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6화 (226/450)
  • 41화. 기억 (1)

    광명마교의 총단.

    오사도를 위시로 한 교도들이 항주를 병탄한 이후, 광명마교는 복건의 총단을 항주로 옮겼다.

    장차 천하를 경략하는 데 있어 외진 복건보다는 강남의 중심인 항주가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

    사도십대고수인 대력쇄 묵야강과 그의 부하들이 머물렀던 대장원을 중심으로 인근 장원들을 병탄하고, 이름난 장인들과 목수들을 불러 증축을 거듭했다.

    강건한 무인들과 술사들이 동원된 대공사는 본디 몇 년이 걸릴 기간을 극적으로 단축시켰다.

    아직 완공되진 않았으나 총단의 기능은 대부분 옮겼기에 광명마교의 성지로 추앙되었다.

    “.......”

    광활한 대장원이 침묵에 잠겼다.

    말소리를 삼가는 것은 물론,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몸가짐.

    다들 눈을 마주쳐도 간단한 눈인사 외엔 아무것도 나누지 않았다. 혹여나 목소리를 내려는 시늉을 하거든 전음으로 호통을 칠 정도였다.

    지고한 신인, 교주의 교령(敎令)이었다.

    -모든 교도들은 사흘간 침묵으로 오사도의 순교를 애도하라.

    전임 칠사도가 외지에서 객사했을 때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한 달 만에 사도를 또 잃은 것.

    오사도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도 묵언수행을 하며 그녀를 기렸다.

    그녀가 살아온 생애와 쌓아온 업적, 그리고 그녀를 비참하게 살해한 흉수를 생각하며.

    그렇게 교도들이 침묵을 이어가는 가운데.

    교주가 광천궁(光天宮)이라 명명한 대궐에선 떠들썩한 고성이 터지고 있었다.

    “당장 오사도의 원수를 갚아야 하네!”

    거구의 장년인이 주장했다.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백색 장포로도 가려지지 않은 굴강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는 고인이 잠든 수정관을 둘러싼 백포의 사도들을 향해 동의를 구했다.

    “만약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목소리를 낮추게, 사사도.”

    짐짓 나무라는 시선이 쏘아졌다.

    조용하게 타일렀지만 사사도의 언성을 단숨에 삼킬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자.

    “뭣보다 그대는 빙궁을 공략할 예정 아닌가? 대의로 움직여야 할 사도가 사적인 원한을 우선시하는 걸 교도들에게 보여줄 셈인가?”

    “이사도...!”

    복건성의 포정사로서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무인보다는 학자라고 생각할 만큼 정갈한 풍채의 백발 노인이었다.

    그런 이사도와 눈이 마주치자 사사도가 이성을 되찾은 듯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내 실언했음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사도의 죽음은 간과할 수 없소. 안 그래도 칠사도가 죽어서 교도들이 동요하는데 오사도까지 연달아 귀천하다니....”

    “하나 상대는 무림맹에 갈 걸세. 무림맹에 쳐들어가자는 겐가?”

    “그건....”

    “아직은 때가 아니라네.”

    사사도는 불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으나, 이사도는 좋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팔사도, 구사도.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긴 금발을 허리까지 드리운 여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수정관만 매만졌다. 퀭한 눈밑만 봐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실눈 청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합니다, 이사도 어르신. 팔사도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해하네. 둘이 막역했으니까. 구사도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교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무림맹을 월담하겠습니다.”

    “무모하군. 아무리 자네가 중원제일의 살수라도 무림맹은 복마전일세. 천하팔존이 떡하니 있는 곳에 잠입하겠다고?”

    “정 안 된다면 놈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죠. 설마 천년만년 무림맹에 있진 않을 것 아닙니까?”

    “사도의 의무가 막중한데 기약도 없는 임무를 떠날 셈인가? 교주님께서도 허락지 않으실 걸세.”

    계면쩍게 뒷머리를 긁적인 구사도가 한쪽에 우두커니 선 소년을 향해 물었다.

    “흠, 칠사도... 칠사도 맞지요? 매번 모습이 달라지니 헷갈립니다. 칠사도께서도 오사도를 죽인 흉수를 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강합니까?”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소년에게 쏠렸다.

    소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기어검과 어검비행을 자유롭게 쓰더군.”

    “...그건 괴물인데요?”

