼 영물이 출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강엽이 양손을 들자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쏟아졌다.
“확실히 음한지기는 늘어났어.”
기실 지금까지 다룬 음한지기는 한천최심장의 구결을 억지로 비틀어낸 임기응변에 가까웠다.
혈공진기의 음유한 기질 덕분에 음한지기를 짜내긴 했지만, 빙공의 고수들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
[광명마교의 천적은 흑무암쇄진이지만, 빙공 역시 놈들을 상대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지. 다시 광명마교와 충돌할 걸 감안하면 미리 빙공을 익혀둬야 한다.]
“안다. 하지만 원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이런 조각 가지고는 부족해.”
아예 빙공에 특화된 심법을 익히거나, 이보다 더 많은 음기 덩어리를 흡수할 수밖에.
이제 와서 전자를 택할 수는 없으니 후자밖에 답이 없겠지.
“내단의 원본. 설산검호가 온전한 내단을 갖고 있었다면 혈교가 빼앗아갔을 거다.”
그 내단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을지는 뻔했다.
“설산검호의 몸에 내단의 조각을 심은 건 모산혈조 그놈의 실험이었을 거야. 내단의 음기로 태양을 얼마나 막을 수 있는지 시험해본 거겠지.”
물론 완안극이나 다른 흡혈괴마들의 몸에선 내단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 아예 관련이 없진 않을 것이다. 처음에 조우했을 때 그들은 태양 아래에서도 멀쩡히 싸웠으니까.
‘설산검호가 잡혔을 때 완안극은 이미 불괴강시로서 어느 정도 완성됐을 거다. 그러니 내단의 조각을 넣는 대신 음한지기만 주입했다면....’
비록 한시적이지만 태양볕 아래에서도 위용을 뽐낼 수 있었으리라.
문제는 이무기의 내단이 그들이 습격한 거점에 더 이상 없다는 것.
‘모산혈조가 가지고 나갔겠지.’
정마안으로 금마의 기억을 엿봤기에 확실했다.
금마가 워낙 격렬히 저항했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엿볼 수 있었고, 또 그로 인해 놈을 잠시 놓치고 말았지만 필요한 정보는 손에 넣었다.
[한데 놈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 않나?]
“운남을 떠나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폐사찰의 지하엔 한 가지 술법진이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흡혈괴마들을 죽이는 데 바빴고, 이후의 싸움에 정신을 빼앗겨서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했지만, 강엽은 진입한 시점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싸움이 끝나고 다시 조사해봤다. 예전에 겪어봤던 술법진이었어. 흑접주를 성장시켜준 술법진이었지.”
돌이켜보면 어언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아미파와 낭인전을 중심으로 토벌대를 조직해서 흑접을 쳤을 때, 총단의 지하에서 견식한 술법진.
그동안 흑접이 죽인 희생자들과 죽은 살수들의 혼백이, 술법진의 진로를 통해 들어와서 흑접주의 힘을 기르기 위한 양분이 되지 않았던가?
“흑룡교가 멸문한 뒤에 수많은 비전이 혈교나 광명마교로 흘러들어갔지. 흑접주가 누렸던 술법진이 혈교에 들어갔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흑접주는 야금야금 희생자들을 모아서 힘을 길렀지만, 운남의 술법진은 규모가 달랐다. 수백, 수천 명끼리 부딪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모산혈조가 갑자기 여길 버린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턱대고 운남을 떠나진 않았을 거다.”
만약 모산혈조가 운남을 떠난다면 그건 흡혈귀가 되겠다는 비원을 이루고 난 다음일 것이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으리라.
[하면 어찌할 요량이냐?]
“점창파로 간다.”
맹월림의 본진은 폐찰사의 전력보다 더 막강할 테니 일행의 힘만으로는 공략하기 난망하다.
위기에 처한 점창파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야 하리라.
* * *
이튿날 폐사찰을 떠난 일행은 여강에 들렀다.
그리고 여강 교구를 다스리는 혈교의 마인을 척살한 뒤에 척무경과 합류했다.
