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5화 (225/450)

40화. 삼파 (6)

“그나저나 이건 상정 외의 사태구나.”

뱃속이 빵빵하게 차다 못해 위가 늘어날 만큼 피를 마신 진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엽의 육신을 차지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오사도의 궁격에 강엽이 정신을 잃은 순간, 그 반동으로 그의 의식이 전면에 등장했다.

아무리 흡혈귀라도 몸의 절반이 부서지면 살아남기 힘들다. 미처 흡수하지 못한 선천지기를 남김없이 돌리지 않았다면 잿가루가 되었을 터.

간만에 현세로 나와서 바깥공기를 쐬는 나쁘진 않았지만, 그 자신이 강엽의 몸을 차지하는 게 어떤 반향으로 돌아올지는 진조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면의 심상세계로 돌아가려는 순간.

“끄드득....”

“호오.”

바닥에 드러누운 오사도가 움직였다.

“심맥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온몸의 피까지 전부 빨렸는데... 용케 움직이는군.”

부자연스럽게 사지를 절뚝인 시신이 땅을 짚고 일어나며 원수를 똑바로 쳐다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진조는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오사도의 입이 열렸다.

[이런, 오사도가 죽었나.]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여인의 입으로 그러한 목소리를 내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진조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강엽의 육신을 차지했듯 오사도의 육신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

“네가 광명마교주라는 아해냐?”

[...아해?]

퍽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광명마교주가 돌연 입가를 올렸다.

[특이하군. 고작 삼화취정에 올랐을 뿐인데 느껴지는 힘은 그 이상이야. 게다가 영혼백육이 묘하게 일치하지 않는 게... 괴뢰마와 비슷한 부류인가?]

진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강엽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안목.

단순히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찮은 재주로 천리를 우롱하는 놈이구나.”

[피차 마찬가지 같은데.]

화아아악!

오사도의 체내에서 눈부신 휘광이 쏟아지며 그 육신의 형상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귀신처럼 반투명한 빛깔을 유지하는 사내.

마교의 주인답지 않게 부드러운 눈매와 선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새하얀 장삼을 펄럭였다.

“사도의 육신을 그릇 삼아 현신하는 건 오랜만이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전보다 한층 정갈해진 목소리.

진조가 헛웃음을 흘렸다.

“원영신(元嬰神)인가.”

원영신. 위대한 존재가 자신의 기를 다른 곳에 투사하여 만들어내는 분신이었다.

단순히 기예나 무학으로는 치부할 수 없는, 권능이라 칭해야 할 지고한 경지.

뒷짐을 진 광명마교주가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의 심맥이 가닥가닥 끊겼군. 그대가 무슨 수법으로 이 아이를 죽였는지 알겠어.”

“그래서 복수라도 할 셈이냐?”

“못하리라 보나?”

“허세 하난 일품이구나. 원영신이라 하나 죽은 이의 몸에 강제로 덮어씌운 분신이 아니더냐. 그런 게 얼마나 오래갈까.”

“....”

광명마교주는 대답하는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면서 절벽 아래를 굽어보았다.

“괴뢰마... 아니, 칠사도가 화산의 검을 압박하고 있구나. 좀 더 먼 곳에선 또다른 싸움이 일어났고.”

여기선 보이지도 않는 싸움을, 바로 앞에서 견문하는 것처럼 감평하는 광명마교주의 모습.

그는 바로 앞에 사도를 죽인 강적을 두고도 뒷짐을 진 자세로 음울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역천이 도래할 것이다. 그대도 천기를 볼 줄 안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선문답을 즐기느냐?”

“운명의 세 별이 움직였다. 하나는 본좌의 별이고, 다른 하나는 혈교의 별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을 지음받고도 빛나지 못했었다. 얼마 전까진 그랬지.”

“.......”

“일월마교의 별인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그대의 별이로구나. 밤하늘을 베어무는 흉성.”

“흐흐, 자신하느냐?”

“음?”

“저 별이 짐의 것이냐고 자신하느냐고 물었다.”

밤하늘을 힐끔거리는 진조의 얼굴.

그 입가에 만연한 비웃음을 본 광명마교주의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대가 아니라면 그 육신의 주인인가?”

“글쎄, 실제로는 어떤지 모를 일이지.”

“혈교에 납치되고 괴물이 된 유생. 살아남아서 그만큼 강해진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그것만으로 본좌와 같은 운명을 나눌 수는 없다.”

“으음....”

“하하, 놀랄 것 없다. 본좌 앞에서 과거를 숨기는 건 아무 의미도 없으니.”

“상단전을 동조시켜 기억을 엿봤겠지.”

“....”

“큭큭, 뭘 놀라느냐? 짐이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여겼느냐? 이 육신의 기억을 엿봐서 짐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었겠지.”

“...그대는 정녕 경이로운 존재다.”

