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37화 (235/450)

44화. 밀담 (3)

당문에서 재회한 일행은 서로 반가움을 표했다.

헤어진 시간은 한나절밖에 안 됐지만, 힘을 합쳐 생사의 고비를 넘은 경험 때문인지 이젠 함께 있는 게 더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부인 현운 도장과 함께 찾아온 청수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으음.”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일행은 청수가 말한 사람이 하후진과 연가휘임을 알고 쓰게 웃었다.

상석에 앉은 당천경이 관심을 보였다.

“자네가 말하는 사람이 혹시 염왕과 그 제자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

일행만 모인 자리도 아니고 어른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할 순 없는 노릇.

물론 청수는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사부의 면을 생각해서 당문주의 질문에 긍정했다.

“그러고 보니 염왕께선 왜 무림맹에 오지 않으신 건가? 딸에게도 물었지만 잘 모르더군.”

청수에게 묻고 있지만 실상은 강엽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강엽이 술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사문의 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하후진을 수련시키기 위함이었다.

하후진은 무림맹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사부를 따라가는 걸 거부하진 않았다.

‘절실해진 거겠지.’

하후진 정도의 고수라면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는다. 실력만 보면 금패급이니까. 고수가 득실거린다는 구파와 팔가도 하후진만한 고수는 열 명도 되지 않을 터.

하지만 하후진은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자신과 대등했던 강엽이 언젠가부터 앞서나가고, 그 자신은 혈교의 교성에게도 쩔쩔매고 있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염왕의 제자인 하후진에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하후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크고 단단한 벽을 넘기 위해 염왕을 따라나선 것이다.

‘다들 비슷한 심정이겠지.’

하후진만이 아니었다.

청수도, 당묘정도... 다들 더 강해지고 싶다고 열망한다.

하후진의 이야기가 나오자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일행의 심정을 대변했다.

“.......”

다들 침묵에 잠기자 저간의 사정을 짐작한 듯 당천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흠, 괜한 질문을 한 건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간 겪은 일들이나 들려주게. 여기 계신 분들도 대강은 알고 있지만, 자네는 당사자가 아닌가?”

“제가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재주가 없어 지루하게 들리실지도 모릅니다.”

“자네에게 매담꾼의 재주를 기대하진 않네. 알아서 걸러들을 테니 말해보게.”

당천경의 말에 자리에 참석한 명숙들이 눈을 반짝이자 강엽은 약간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내심 말을 고르며 운을 뗐다.

“사건의 발단은 제가 낭왕의 호출을 받았을 때부터였습니다.”

강엽의 입에서 그간 겪었던 일들이 흘러나왔다.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에겐 청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다만 이해하기는 쉬웠다. 이야기를 재밌게 풀진 못해도 간결하고 조리 있게 설명했던 것이다.

민감한 사항들, 예컨대 낭왕이 황산에 있다거나 하오문주와 부부 관계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낭왕의 소개로 하오문의 고위 인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암시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다들 흥미롭게 들었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강엽과 함께 여러 모험을 겪긴 했지만 그 이전의 일은 몰랐으니까.

중간중간 의문이 생길 때는 당천경을 비롯한 명숙들이 질문하고, 강엽이 대답했다.

가끔은 일행 중 한 명이 대신 대답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네의 금패 승급이 결과적으로 암시장의 패망과 오사도의 죽음까지 이르렀다는 말이군.”

“암시장은 저희가 아니어도 망했을 겁니다. 흑상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칼을 겨누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그 싸움에서 혈교가 이겼을 공산이 크지 않나? 귀산자의 무위는 놀랍지만, 그 혈교의 신녀라는 여자를 당해내진 못했을 테니.”

당천경이 뾰족하게 기른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우인 당우의 서찰 덕분에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들은 것만큼 현실감이 있진 않았다.

게다가 혈교의 신녀에 대한 설명도 두어 줄 정도였기에 얼마나 위험한지 체감하기 힘들었기도 하고.

“자네는 혈교의 신녀를 몹시 경계하는 것 같군. 심지어 그 여인이 죽은 뒤에도 말일세.”

“.......”