“몽 향주는 일이 많아 오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며 이걸 주셨습니다.”
밀랍에 인장을 찍어 단단히 밀봉한 서찰이었다.
인장을 뜯고 서찰을 훑어내린 강엽이 눈에 띄게 경직되자 자연히 일행도 불안감에 휩싸였다.
“뭐야? 뭔 내용이 적혔길래 그래?”
백서희가 물었지만 강엽은 척무경만 쳐다봤다.
“...몽 향주에게 따로 언질 들은 거 없소?”
“예? 아, 아뇨. 서찰에 대한 거라면 강 무사님께 바로 드려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렇군.”
강엽이 서찰을 품 속에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서찰에 따르면 점창파를 포위한 천라지망을 이끄는 자는 근자에 천인장으로 합류한 고수라고 하오. 사문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맹월림에 투신하자마자 점창파 고수들을 여럿 죽였다는군.”
“....”
척무경의 낯빛이 무거워졌지만 강엽은 특별히 위로하진 않았다.
서찰엔 맹월림의 새로운 천인장 말고도 여러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이 굉장히 민감했기에 강엽 또한 일행에게 말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했다.
“한데 본산엔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라지망을 피하려면 야음을 틈타는 수밖에는....”
“아니.”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일행은 뜨악했다.
“천라지망을 지휘하는 천인장을 잡고, 놈들의 창고에 불을 지르겠소.”
“예에?”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소.”
병가에서도 금적금왕(擒賊擒王)이라고 하지 않나.
적장부터 잡으면 적은 혼란에 빠지는 법이다.
“분명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 있겠지. 하지만 우리라면 뚫을 수 있소.”
“아, 확실히....”
“그건 나랑 백서희가 할 테니 척 공자는 현운 도장님, 완안극과 함께 적들의 식량 창고를 태워주시오.”
“만약 놈들이 식량을 잃는다면....”
“적장을 잃은 상황에서 식량까지 불탄다면 혼란에 빠지겠지. 운때만 맞으면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소. 어떻게 되든 놈들의 천라지망은 흔들릴 거요.”
말 그대로 적장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 일행 전원이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위험천만한 짓거리였다.
이후 강엽은 순찰을 돌던 맹월림의 전사들을 기습해서 쓰러트렸다.
그리고....
“적들의 창고는 두 곳에 분산되어 있소. 도시에 하나, 바깥에 하나.”
마안을 이용해서 전사들의 기억을 싹 훑은 뒤에 사혈을 찔러 그들의 명줄을 끊어버렸다.
“전사로 위장해서 안으로 들어가시오. 마침 체격이 비슷하니 옷도 잘 맞겠군.”
“...허허, 일 각도 걸리지 않았거늘.”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현운 도장은 강엽이 순식간에 중요한 기밀들을 빼내자 헛헛하게 웃었다.
척무경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건 매한가지.
“척 공자는 근방의 지리에 빠삭할 테니 내가 말한 곳이 어딘지 알 거라 생각하오.”
“아, 네. 아, 알고 있습니다. 한데 식량 창고를 분산시키다니....”
“점창파가 기습할 것을 우려했겠지. 적들의 군량을 소진시키는 건 병법의 기본이니까.”
설사 식량 창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경계도 매우 엄중했다.
하나는 점창파의 속가 문파이자 대리에서 가장 큰 표국인 창산표국(蒼山鏢局)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근방에서 가장 큰 호수인 이해(洱海)의 섬에 있었던 것.
후자는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만큼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건 완안극이 해결하기로 했다.
그렇게 날이 완전히 저물어 삼경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허억! 허억! 고년, 요분질이 장난 아니구나!”
“아아... 훌륭하세요, 어르신!”
점창산 인근의 대장원.
새로운 천인장이 머무르는 전각에선 열락에 젖은 비음과 교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강엽과 함께 숨어든 백서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연놈들 그 짓거리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점창파가 고사 직전이라지만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강엽도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늘한 안광을 뿜어냈다.
[방심하면 우리한테 좋은 거지.]
[하긴.]
[근데 저쪽도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건 아닌 것 같다.]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