한 줌의 과장도 없는 솔직한 태도. 광명마교주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얼굴로 말했다.

“그대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건 본교의 문헌을 봐서 알고 있었다. 본교의 시조와 함께 이 땅의 사마를 멸한 존재. 마귀로 태어났되 마귀를 적대한 자.”

“.......”

“팔부중(八部衆)의 아수라. 가루라의 화신께서 불사의 마신(魔神)이라 칭했던 옛 망령.”

“.......”

“그대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나면 화신께 자신을 죽여달라는 약속을 받아냈지. 하지만....”

“그만.”

손을 들자 대기가 울렁거렸다.

그 흔들림에서 거력을 감지한 광명마교주가 입을 다물었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본교는 대를 이어 불사의 존재를 멸할 방법을 찾았다. 이건 그대를 죽이기 위해 창안한 힘이지.”

우우우우웅!

별안간 장삼의 소매 너머로 뻗는 손아귀에서 떠오른 환한 강구가 어두컴컴한 사위를 물리친다.

흡사 작은 태양이 현신한 듯한 존재감에 진조가 눈을 가늘게 뜨는 찰나.

주먹을 움켜쥐어 강구를 거두어들인 광명마교주가 다시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무어라?”

“대계가 발동하면 이 땅의 사마외도는 절멸하고, 천하 만민은 꿈 속의 정토에서 영원한 안녕과 복락을 누릴 터. 그대와 화신께서 꿈꾸었던 세상이 도래하는 건 물론이고, 그대 또한 소원을 이루겠지.”

“꿈 속의 정토라고...?”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곱씹은 진조를 보면서 작게 웃은 광명마교주가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미안하지만 이 아이의 몸에 남아있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린 광명마교주는 다시 찬란한 휘광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가 현신의 그릇으로 쓴 오사도의 시신과 함께.

“꿈 속의 정토라....”

다시 한번 광명마교주의 말을 입 안에서 굴린 진조가 눈매를 찌푸렸다.

“잡것들이 미친 짓을 꿈꾸는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래는 강엽에게 바로 몸을 돌려주려고 했으나, 광명마교주를 만난 영향 때문인지 강엽의 의식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했다.

깨우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흠?”

막 한 걸음을 내딛으려던 진조는 이쪽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기척을 감지하고 이채를 띠었다.

“아, 흑룡교의 아해인가?”

오사도의 궁격을 맞은 폐허에 온 연가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강엽과 옥청선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뒷북을 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저런 놈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사방을 이잡듯이 뒤지는 연가휘를 향해 한 걸음 걸어간 진조가 어둠 속으로 접어들어갔다.

* * *

‘쉽지 않구나.’

옥청선자는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를 괴뢰마라 주장하는 마인 집단.

그 말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나, 이들의 차륜전은 기관진식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렸다.

수십 명 전원이 절정고수인 데다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들도 심심찮게 포진한 상황.

아무리 벽을 넘은 초절정의 고수라 해도 이만한 전력이 합을 맞춘다면 고전할 수밖에.

어쩌면 이들 전부를 전멸시켜도 괴뢰마를 진정한 의미에서 죽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검을 튕겨냈을 때, 등 뒤에서 기습적으로 부격과 창격이 쏟아졌다.

쉬아악!

암향표의 보법을 밟아 매끄럽게 피했으나 반 숨 가량의 호흡이 뒤쳐졌다.

창을 쓰는 괴뢰마가 도발했다.

“움직임에 잡념이 섞였군. 슬슬 몸이 무거워지나?”

“내가 할 말인걸.”

살짝 땀이 맺힌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넘긴 그녀가 넉넉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분홍색 소매 자락이 잔영을 그리는 순간, 도발을 일삼은 창수의 미간에 붉은색 혈화가 피어났다.

눈을 까뒤집은 채 쿵 쓰러진 창수를 곁눈질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당신이야말로 언동에 다급함이 섞였는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거 아닌가?”

“.......”

괴뢰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그가 곤혹스러워한다는 증거.

옥청선자에게 한 도발과는 달리 그야말로 다른 곳을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저쪽의 일이 엇나간 모양이지?”

무턱대고 찔러보는 의혹이 아닌 굳건한 확신.

괴뢰마는 그 확신을 불식시키듯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녀는 미세하게 헐거워진 틈을 발견하고 엇박자로 검격을 찔러 합격진에 구멍을 만들었다.

쐐액! 서걱!

또 한 명의 목이 허무하게 날아갔다.

합격진의 방위를 점한 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감에 따라 그녀가 무공을 펼칠 공간 역시 넓어졌고,

협소한 공간 탓에 삼재검처럼 간결했던 초식이 발아한 씨앗처럼 쭉 뻗더니, 이내 다양한 투로를 그리는 매화검이 되어 적들의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물흐르듯 순식간에 변화하는 매화검의 의념을 느낀 괴뢰마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봤자 변하는 건 없다.”

