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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31화 (230/450)

42화. 맹행 (3)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와 농밀한 주향이 가득 퍼지면서 일행의 분위기도 차츰 무르익었다.

다들 내공 화후가 깊어서 술기운이 올랐어도 특별히 취하지는 않았다. 다만 술기운이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즐거운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다들 웃고 떠들며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다.

심지어 가장 연장자인 염왕도 가끔씩 입꼬리를 당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특이한 일 아니에요?”

백서희가 물꼬를 틀자 일행이 무슨 말을 하냐는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렇잖아요. 출신도, 연배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는데.”

“크흠.”

헛기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다들 새삼 자각한 것이다.

“하긴 예전이라면 이 마구니놈과 겸상하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지.”

추임새를 넣듯 동조한 야차마곤이 염왕을 살피며 술병을 물었다.

딱히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는 염왕인지라 야차마곤이 그런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

술병을 내려놓은 그가 입가에 흐르는 액체를 슥 닦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거라. 네놈을 좋아하거나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알고 있소.”

연가휘는 차분하게 도발을 받아넘겼다.

“투항하긴 했지만 당신들이 우릴 포용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우리도 당신들이 마냥 편치는 않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쪽을 골랐겠지.”

“흥, 곧 죽어도 과거를 반성한다는 말은 못하는군.”

“당신들은 반성하시오?”

“무어?”

“오십 년 전의 정마대전. 흑룡교가 전쟁을 일으켰음을 부정하진 않겠소. 우리 선조들이 정파인들을 많이 죽였지. 하지만 정파인들도 많은 교도들을 죽였소. 그중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간인도 있었소이다.”

“헛소리!”

이마에 핏대가 솟을 만큼 역정을 낸 야차마곤이 식탁을 쾅 내려치다 뒤늦게 헉 소리를 냈다.

“죄, 죄송합니다, 염왕 선배님.”

“좋은 분위기 다 망쳤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염왕의 목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전쟁은 사람을 광기에 몰아넣는다. 선한 사람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미쳐버리지.”

정마대전의 산증인이 하는 말이었다.

술잔을 매만진 염왕은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듯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정인이 죽고, 가족이 죽고, 사형제가 죽었다. 어제 함께 밥을 먹었던 동료가 시신이 됐다. 존경하는 상관과 아끼는 부하가 전사했다.”

“.......”

“공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복수밖에 없었지. 모두가 미쳐서 죽고 죽이던 시대였다. 대의 명분은 사라지고 복수심만 남은 거지.”

“.......”

“무림맹에 가담하긴 했지만, 딱히 정파를 옹호할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그들이라고 전부 정의로웠던 건 아니니까. 흑룡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공 한 수 익히지 못한 사람들을 죽인 정파인들도 많았다. 심지어 흑룡교와 별 상관도 없는 자들을, 단지 의심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학살했던 사례도 제법 많았지.”

“설마 그럴 리가...!”

“땡중, 네놈도 소림 출신이라면 잘 알지 않나?”

야차마곤의 입이 다물렸다.

“말은 안 했지만 외소림 출신이겠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소림의 무공을 익힌 파계승이 외소림 말고 또 있을까. 내가 강호를 떠나긴 했지만 법공(法供)과는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였다.”

-불권(佛拳) 보리고승(菩提高僧) 법공 대사.

세수 아흔을 헤아리는 소림 방장으로, 염왕과 함께 흑룡교주와 싸웠던 시대의 거인이었다.

“전쟁은 이성을 흐리는 법. 사마외도 척살에 미쳤던 외소림이 어째서 해체되었느냐?”

“그건....”

“혈교의 음모에 빠져서 그들과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혈귀로 알고 해쳤지. 그래서 자중지란이 일어났고, 외소림의 승려들끼리 싸우지 않았느냐?”

“.......”

전강과 야차마곤이 외소림의 일을 밝히기 꺼려하는 것만 봐도 곡절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그런 비사가 얽혀있을 줄이야.

야차마곤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어렸다.

“...후배의 상처를 후벼파시는군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 때론 알고도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정파라고 무조건 깨끗한 건 아니다.”

“염왕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도....”

“그래, 흑룡교는 악이었지.”

야차마곤을 혼낸 염왕은 이제 연가휘를 꾸짖었다.

