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3화 (223/450)

40화. 삼파 (4)

“운수도 참 사납지!”

오사도가 구시렁거리면서 소리치는 말에 강엽도 내심 십분 동감했다.

‘정말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산적들을 쫓는 일이 광명마교의 사도와 조우하고, 혈교의 교왕과 싸우는 일로 바뀌고 있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죽도록 싸웠던 오사도와 손을 잡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강엽도 이 어이없는 사태에 실소가 나왔다.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히 투로를 그린다.

쩡! 쩡! 쩌어엉!

두 병장기가 맞물릴 때마다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내공이 약한 사람이라면 피를 토하고 나뒹굴었을 막강한 공력 파동.

두 사람은 충격파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리면서 숨 쉴 틈 없는 공방을 이어갔다.

붉은 공력이 시뻘건 불꽃처럼 튈 때마다 대기가 우르릉 진동하고 흙먼지가 갈라졌다. 구름 속에서 용과 호랑이가 다투는 것처럼 막상막하의 싸움.

여기에 오사도까지 가세하자 혈음마군의 손발은 두 배로 바빠졌다. 양 옆에서 퍼붓는 맹공을 피하고 흘리며 쌍혈륜을 휘둘렀다. 네 자루의 병장기가 폭풍같은 경파를 뿌리고 불꽃과 굉음을 내뿜었다.

검과 궁, 혈륜이 부딪치면서 세 사람의 공방은 순식간에 삼백여 초를 넘어섰다.

수풀과 나무 밑동만 남았던 개활지는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

혈음마군이 무심하게 말했다.

“둘 다 신병을 쓰는군.”

어지간한 병장기는 혈음마군의 경력을 머금은 진마혈륜을 당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강엽의 자성검은 말할 것도 없고, 오사도의 각궁 역시 진마혈륜과 부딪치는데도 멀쩡했다.

그런데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호흡이 안 맞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나. 나와 싸우면서 상대를 신경 쓰고 있군.”

“...!”

혈음마군의 말이 맞다.

손발을 맞춘 경험이 없기도 하거니와 서로를 믿지 못하기에 조금씩 틈이 발생하고 있었다.

혈음마군 같은 절세고수가 그 틈을 이용하지 못할 리 만무. 바늘구멍만한 틈이라도 그가 포착하면 구중궁궐의 대문마냥 커다란 약점이 된다.

쉬쉬쉭!

오사도의 각궁을 비스듬히 받아낸 혈음마군의 손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였다.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했는지 모를 움직임으로 관절을 비틀고는 격공장을 날렸다.

뻐엉!

투아앙!

오사도도 순순히 당해주진 않았다. 똑같이 격공으로 맞서며 삼 장씩 쭉 밀려났다.

얼핏 보면 혈음마군의 시도가 실패한 것 같은 양상.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쿨럭!”

혈음마군을 진득히 노려보다 검붉은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해버린 오사도의 모습.

격공장은 막았지만, 혈음마군이 이기어륜으로 각궁을 쳐내면서 벼락처럼 암습을 가한 것이다.

“젠장, 어검술을 쓰는 자는 손이 세 개라더니....”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복부엔 붉은 손자국이 보란 듯이 찍혀 있었다. 교위급 이상의 혈교도라면 개나 소나 익힌다는 혈수인의 흔적.

하지만 교왕의 무공이 잡배들의 무공과 똑같을 리 없다. 혈음마군의 혈수인은 주인의 경지에 맞춰 발전을 거듭해 신공의 격에 도달했다.

“나는 네 개지. 옥청선자까지 합류한다면 몰라도, 너희들 둘만으로는 날 어쩌지 못한다.”

무덤덤하게 대답한 혈음마군은 그때부터 쌍혈륜을 어륜술로 조종하면서 싸웠다.

무당파가 배출한 최고의 기재였다고 하더니 어륜술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애송이, 조심해라. 목어검(目馭劍)의 경지다!]

어검술에도 경지가 있다.

손짓으로 조종하는 수어검이 가장 낮고, 그다음이 눈으로 조종하는 목어검이며, 마음만으로 검을 조종하는 심어검의 경지가 마지막 삼단계다.