오사도에게 붙여둔 단말이 갑작스레 끊긴 상태.

그렇기에 저쪽의 상황을 알 수 없으나, 오사도의 절기가 작렬한 이상 전황이 변하진 않을 것이다.

설령 호신강기를 전력으로 펼쳤다 해도 주변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열기를 버텨낼 리는....

콰아아아아아앙-!

“뭐냐?”

불현듯 외곽에서 터진 굉음에 괴뢰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했다.

마치 땅바닥에 묻어둔 벽력탄이 갑자기 터지는 것처럼 아무 전조도 없이 터져나온 굉음.

하지만 그 안에서 어둡고 끈적끈적한 살의를 감지한 괴뢰마가 저도 모르게 멈칫하면서, 옥청선자에게 가했던 합격진까지 자연히 중단되었다.

옥청선자 역시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부지불식간에 난입한 불청객을 관찰했다.

“...귀영?”

넝마주이나 다름없는 헝겊을 걸치고 온몸에 그을음이 묻은 추레한 몰골.

오연하게 선 강엽은 전장을 쭉 둘러보다, 옥청선자와 말을 섞은 괴뢰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무감정한 눈동자. 바닥이 보이지 않은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 괴뢰마는 알 수 없는 한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흐음, 자신의 혼백을 쪼개서 다른 이의 상단전에 이식했는가. 기생충 같은 놈이로다.”

“.......”

괴뢰마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강엽은 이미 답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혼백을 씨앗으로 삼아 자신의 의식을 역병처럼 퍼뜨렸겠지. 하지만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는 법. 그런 식으로 혼백을 쪼개면 종국에 네놈 자신이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텐데.”

“...상관없다.”

잔뜩 억눌린 듯한 음성.

이제까지 침착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괴뢰마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 자신을 버리더라도, 나를 이루는 것은 그대로 남아 영원히 전해질 테니까.”

“크하하핫!”

목젖이 보일 만큼 웃은 강엽이 손뼉을 쳤다.

“그래, 고래로 수많은 사마외도들이 자신만의 광기를 추구했었지. 네놈도 훌륭한 사마외도로구나.”

“...넌 누구냐? 정말 귀영이 맞나? 아까 봤던 분위기와는 딴판인데?”

“네놈은 알 자격이 없도다.”

웃음을 그친 강엽이 옆을 슬쩍 돌아봤다.

“이쯤 했으면 밥값은 알아서 할 거라고 믿는다. 이 몸은 바빠서 급히 가봐야겠구나.”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연가휘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머무르는 마을이 습격당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강엽이 하는 말에 토를 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귀영, 네놈이 여기 나타났다는 건 오사도가...!”

뒤에서 외친 괴뢰마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강엽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러자 괴뢰마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듯 퍽 터지며 그 안에 든 신선한 내용물을 게워냈다.

“탄지신공(彈指神功)...?”

소림칠십이종절예의 하나.

옥청선자는 산산조각 박살난 괴뢰마의 모습에서 소림의 신공을 떠올린 듯했지만, 질문할 새도 없이 강엽이 또다른 수를 이어갔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자성검이 저 스스로 떠오르면서 극광(極光)의 궤적을 그렸던 것.

퍼퍼퍼퍼퍼퍽!

십수 명의 목을 일거에 참하는 이기어검의 한 수.

옥청선자마저 경악으로 굳어진 채 입을 멍하니 벌릴 때 강엽이 자성검 위에 올라섰다.

검 위에서 근엄하게 뒷짐을 진 그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우둔한 죄인들이여.”

약간 쉰 듯한 중성적인 목소리.

깊은 내공 호흡이 섞여나온 목소리는 같잖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경고하지 않았느냐. 부질없다고 말이다.”

마치 얼음을 조각한 듯 푸른 가면을 쓴 장신의 여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얼음칼날에 베이거나 관통당해서 쓰러진 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쿨럭! 이 마구니가...!”

흑곤을 쥔 채 한쪽 무릎을 꿇은 야차마곤이 연신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청면을 노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엔 소창후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당묘정도 벌겋게 물든 어깻죽지를 잡은 채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싸우는 자들은 단 세 명.

“닥쳐, 이년아!”

백서희가 하나만 남은 검을 휘두르고, 하후진이 등 뒤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내며 압박한다.

청수 역시 입 안 가득 단내를 풍기면서도 어떻게든 두 사람과 함께 삼면에서 포위망을 형성했다.

품(品) 자로 둘러싸인 형국이었지만, 청면은 가소롭다는 듯 흥 코웃음을 치기만 했다.

“하룻강아지 같은 것들이....”

중단전을 개방한 세 사람은 다른 이들과 달리 조금 더 오래 버티고 있었다. 혼자서는 삼초지적도 안 되지만 손발을 맞추면서 서로의 약점을 메꿔준 것.

