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맹행 (2)
강엽은 내려가지 못했다.
‘운명의 세 별이라....’
천기를 읽는다느니,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라느니 하는 것은 솔직히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염왕의 말대로 자신이 그런 운명을 지음받았다면, 그건 언제부터 정해져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까, 아니면....
“...변하는 건 없겠지.”
운명이든 뭐든 자신의 인생일 뿐.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게 아니라면, 염왕이 늘어놓은 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설령 그의 말대로 운명의 세 별이 존재하고, 다른 두 사람과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대척점에 선다고 해도.
강엽은 지금까지 해온 일을 포기하거나, 노선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나 하기 나름이다.’
그렇게 결심을 굳히는 그때, 뒤쪽의 우거진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볼일이 있나?”
“그렇습니다.”
웬일인지 퍽 복잡한 감정이 번진 연가휘의 얼굴.
강엽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어느덧 황혼을 지나서 거뭇거뭇해진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두 사람을 어루만지듯 스쳐지나간 차가운 산바람이 땀과 열기를 식혀주었다.
“교도들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 유감이야.”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으음.”
강엽도 나직이 신음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그들만은 아니겠지.’
흑룡교가 멸망한 지 오래됐고, 강엽이 유이강의 원수를 갚아주었기에 불만을 누르고 있을 뿐.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무림맹에 항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존재하리라.
“교도들의 불만을 몰랐나?”
“알고... 아니,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서?”
“아닙니다.”
연가휘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잡히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잡힌 이상 무림맹이 저희를 풀어주지 않을 건 뻔했으니까요. 뻔히 개죽음을 당할 걸 알면서도 저항하는 건 돌아가신 어르신의 뜻과도 맞지 않을 겁니다.”
유이강이 살아있었다면 뭐라고 했었을까. 그의 임종을 지켰던 강엽도 함부로 억측할 순 없었다.
다만 유이강이라면 뻔히 개죽음을 당할 걸 알면서도 목숨을 불태우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다 현명한 선택을 내렸겠지.
“다른 교도들은 그들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혈교도들을 쫓다가 죽었다고만 알지요.”
“누군가는 그들이 도망치는 걸 봤을 수도 있겠지.”
연가휘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겁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녀석들을 죽인 게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녀석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했다면....”
“별로 좋지 않았을 거다. 목숨 걸고 싸운 게 무색해지겠지. 사기가 땅에 떨어질 테니까. 숙정방과 화산파도 좋지 않게 봤을 테고.”
“그래도....”
“나도 막 깨어나서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너희가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건 화산파의 제자들도 봤을 거다.”
“아, 예. 함께 싸웠으니까요.”
“그게 중요한 거야. 물론 아직 너희를 덮어놓고 믿진 않겠지. 그래도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하면 전처럼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거다.”
물론 흑룡교도들을 괄시하는 자들도 여전히 있으리라. 그것까진 강엽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명만이라도 너희를 받아들인다면, 떠난 이들의 희생이 마냥 헛된 건 아닐 거다.”
“.......”
“제 잘난 맛에 사는 정파놈들에게 보여주라고. 그래서 너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다.”
연가휘는 얼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강엽을 바라보았다.
“하....”
벌어진 입새 사이로 흘러나온 메마른 웃음이 점점 커져갔다.
“하하하하! 시원하군요. 은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콧대 높은 정파놈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실컷 잘난 척이나 해야겠습니다. 너희가 개무시하는 마교도가 너희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입니다.”
“속은 좀 풀렸나?”
자기 손으로 교도들을 죽였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무림맹에 항복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연가휘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는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물으며 고통받았으리라.
‘그 번뇌에 집착했다면 심마(心魔)에 빠졌을 수도 있겠지.’
물론 얘기를 나눴다고 모든 번민과 고뇌가 씻겨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혼탁했던 눈빛은 정기를 되찾았다.
“예. 결심했습니다. 교도들에게 말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야 합니다. 욕을 처먹고 몰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요. 왠지 그래야 우리가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대로 해라.”
연가휘가 교도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고백한다면 강엽으로선 말릴 재간이 없었다.
‘어쩌면 이 녀석 말대로 정면돌파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지.’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 사이로 실소를 흘린 강엽이 연가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민 해결됐으니 다행이군. 여기서 계속 청승 떠는 것도 좀 그러니까 슬슬 내려가자고.”
“예, 가시죠. 마침 밥먹을 시간이군요.”
“근데 넌 굶어야 되지 않나?”
“.......”
사실을 적시당한 연가휘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떠올랐다.
* * *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땐 식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호송단의 인원이 워낙 많은지라 예닐곱 명씩 나눠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딱 세 부류로 나뉘었다.
숙정방은 숙정방끼리, 흑룡교는 흑룡교끼리, 화산파는 화산파끼리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긴 화산파 입장에선 숙정방도 껄끄럽겠군.’
흑도 방파인 숙정방이다. 흑룡교 같은 앙숙은 아니라고 해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사이.
그렇게 서로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엽, 여기야!”
백서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엽과 연가휘가 올라가니 둥근 탁자를 차지한 일행이 음식을 나눠 담고 있었다.
단목정이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다.
“주군.”
“다친 데는 없나?”