    개개인이 정도십대고수, 사도십대고수와 비견되는 사도들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럴 리가 없어요.”

    “팔사도.”

    “일전에 황산에서 그자를 만났을 때, 그자는 고작 중단전을 개방한 수준이었어요. 한낱 절정고수가 석 달 만에 정기신을 합일하고 어검술까지 터득했다고요?”

    “그자가 무공을 숨겼을 가능성은?”

    “그때 막 금패에 올랐습니다.”

    “으음!”

    좌중이 이구동성으로 침음했다.

    이사도가 가슴께까지 기른 백염을 매만졌다.

    “팔사도의 말이 맞다면 이는 실로 비상식적인 성장일세. 설사 신공을 익히고, 전설의 영약을 물처럼 복용했다 해도....”

    갓 태어난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성숙한 인격을 이루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았다.

    설령 백 년에 하나 태어날까 말까 한 천골(天骨)의 무재라도, 하수가 고수가 되고 벽을 넘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법.

    “십 년의 세월도 짧은데 석 달이라니.”

    “삼사도, 당신의 의견은 어떻소?”

    사사도가 고까운 얼굴로 물었다.

    칠사도 괴뢰마처럼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채 구석진 기둥에 몸을 기댄 괴인.

    다른 사도들과 달리 시커먼 옷을 입고, 얼굴엔 뼈를 깎아 만든 듯한 하얀 가면을 쓴 행색이었다.

    “강호에서 ‘마의(魔醫)’라고 불린 당신이라면 뭔가 알지 않소? 듣기로 당신 역시 괴뢰마처럼 백 년 동안 강호를 떠돌며 온갖 무림인들을 해부해봤다고 하던데. 인체의 신비에 통달한 당신이라면 알 것 같소만.”

    [...나라고 인체의 신비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전성으로 대답한 마의가 팔짱을 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걸 다 알았다면 진작에 염원을 이뤘겠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테고.]

    마의와 괴뢰마.

    사도들조차도 이질감을 느끼는 대마두들은, 오사도의 죽음에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했다.

    [사실 석 달 만에 그만큼 강해지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가능하단 말인가?”

    이사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사도들은 물론 은근히 딴청을 부렸던 괴뢰마마저 은근히 관심을 보였다.

    [저 괴뢰마와 비슷한 경우라면. 절대고수가 이혼대법으로 타인의 몸을 빼앗는다면 가능하다.]

    “하면 누군가 귀영의 육신을 빼앗았다는 겐가?”

    [실물을 보기 전엔 알 수 없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절세영약과 시간이 필요해.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가 익힌 심법이 다르다면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확실치 않다는 말이로군....”

    [애초에 질문할 대상이 잘못됐다.]

    “음?”

    [나보다는 교주에게 물어야지. 원영신으로 현신한 교주라면 흉수와도 만났을 것 아닌가?]

    “...말을 삼가게.”

    존귀한 교주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불경한 일.

    이사도가 나무라는 소리를 하자 마의가 가면 속에서 웃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때.

    “교주님께서는.”

    지금껏 침묵을 지켰던 첫 번째 사도가 운을 뗐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헷갈릴 만큼 수려한 용모를 지닌 청년.

    환골탈태로 젊음을 되찾았다고 일컬어지는 일사도가 말문을 떼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복수를 명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왈가왈부하는 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거요?”

    가장 먼저 복수를 주장했던 사사도가 반감을 내비치자 일사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빛이 향하자 사사도는 이를 악물며 저항했지만, 곧 안색이 새파래졌다.

    “헉, 허억...!”

    호흡이 가빠지고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무릎을 꿇는다.

    다른 사도들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덩달아 굳어질 때, 일사도가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옛날 절세미남으로 명성을 떨친 반악(潘岳)과 송옥(宋玉)처럼 남녀를 불문하고 찬사를 보낼 아름다운 얼굴은 지독히 무감하다.

    “...오사도의 혼백은 먼저 정토로 떠났을 뿐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오사도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까.”

    교주의 명이 있기 전까진 섣불리 나서지 마라.

    단단히 경고한 일사도가 말했다.

    “사사도, 팔사도. 사흘 내로 출정하라.”

    “아, 알겠소.”

    “...명을 받듭니다.”

    “이사도.”

    “조만간 절강성의 포정사로 자리를 옮길 것 같네.”

    “삼사도.”

    [호광성을 떨어트릴 준비는 끝났다.]