생전의 유이강은 수어검이었다. 그보다 한참 젊은 혈음마군이 유이강보다 높은 경지에 오른 것.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겠지.’

청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턱에 강엽은 무당에 어떤 절학들이 있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사문의 무공인 만큼 청수도 가급적 말을 삼갔으나, 세간에 알려진 정도는 흔쾌히 말해주었기 때문.

무당의 무맥엔 태극의 음양을 기반으로 탄생한 심공이 존재한다.

-양의심공(兩儀心功).

수많은 무재들을 배출한 무당파에서도 제대로 익힌 이가 손에 꼽힌다는 절세신공.

태극이 음과 양으로 나뉘듯이 자신의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서로 다른 무공을 구사한다고 하던가.

본래는 서로 다른 이종의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익히는 무공인데, 혈음마군은 쌍혈륜을 조종하는 데 양의심공의 공능을 할애한 듯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세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굉음이 터졌다.

분명히 이 대 일로 협공을 퍼붓는데도 강엽은 마치 자신이 협공당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혈음마군이 조종하는 혈륜을 튕겨내고, 그의 우장과 부딪치며 서로를 밀어냈다.

‘그나마 격공은 쓰지 않는군.’

이기어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지 혈음마군은 어느 순간부터 격공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엽이 격공을 써서 재미를 보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격공을 쓰는 족족 혈음마군을 둘러싼 투명한 장벽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대부분은 지면이나 암벽을 부쉈지만, 일부는 오사도에게 튀어 공격의 맥을 끊었다.

오사도의 격공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썅, 제대로 싸우지 못해!?”

“내가 할 말이다. 아군이 된 적은 높은 확률로 무능해진다고 하더니 당신이 딱 그 꼴이군.”

백서희가 강호 격언이라면서 들먹일 때마다 속으로는 저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후우, 실제로 그런 꼴을 겪고 있으니....’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강엽의 모습에 오사도의 이마에 핏줄이 삐죽 튀어나왔다.

하지만 강엽의 폭언은 끝나지 않았다.

“호사가들이 이르기를 광명마교의 사도와 혈교의 교왕이 대등하다고 하던데, 오늘 견문을 넓히고 보니 그 말이 헛소리임을 알겠군.”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놈이 감히!”

“아니면 댁만 무능한 건가?”

“....”

“당신 말대로 난 애송이니까 그렇다 치고, 여기선 당신이 강호 선배의 도리로 좀 더 힘을 내는 게 맞지 않나? 아니면 혈음마군을 쓰러트린 뒤에 내가 당신을 죽일까 봐 무서워서 힘을 숨기는 건가?”

“하....”

하는 말마다 얄밉기 그지없다.

새삼 깊은 빡침을 느낀 오사도가 이를 갈았다.

[오냐, 사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마. 대신 기회를 제대로 만들어 봐라.]

그러고는 대답도 안 듣고 휙 가버렸다.

날아오는 혈륜을 피하면서 순식간에 멀어지는 모습에 혈음마군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적당히 긁지 그랬나?”

오사도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졌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남은 혈륜을 불러들였다.

공력을 많이 잡아먹는 이기어륜을 이어가는 대신 양손에 혈륜을 쥐고 휘두른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지.”

강엽을 죽이고, 오사도를 쫓아서 격살한다. 옥청선자가 살아있다면 역시 쫓아가서 죽인다.

얼음장같은 살기를 뿜어내며 쌍혈륜을 휘두르는 혈음마군의 신위에 강엽은 수세에 몰렸다.

간간이 반격했던 이전과 달리 근근이 버티는 형국.

그럼에도 눈빛에 절망은 보이지 않는다.

“뭐냐? 그 계집이 다시 돌아와서 널 도와주기라도 할 것 같나?”

“글쎄....”

오사도의 진심이 어떤지는 강엽도 모른다.

그녀가 말한 대로 사도의 위엄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정말 내뺐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계속 싸워보니 알 것 같아.’

짧은 시간 나눈 수백여 합의 공방.