“네놈도 고개 빳빳이 들면 무림맹에 가서 좋은 소리 듣진 못할 거다. 잘못한 정파인도 많지만, 흑룡교는 아예 천하를 짓밟았다. 그 시절을 살았던 자들은 그 만행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연가휘도 할 말이 궁색해져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 * *

그렇게 불안한 분위기가 이어질 무렵, 돌연 계단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일행이 고개를 돌리니 머리가 희끗한 초로인이 서 있었다.

연가휘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 노사?”

초로인은 흑룡교도였던 것이다.

두 손을 맞잡은 그는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예를 갖추었다.

“늦게나마 인사를 드리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은공. 이 늙은이는 이청학이라고 합니다.”

“강엽입니다, 어르신.”

아무래도 상대의 연배가 연배인 만큼 강엽도 말을 놓진 못하고 포권으로 응수했다.

“어이쿠, 부디 예를 거둬주십시오. 은공이 아니었다면 쇤네들은 진작에 저승 문턱을 넘었을 겁니다.”

“유 대인의 일은 유감입니다.”

유이강의 이름이 나오자 이 노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먹먹한 감정이 찾아왔는지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상대가 흑룡교도라 하여 박대할 생각은 없지만 왜 왔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이 노사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탁했다.

“허락하신다면 술을 올리고 싶습니다.”

뜻밖의 말에 일행은 물론 호송단의 이목까지 쏠렸다.

가만히 이 노사를 들여다본 강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잔 받겠습니다.”

이 노사가 공손하게 술을 따르고, 강엽도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쳤다.

투명한 술이 찰랑이는 잔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이 노사가 들고 있던 술병을 받았다.

“저도 따르지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노인과 청년이 술잔을 부딪치자 객잔 전체에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독한 화주를 한 입에 털어넣은 두 사람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노인의 낯빛에 붉은 취기가 돌았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허허, 아닙니다. 한 잔이면 족하지요. 이 늙은이의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노사는 미련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강엽에게 술을 올리는 걸로 만족했다는 듯이.

문제는 그 직후였다.

“저도 술을 올리고 싶습니다!”

“소생의 술도 받아주십시오!”

앉아있던 흑룡교도들 중 몇 명이 아우성을 쳤다.

때 아닌 소요에 호송단의 인원들은 물론, 객잔 안의 다른 손님들과 점소이들까지 당황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옥청선자를 향해 말려야 하지 않냐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지켜보라는 듯이.

객잔을 둘러본 강엽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모두 받아줄 테니 줄 서서 올라오시오.”

강엽의 앞에서부터 시작한 줄은 계단을 넘어 그 아래쪽까지 길게 이어졌다. 한 사람에게 술을 올리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강엽은 교도들이 올리는 술을 넙죽넙죽 마시고, 그들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교도들은 강엽이 그들을 알아주길 바라듯이 술을 따를 때마다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숙정방도들이 들고 일어났다.

“저희 술도 받아주십시오!”

“옳소! 우리도 못한 걸 흑룡교 놈들이 하는 걸 두고볼 수는 없지!”

“아니, 이 사람들이....”

단목정이 말리려고 했지만, 그전에 강엽이 먼저 말했다.

“오냐. 너희 술도 받아줄 테니 줄 서서 올라와라.”

그렇게 숙정방의 무인들까지 주군에게 술을 올리기 위해 줄을 서자 화산파의 입장이 미묘해졌다.

흑룡교와 숙정방이 술을 올리는데 그들만 남아있는 것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다들 눈알을 뒤루룩 굴리는데, 옥청선자가 몸을 일으켰다.

“사고님?”

“부끄럽구나. 함께 싸운 전우가 깨어났으면 마땅히 찾아가서 안부부터 물었어야 했거늘.”

염왕과 연가휘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차마 일행이 있는 곳에 앉지 못했던 것이다.

옥청선자가 술병을 들고 나아가자 흑룡교도들과 숙정방도들이 눈치껏 길을 터주었다.

“이보게, 귀영... 아니, 강 무사. 내 술도 받아주겠나?”

“정도십대고수가 하사하는 술이라. 영광이군요.”

“함께 싸운 사이에 영광은 무슨. 그때 도와줘서 고마웠네. 자네가 오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게야.”

강엽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옥청선자를 도와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진조였다.