    “육사도.”

    지금껏 대화에 끼지 않았던 육사도.

    안대로 눈을 가린 죽립검객 여인이 공손히 읍하면서 대답했다.

    “남직례성에서 남궁세가의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겠습니다.”

    “칠사도.”

    “난 원래 임무를 수행하면 되겠지.”

    “구사도.”

    “...전 명령받은 게 없는데요?”

    “운남으로 가라. 삼사도가 혈교와 거래하여 인면교룡의 내단을 넘겨줬다. 모산혈조와 맹월림이 대규모의 대법을 준비하고 있으니 잠입해서 정보를 빼내도록.”

    “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교주님의 명이었다.”

    “...그렇군요.”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마교들이 사이 좋게 거래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교주의 명이라면야.

    영물의 내단을 공짜로 주진 않았을 테니 필시 그만한 보답으로 되돌려받았으리라.

    “사도들....”

    수정관을 둘러싼 사도들이 짧게 묵념하고,

    사도들의 수장이 오사도의 머리맡 위에서 선언했다.

    “오사도의 죽음은 보답받을 것이다. 정토가 도래하는 날, 우리는 웃으며 그녀와 재회하리라.”

    * * *

    강엽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해봤지만, 몸은 통나무라도 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령 죽을 만한 부상을 입었더라도 흡혈귀의 재생력이라면 일찌감치 나았을 텐데?

    ‘뭐가 어떻게 된....’

    의문으로 가슴이 요동칠 때였다.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진조.”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냥 듣기만 했는데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그런데 진조라고?

    “무슨 일이냐.”

    강엽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흠칫 굳어졌다.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

    “표정이 안 좋아서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돌린 강엽은 멋쩍게 웃고 있는 여인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백서희나 사천삼미 등 미인들을 많이 만난 그조차 일순간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얇은 이불 속에서 나란히 몸을 눕힌 그녀가 섬세한 어깨선을 드러내며 안긴다.

    보드라운 섬섬옥수가 크고 작은 흉터들을 아로새긴 탄탄한 근육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말해봐요. 난 가루라의 화신이잖아요. 온갖 삿된 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요. 가위 눌린 사람도 제가 기운만 쏴주면 편안한 잠자리가 보장된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난 못 물리치잖나?”

    “당신은 존재 자체가 반칙이고요.”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웃은 강엽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서 바지를 입었다.

    무심코 바라본 거울 안의 사내.

    육 척이 넘긴 해도 거인처럼 크진 않았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넘긴 잘생긴 사내였다.

    기억하고 있는 생김새와 다르긴 해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강엽이 아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진조.’

    그때 여인이 물었다.

    “만약 저랑 당신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절대 평범하지 않겠죠?”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알고 있지 않나.”

    “...혈마.”

    안색이 경직된 걸 넘어 돌처럼 굳어진 그녀가 정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아이를 그런 괴물로 키울 생각은 없어요.”

    “뭐?”

    강엽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인이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며 황급히 얼버무렸다.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나중에!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우리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단 뜻이죠....”

    “나중이라....”

    강엽이 왠지 씁쓸한 어조로 말끝을 흐릴 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나요?”

    “없다.”

    여인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칠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난 이미 질리도록 오래 살았다. 아무리 흡혈귀가 불로불사라도 정신은 마모되지. 내 정신은 영겁의 세월을 감당할 만큼 강인하지 못해. 자아가 무너지면 그땐 완전히 미쳐버릴 거다.”

    “하지만...!”

    “걱정 마라. 너보다 일찍 죽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은 참 잔인한 사람이에요. 당신을 죽일 힘을 나더러 만들어달라니.”

    “그게 계약 아니냐. 심산유곡에 처박힌 나를 바깥세상으로 끄집어낼 때 네가 했던 말인데. 언젠가 내가 죽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여인이 입을 꾹 다물고 베갯머리에 얼굴을 파묻자 강엽은 쓴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모르는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하려니 죽을 맛인데.’

    그렇지만 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꿈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안에 있나?”

    “백무량?”

    두 사람이 빠르게 옷을 입고 문을 열자 냉막한 인상의 흑포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강엽은 사내가 찬 팔찌를 보고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흑룡비환?’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찾았던 보물.

    술법을 담아서 필요할 때 꺼내쓸 수 있는 팔찌가, 백무량이라는 사내의 손목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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