강엽은 술로 입술을 적셨다. 이제부터 나올 말이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모산혈조의 제자를 심문해서 혈교가 신녀 같은 존재를 또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한 번 만든 걸 다시 만들지 말란 법은 없겠지.”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 일에 맹월림이 깊이 엮여 있습니다. 그들이 운남 무림을 제패하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자들을 힘으로 눌러찍은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혈교의 대계와 맞물려 있지요.”

“으음, 만약 혈교가 그런 괴물들을 여럿 만들어낸다면 골치 아프겠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나?”

“혈교가 불괴강시를 만들어내는 건 그걸 그릇으로 삼아 혈마를 부활시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

“...!”

“...!”

“...!”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말에 당천경과 현운 도장 등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것도 모산혈조의 제자를 심문해서 알아낸 건가?”

“그렇습니다.”

실은 정마안으로 명도상인의 기억을 들쑤셔서 알아낸 정보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혜정 사태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나 적에게 들은 정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증좌가 있다면 몰라도....”

“어떤 정보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혈교가 혈마의 부활을 꿈꾼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아닙니까.”

서하무량검 적운 도장이 의견을 보태자 좌중이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어올렸다.

“남궁 소가주, 할 말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혈마는 천 년도 전에 죽은 인물이 아닙니까?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당천경이 말을 받고, 현운 도장이 대꾸했다.

좌중의 시선이 몰리자 현운 도장이 심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마외도의 공부는 기괴막측하여 상리를 거스르는 사술이 많네. 그중엔 자신의 혼을 타인의 몸에 옮기는 이혼대법도 있지.”

“그럼 정말 부활할 수 있는 건지요?”

“그렇게 간단하진 않네. 혼백은 신령스러운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육신을 빠져나가면 그 즉시 귀천하는 법일세. 혼백을 다루는 술법들도 그래서 대개 엉터리지. 허무맹랑하고 불확실한 요소가 많거든.”

“오래전부터 사마외도의 마인들이 이혼대법을 연구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

적운 도장이 이어서 말했다. 무당과 청성 모두 술맥을 잇는 계승자들이 있는 만큼 어깨 너머로 이것저것 들은 게 많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궁상아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이라는 말씀은, 일부는 성공했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주장하지. 진실은 아무도 모르네.”

“비슷한 예는 있습니다.”

이번엔 다시 강엽에게 이목이 쏠렸다.

남궁상아가 물었다.

“비슷한 예라니요?”

“광명마교의 칠사도. 무림에서 괴뢰마라고 불리는 그자는 자신의 혼백을 여럿으로 나누었습니다.”

괴뢰마와 맞붙은 일은 이미 들려주었기에 따로 설명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번엔 옥청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 무사의 말대로입니다. 그자는 여럿의 몸을 조종했지요.”

“분혼대법이군요. 사마외도라는 것들은 대체....”

적운 도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터뜨렸다.

“이혼대법이나 분혼대법이나 혼백을 다루는 면에선 비슷합니다. 천 년 전의 사람을 살리는 건 저도 믿기지 않지만, 어쨌든 혈교가 그 짓을 하겠다고 저리 난리를 치는 건 사실 아닙니까?”

강엽의 말에 좌중이 입을 다물었다.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져서 선뜻 긍정할 수 없었던 것.

그때 당천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네만, 확인되지도 않은 일로 왈가왈부하는 것도 옳진 않은 일이네.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군.”

“당문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들 곡차를 많이 들었으니 바람이라도 쐬는 게 어떠실지요?”

혜정 사태의 제안에 명숙들이 몸을 일으키자 일행도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차마곤이 아직 가득한 술동을 보고 입맛을 다시자 현운 도장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야차마곤 도우께선 아쉬우신가 보구려.”

“아,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야차마곤의 얼굴이 벌게졌다. 민망해서 그런 건지,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입에선 술냄새가 진동했다.

“하하하, 그냥 해본 말이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게 좋겠지. 늙은 사람들이 너무 붙잡고 있으면 괜히 눈치 없다는 소리만 듣는 법.”

“아니, 어떤 놈이 감히 도장을 늙었다고 욕하겠습니까?”

“내가 욕한다오. 청수야, 이 사부는 먼저 가볼 테니 천천히 오거라.”

그러면서 제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휘적이며 사라진 현운 도장이었다.