단순히 버티기 위해서만 싸운 게 아니다.

어떻게든 한 방 먹이기 위해서 기감을 곤두세우고 놈의 체내 진기를 초음으로 관찰했다.

쾅!

장력으로 혈륜을 튕겨내고 진각을 밟는다.

땅이 흔들리면서 혈목이 치솟자 혈음마군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혈목을 다룬다고?”

흡혈귀의 근원이 진조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하면 네놈도 신녀와 같은....”

혈음마군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뻐어엉!

득달같이 달려든 강엽이 일권을 때려박은 것.

막강한 경력이 깃들었으나 이화접목의 수로 투로를 틀어버리는 호신강기를 뚫을 수는 없었다.

“어리석은 짓이다.”

삐딱하게 떠오른 비웃음.

하나 그 비웃음은 강엽의 일권을 중심으로 올올이 풀려나온 기파의 움직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네놈?”

“무당의 파문제자라고 했었지.”

사문을 박차고 나간 자가 어떤 이유로 이런 호신강기를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호신강기가 태극의 심상을 품었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부터, 강엽은 혈음마군의 호신강기를 파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혈음마군을 둘러싼 기파의 흐름을 역으로 맞추는 역태극의 경파.

흐름, 속도, 박자, 호흡.

그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맞물리자 혈음마군의 호신강기가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감각이군. 검선(劍仙)이나 무당제일검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순 없을진대.”

혈음마군이 굳은 얼굴로 신음했다.

설사 똑같은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웬만한 감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공력의 흐름을 손금 보듯 읽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더 말이 안 되는 건 그 모든 흐름을 단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역방향으로 뒤집어야 한다는 거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오히려 호신강기의 흐름에 잡아먹혀 전신이 찢겨나갈 터.

비유하자면 용오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옆에 방향만 다른 또다른 용오름을 만들어, 단 한 줌의 오차도 없이 상쇄해야 한다.

말로는 쉬워도 한없이 불가능한 일.

그걸 현실로 이룬 시점에서 태극에 대한 강엽의 이해는 무당제일검에 필적한다고 봐야 하리라.

콰콰콰콰콰콰콰......!

쉴 새 없이 호신강기를 깎아내리는 역태극의 기파.

혈음마군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대체 넌 뭐냐?”

* * *

“저런 수를 숨겨두고 있었나?”

고지대에 올라간 오사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제일의 궁사답게 초월적인 안력을 지닌 그녀다. 매의 눈처럼 까마득한 아래도 살필 수 있는 수준.

덕분에 강엽과 혈음마군이 어떻게 싸우는지도 소상히 살펴보고 있었다.

‘설마 호신강기를 깎아내다니....’

만약 혈음마군이 다른 호신강기를 익혔다면 감히 시도하지 못할 짓거리였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오사도로서는 강엽이 하는 짓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뭐, 좋아. 어쨌든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아래를 살피면서 시위를 잰다.

강엽과 싸울 땐 한 번도 꺼내지 않은 화살로, 표면에 붉은빛이 도는 흑철시였다.

화살촉도 주걱처럼 넓적한 모양이다.

보통 이런 화살을 쏘는 건 몇 배로 힘들다.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앞으로 쏠려 있기 때문. 물론 삼화취정을 이룬 오사도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덕분에 둘 다 죽일 수 있게 됐군.”

무저갱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싸늘한 기운을 쏟아내는 것과 동시에.

꾸아아아앙!

천지를 찢어발기는 궁격이 반쯤 깎여나간 호신강기를 뚫고 등짝을 관통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면을 강타하며, 십 장이 넘는 화염의 포말을 일으켰다.

-폭염무간시(暴炎無間矢).

그녀가 익힌 절대비기다. 일찍이 강엽과 싸울 때 썼던 폭예작염기와 더불어 무맥이 오의로 삼은 절기.

쿠우우우우우웅......!

천지사방에 퍼져나가는 충격파. 일대를 달구는 시커먼 불꽃구름의 열기에 그녀가 희열에 차서 외쳤다.

“하하! 역시 폭발은 예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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