“예, 송구스럽게도 제가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방주가 할 일은 앞에서 싸우는 게 아니야. 방도들을 지휘하는 거지. 지금까진 잘 해줬어.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해주면 돼.”
시무룩해졌던 단목정의 안색이 밝아졌다.
백서희의 옆자리에 앉은 강엽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하후진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입맛만 다시는 하후진이 그 눈빛에 움찔 굳어졌다.
“뭐, 뭐야?”
“좀 불쌍해서.”
“크흡...!”
“그래도 물은 마실 수 있는 것 같군. 하긴 그렇게 땀을 흘렸는데 물도 못 마시면 지옥이지.”
“쯧쯧, 다 업보일세. 업보야. 그러게 왜 야합 같은 걸 해가지고 화를 자초하는지.”
하후진과 연가휘로 인해 삼등을 할 뻔했던 야차마곤이 이죽거리자 하후진이 이를 뿌득 갈았다.
독한 화주를 들이키던 염왕이 한마디 던졌다.
“제자야, 이빨 닳으면 나이 먹어서 고기도 못 씹는다.”
“끄응.”
차마 사부에겐 대들지 못하겠는지 앓는 시늉을 한 하후진이 물만 꿀꺽꿀꺽 들이키자 일행은 쓰게 웃었다.
단목정도 괜히 눈치가 보이는지 하후진과 염왕의 눈치를 보며 먹는 둥 마는 둥했다.
그때 강엽이 밀가루 반죽에 돼지고기를 넣어서 구운 육협막(肉挾馍)을 건네자 일행의 시선이 쏠렸다.
하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인마. 너....”
“내기는 너랑 염왕 선배 사이의 약속이고. 난 동의한 적 없으니까 줘도 상관없겠지.”
그 말에 일행이 무심코 염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염왕은 딱히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눈을 반개한 채 술잔을 홀짝일 뿐이었다.
주춤주춤 육협막을 받은 하후진이 차마 강엽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 고맙다, 이 자식아....”
“여기요, 하후 무사님.”
단목정이 자신의 앞에 놓인 큼지막한 양고기를 썰어서 하후진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죄송해요. 진작에 드렸어야 했는데....”
“큼, 크흠. 아니, 뭐.... 사실 이전에도 방주가 몰래 만두를 줘서 근근이 버틸... 헙!”
이전에도 꼴찌를 해서 굶었을 때, 단목정이 몰래 만두를 빼돌린 만두로 버틴 모양.
먹잇감을 찾은 일행이 승냥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몰래 만두를 줬다고?”
“점소이에게 만두를 부탁했었지. 야식으로 먹으려는 줄 알았는데 하후진에게 주려는 거였구만? 이야, 직접 봤었어야 했는데!”
일행, 특히 여인들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단목정은 잘 익은 능금처럼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게 하후 무사님이 절 구해주셔서....”
마을에서 싸울 때 하후진 덕에 위기를 넘겼던 걸까?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하후진과 단목정이 먼 산을 쳐다보자 일행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뭐, 강엽의 말이 맞네. 딱히 내기에 동의한 적은 없으니 우리가 주는 건 상관없잖아?”
“그렇네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와 백 소저는 내기에 참여한 적도 없으니까요.”
“저는 고기를 먹지 않으니 두 분께 드리지요.”
백서희와 당묘정이 생글거리면서 하후진과 연가휘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소창후도 못 이긴 척 술과 고기를 밀어주었다.
겸연쩍어진 하후진과 연가휘가 은근슬쩍 염왕을 곁눈질했다.
“크흠! 사, 사부, 먹어도 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심드렁하게 되물으면서 술을 마시는 염왕이지만, 입꼬리는 엷게나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제자 녀석이 인복이 없진 않군. 강호에서 가장 어려운 게 좋은 친구를 얻는 거다. 그건 적을 이기거나 명성을 떨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지.”
수십 년간 강호를 풍미한 대선배의 경험이 엿보이는 대목.
하후진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친김에 술도 좀....”
“몇 년 자유롭게 살더니 못난 제자놈이 개념을 밥 말아먹었구나. 조만간 지옥 특훈이 필요하겠어.”
괜히 입을 잘못 놀려서 화를 자초한 하후진이 울상을 짓자 일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쓰지만 괴로운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심호흡을 하는 연가휘의 눈매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강엽은 굳이 왜 그러냐고 다그치는 대신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죽은 교도들은 스무 명이었습니다. 그중 싸우다 죽은 사람은 열네 명밖에 안 되었지요.”
여섯 명은 다른 이유로 죽었다는 걸까?
강엽은 싸움이 끝난 뒤 부상으로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연가휘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났다.
“여섯 명은, 동료들이 싸울 때 도망쳤습니다.”
“....”
“잡긴 했습니다. 그들이 도망친 방향이 저와 옥청선자가 향하던 방향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도망쳐야 한다고 떠들었기 때문에 전후사정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심문할 필요도 없었지요.”
어떤 문파든 동료들이 싸울 때 도망친 자는 배신자로 간주한다.
연가휘에게 잡힌 시점에서 뭐라 변명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연가휘가 괴로워하는 것은 단순히 교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보고 배신자라고 하더군요. 교를 저버리고 무림맹에 들러붙은 버러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