이어서 적운 도장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끼리 따로 마시자는 게지. 빈도도 먼저 실례하겠네.”

차례대로 옥청선자와 혜정 사태도 두 사람을 따라가자 일행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당천경이 딸을 돌아보았다.

“정아야, 네가 안내해주거라.”

사전에 언질을 들었는지 당묘정은 침착하게 지시를 받들었다.

“어른들끼리 따로 말씀을 나누실 거예요. 대신 제가 더 술맛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술맛 좋은 곳?”

야차마곤이 고개를 기울이자 청수가 오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소월루(笑月樓)를 말씀하시나 보군요.”

“잘 아시네요.”

“예전에 사부님 몰래 간 적이... 헙!”

술기운에 무심코 내뱉은 청수가 헛바람을 집어삼키자 다들 피식거리며 웃었다.

야차마곤이 껄껄 웃었다.

“역시 자네는 훌륭한 말코야!”

하지만 모두가 간 건 아니었다. 당천경이 강엽과 남궁상아를 따로 불렀던 것이다.

“자네들은 날 따라와줘야겠네.”

강엽은 대답하기에 앞서 백서희를 돌아보자 그녀가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들었다.

“우린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래.”

그렇게 일행이 간 뒤에 강엽은 남궁상아와 함께 당천경의 뒤를 따라 장원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로군.’

굳이 자신과 남궁상아를 콕 짚은 이유가 무엇이겠나.

남궁상아를 슬쩍 돌아보자 그녀 역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한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문의 무사들에게 동생을 맡긴 그녀는 금세 쫓아와서 강엽과 나란히 당천경의 뒤를 따랐다.

“무림맹은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연합일세. 구파와 팔가뿐만 아니라 여러 문파들, 심지어 대상단과 관부의 세력도 조금씩 얽혀있지. 그들의 눈과 귀가 무림맹의 곳곳을 주목하고 있다네.”

굳이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

그건 아마 이제부터 만날 사람이, 그만큼 세간의 이목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무인들이나 하인들도 없이 홀로 두 사람을 데려가는 당천경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장원의 쪽문이었다.

쪽문을 나와서 삼십여 장쯤 가자 복잡한 골목이 펼쳐졌고, 몇 번씩 방향을 바꾸면서 어느 구석진 집 앞에 도착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이목을 피해서 밀담을 나눌 때는 안가에서 만나곤 하네.”

“.......”

무림맹 외성 안에 있는 안가.

맹방의 사람들이 머무르는 장원과 비교적 가까운 안가야말로 온갖 모략과 협상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이런 장소가 여기 말고도 더 있겠지.’

강엽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당천경은 대문을 다섯 번 두드리고, 두 번 세 번을 더 두드렸다.

무작정 두들기는 게 아닌, 횟수와 박자를 맞춘 암구호.

그러자 눈높이에 맞춘 자그마한 구멍이 나오면서 날선 눈빛이 세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끼이이익...!

천천히 움직이는 경첩.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듯 듣기 싫은 소음을 낸 문이 열리자 다부진 체구의 무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당천경이 뒤따르는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상아의 목이 꿀꺽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발을 내딛은 강엽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땅 위의 건물이 아니라 지하를 이용할 만큼 철저한 보안.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신경에 거슬리긴 해도, 천장의 야광주 덕분에 어둡지는 않다.

커다란 너럭바위를 깎아만든 원탁 주변엔 앞서 장원에서 나온 명숙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당문주님.”

총군사 제갈의현.

음울한 그림자에 반쯤 얼굴이 잠긴 그는 낮에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엽은 그 때문에 놀라진 않았다. 제갈의현이 올 거라는 말은 이미 들었으니까.

다만 제갈의현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면사 여인의 모습은 뜻밖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여인. 면사를 쓰고 있다지만 강엽은 날카로운 눈썰미로 가려진 이목구비를 한눈에 알아봤다.

여인이 먼저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강 무사.”

“...문주께서 어찌 여기에?”

“본문은 무림맹과 협력 관계니까요. 원래 제가 나서는 일은 거의 없지만... 총군사님을 비롯한 여러 명숙들이 오시는 자리에 아랫사람을 보낼 순 없지요.”

전날 황산에서 만났던 하오문주.

그녀가 총군사 제갈의현과 함께 강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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