다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옥청선자는 전보다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연가휘를 돌아보았다.

“자네에게도 인사가 늦었군. 자네 부하들이 제자들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들었네. 고맙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가휘가 어색해하는 얼굴로 겸양했지만 옥청선자는 당치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세상에 당연한 일이 어딨겠나. 내 비록 자네들을 감시하고 있으나, 이번 일은 잊지 않겠네.”

옥청선자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해도 객잔 안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화산파의 제자들은 황망해졌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앉아있던 묘령의 여제자가 벌떡 일어섰다.

강엽이 처음 만난 화산파의 제자인 하윤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저도 갑니다!”

“엇! 하, 하 사매?”

뒤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말든 그녀는 쪼르르 계단을 올랐다.

다만 강엽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갔다.

“일전에 절 구해주셨죠?”

“어, 어어...?”

계단 중간에 엉거주춤 서 있는 털복숭이 장한.

강엽에게 술을 올릴 차례만 기다리고 있던 흑룡교도는 화산파의 제자가 말을 걸자 혼비백산했다.

하윤이 포권을 쥐었다.

“그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사님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전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예요.”

“...따, 딱히 소저를 구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소. 혈귀놈을 죽이려고 했던 건데....”

“그래도요. 어쨌든 절 구해줬잖아요. 진작 왔어야 했는데 사형제들 눈치만 보고 있었네요. 무사님이 괜찮다면 저도 한 잔 따르고 싶어요.”

흑룡교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에 있는 교도들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그다음엔 위층에 있는 연가휘에게 허락을 구했다.

연가휘가 받아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제서야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한 잔 받겠소.”

계단 중간에서 화산의 제자와 마교도가 주거니받거니 대작한다. 그야말로 무림의 상식을 초월하는 진풍경이 펼쳐지자 흑룡교도들마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넋이 나간 자들은 그들의 귓가에 강엽의 목소리가 꽂히고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숙정방도들에게 명한다.”

숙정방은 물론, 흑룡교와 화산파의 무인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강엽이 술을 마시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체면이고 뭐고 잊어라. 솔직해지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내가 허락한다.”

“......!”

강엽의 목소리에 깃든 마력이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린 걸까.

처음엔 주춤거렸던 숙정방의 무인들은 흑룡교도들이나 화산파의 제자들을 힐끔거리더니 조금씩 다가갔다.

“크흠, 형씨. 일전엔 목숨을 빚졌수다.”

“내 얼굴 기억나시오? 같이 혈귀놈들 때려눕혔잖소.”

경계심을 곤두세웠던 자들이 어색하게나마 어울리기 시작한다. 화산파의 제자들도 숙정방도들을 내치지는 못했다.

강엽에게 술을 올리고자 줄을 섰던 자들이 이젠 저들끼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개중 친화력이 좋은 자들은 벌써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영원히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백도와 흑도, 마도의 무인들이 한데 어울리는 장관이었다.

이층에서 지켜본 일행은 경이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못했다. 특히 조금 전에 말싸움을 했던 연가휘와 야차마곤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딴청을 피웠다.

“음?”

문득 강엽은 옆구리를 찌르는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백서희가 예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계속 술 마시는 게 무서워서 알아서 놀라고 한 거지?”

“흠, 들켰나?”

“척하면 착이지.”

“적당히 때를 봐서 도망치려고 했지.”

강엽의 너스레에 백서희가 등까지 젖히며 깔깔거렸다. 얼굴에 붉은기가 살짝 도는 게 취하진 않아도 꽤 마신 것 같았다.

“그래도 일부러 한 건 아니야. 우연이지. 흑룡교의 노인이 나서고, 화산파의 제자가 용기를 내고,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호응한 우연.”

“한 번이면 우연이지만, 세 번이면 필연이라네.”

옥청선자가 대꾸하자 일행도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우연일지 몰라도 그다음은 아니었다.

하후진이 호쾌하게 웃었다.

“푸핫! 무림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고 하잖수. 오늘은 다 잊고 실컷 마시자고!”

“넌 술 마시면 안 되지.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지옥 수련 아니냐?”

“끄응.”

강엽의 사실 적시에 하후진이 시무룩해하자 염왕이 술을 홀짝이며 피식 웃었다.

“강호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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