하지만 그도 한계가 있었다.

“격공에 대응하는 건 칭찬해주마. 평소에 격공을 많이 겪어본 듯해.”

청면의 말대로 세 사람은 격공을 많이 겪어봤다.

하후진과 청수는 사부로부터, 백서희는 강엽이 삼화취정에 오른 뒤부터 짬짬이 대련하며 격공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맞받이치는 건 불가능해도 조금씩 전조를 읽고 피하거나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쩌어엉!

청면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따라 차가운 한빙지기가 일어나며 하후진의 염도를 상쇄했다.

충격파와 함께 허연 수증기가 안개처럼 일어나는 가운데, 청면의 좌수가 불가사의하게 움직였다.

그녀와 손바닥을 맞댄 청수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무당 면장. 나도 많이 써먹는 장법이지.”

혈음마군에게 배웠지만 청수가 그 사실을 알 리 만무.

심한 정신적 충격 속에서 머리가 텅 빈 가운데, 청면이 가면 아래의 입꼬리를 올리면서 태극의 심상이 녹아든 기류로 청수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넌 명줄을 붙여두마. 교왕께서 네놈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마지막으로 백서희의 검을 청색 검날로 튕겨낸 뒤 채찍처럼 날린 족격으로 그녀를 걷어찼다.

뼛속 깊이 파고든 암경을 맞고 삼 장이나 구른 백서희가 피를 울컥 토해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혈귀 쌍년.”

“천박한 계집, 입에 걸레를 물었구나. 너도 특별히 살려주마. 간만에 교도들에게 몸보시를 시켜야겠어.”

“퉤, 지랄하고 자빠졌네.”

피 섞인 침을 뱉으면서 몸을 일으킨다.

기혈이 들끓고 근육이 상해 사지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허세를 부리며 씩 웃었다.

“그전에 네가 먼저 뒈질 거야.”

“그 귀영이라는 놈과 옥청선자를 믿는 거라면 그만두거라. 교왕께서 그 연놈들을 징치하러 가셨으니.”

백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을 쥐어짜는 것도 고통스러워서 목소리를 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먼저 죽는다면 복수는 해주겠지?’

강엽이라면 살아남을 거라 믿는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막상 죽음이 다가오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해졌다.

‘괜찮아. 각오했던 일이잖아. 그래도 마지막에 후회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거면 된 거야.’

무인은 죽음을 벗하며 살아가는 존재.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겨울날의 맑은 호수처럼 고요해진 마음.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합공했을 때보다 기감은 더 선명해져서, 이쪽을 노리는 격공의 궤적을 알 것 같았다.

상체를 흔들어 피하고,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출해서 다시 한번 피하면서 접근한다.

“이 하찮은 계집이...?”

안색이 변한 청면이 시퍼런 강기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 백서희를 치려고 할 때였다.

“이야아아아아아아!”

들으란 듯이 기합을 토한 하후진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염도를 휘둘렀다.

“지긋지긋한 놈들 같으니!”

노성을 토한 청면의 전신에서 싸늘한 한빙지기가 눈보라처럼 폭출되며 두 사람을 날려버렸다.

그나마 하후진은 열양지기로 버텼지만, 백서희는 온몸에 달라붙은 서리에 새파랗게 질렸다.

“적당히 놀아주는 걸로 이제 끝이다. 한꺼번에 삼도천 너머로 보내주...!”

청면이 호기롭게 외치는 그 순간.

하늘에서 날아온 길쭉한 그림자가 그녀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갈라버렸다.

“커허...!”

미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뜬 그녀는 갈라진 가면과 함께 속에 든 것들을 쏟아내며 절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질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작 이런 것에게 고전하다니. 사문을 나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삼화취정에 못 올랐나.”

“당신은...!”

백서희가 깜짝 놀라 외쳤다.

온몸을 파고든 한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고역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고통마저 잊었다.

지난날 암시장의 경매장에서 봤던 오만한 사내.

그가 청면을 일도양단한 칼날의 자루 위에 올라와서 하후진을 오시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그를 바라본 하후진이 중얼거렸다.

“...사부.”

“나눌 말이 제법 많은 것 같지만 나중으로 미뤄두자. 지금은 더 중한 일이 있으니까.”

긴 장발을 흩날린 염왕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인영.

강엽의 거죽을 뒤집어쓴 진조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입매를 비틀면서 짧게 내뱉었다.

“운명의 세 별. 어디 진짜인지 시험해주마.”

발치에 놓인 칼자루를 회수하지도 않고 손으로 허공을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심상절예(心想絶藝) 일식(一式).

마음으로 연마한 칼날이 현현하고,

-일도무겁살(一刀無劫殺).

염왕의 심도가 수천 년을 살아온 불사의 괴물을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