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2화 (222/450)
  • 40화. 삼파 (3)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오사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안 그래도 까다로운 적을 만났는데 혈교의 교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어깃장을 놓다니?

    촤아아아아아아악-!

    숲 전체를 가로지르는 핏빛의 궤적.

    수십 그루의 거목을 일격에 잘라버린 궤적은 유려하게 한 바퀴 돌면서 혈음마군의 손에 돌아갔다.

    쿠르르르르르르릉......!

    한 박자 늦게 거목들이 쓰러지며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하늘을 가린 숲이 공백이 되면서, 별이 쏟아질 듯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이 훤히 드러난다.

    ‘괴물이군.’

    강엽의 표정도 오사도처럼 구겨졌다.

    진조나 흑룡교주의 혼백은 예외로 두고, 지금까지 만난 가장 강한 고수는 단연 유이강이었다.

    비록 신녀에게 패하기는 했으나, 그건 흡혈귀 특유의 재생력 때문이었을 뿐.

    무공의 고하만 논한다면 어검술을 터득한 유이강이 신녀보다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겠지.

    팔대교왕의 일좌인 혈음마군은 그런 유이강이 연상될 정도로 압도적인 절세고수였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죄다 치웠다. 이제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

    “그리고 광명마교의 사도.”

    혈음마군이 지목하자 오사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도씩이나 되는 자가 도망치진 않을 거라 믿는다. 명색이 교주 다음가는 존귀한 자리 아닌가?”

    “흥, 누가 도망친다고....”

    울컥해서 되받아친 그녀는 문득 옆에서 고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괴뢰마를 발견하고 얼이 빠졌다.

    “...아니, 잠깐. 당신 그 얼굴은 뭐야?”

    “음, 생각해보니 합리적인 말이어서. 굳이 여기서 아득바득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걸 말이라고... 이교의 죄인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겠다는 건가?”

    “변수가 많다. 혈음마군뿐만 아니라 옥청선자와 저 귀영이라는 자도 조심해야지. 아니면 저들과 손을 잡고 혈음마군을 칠 건가?”

    “...제정신인가?”

    오사도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뜨악했다.

    외부인이라고 하나 명색이 사도에 임명된 자가 이교의 죄인들과 손을 잡자는 말을 하다니?

    “전술적으로는 합리적이다. 오월동주라고 하지 않나. 설령 다시 싸우더라도 가장 위협적인 적을 죽여야지. 혈교가 저들의 동료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가 손을 내밀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맙소사.”

    신앙은 합리와 거리가 멀다. 이성은 괴뢰마의 제안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교의 죄인을 뼛속 깊이 배척하는 광명마교의 사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면 도망치던가.”

    “...젠장.”

    아무리 봐도 이 괴뢰마라는 녀석은 함량 미달이다. 무공은 어떤지 몰라도 자세가 글러먹지 않았나.

    그때 강엽이 말했다.

    “받아들이지.”

    “자네?”

    광명마교는 백도 정파의 기둥인 궁검을 참살하고 수많은 백도 문파들을 무너뜨린 악의 축이었다.

    그런 광명마교와 손을 잡겠다니....

    “괴뢰마의 말이 맞습니다.”

    그들에겐 시간이 없었다.

    미적대고 있다간 일행과 숙정방, 흑룡교는 물론 화산파의 제자들이 전멸할지도 모르는 일.

    잠시 광명마교 쪽으로 시선을 준 옥청선자가 전음을 보냈다.

    [저들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나?]

    [당연히 칠 겁니다.]

    손을 잡는다고 해도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신뢰하진 않는다.

    특히 괴뢰마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죽이고 죽여도 계속 나타나는 존재. 그게 엉뚱한 자들이 사칭한 게 아니라면....’

    뇌리를 스쳐지나간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혈음마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삼화취정의 고수 셋과 그에 준하는 마인을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혈교의 왕.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보내고, 강엽과 옥청선자를 노리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이 기회에 잡겠다고 했다. 살기를 숨기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강엽과 옥청선자보다 그쪽을 더 신경 쓰는 눈치였다.

    ‘대계. 혈교는 혈마를 부활시키기 전에 광명마교가 먼저 대계를 이룰까 봐 걱정하고 있었지.’

    광명마교의 대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혈음마군은 사도들을 잡으면 광명마교의 대계에 지장이 간다고 여긴 것이겠지.

    네 사람을 한꺼번에 잡을 자신이 있으니 그런 선택을 내렸을 터.

    휘유우우우우웅... 콰앙!

    저편에서 날아오는 거구.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거구가 혈음마군의 옆에 착지하며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건장한 신장을 지닌 붉은 가면의 사내.

    “홍면(紅面).”

    “쥐새끼를 잡아왔습니다.”

    옆구리에 낀 사내를 툭 내던진다.

    정신을 잃은 혈산광호였다.

    “이놈은 뭐냐?”

    “정체를 알 순 없으나 빛쟁이놈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빛쟁이놈들이 말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놈들을 전부 죽이고 이자만 데려왔습니다.”

    빛쟁이는 광명마교를 부르는 멸칭이었다.

    순결하치만치 하얀 도복 위에 그들의 상징인 금색 태양을 새겨넣은 것을 비꼬는 의미.

    “이 혈귀 새끼들이 감히...!”

    그들의 대화를 들은 오사도가 눈에 실핏줄이 돋을 만큼 분개했으나, 괴뢰마가 말렸다.

    강엽은 홍면이라 불린 사내를 보고 침음했다.

    ‘교성....’

    정기신이 하나로 이어졌다. 오사도나 혈음마군에 비할 바는 아니나 삼화취정을 이룬 강자.

    홍면이 이어서 보고했다.

    “그리고... 신녀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음?”

    홍면이 바친 무언가를 받아든 혈음마군의 표정이 괴이쩍게 변했다.

    그것은 혈목의 파편이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신녀를 따르는 영수가 어찌 이런 곳에...?”

    혈음마군이 오사도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강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혈목을 불러낸 건 다름 아닌 강엽이 아니었던가?

    “흐음, 싸워보면 알 수 있겠지.”

    “마군이시여, 감히 청컨대 속하가 화산의 계집을 맡고 싶습니다.”

    “은원이 있나?”

    “스승께서 화산파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청홍일마(靑紅一魔)가 소싯적의 검성에게 죽었군.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 청면도 데려올 걸 그랬나?”

    청홍쌍면마(靑紅雙面魔)는 혈음마군을 따르는 교성.

    그중 청면은 혈음마군의 명령으로 병력을 이끌고 마을에 있는 호송단을 제압하러 갔다.

    잠시 생각해본 혈음마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홍면이 감사의 의미로 공수의 예를 올렸다.

    이후 그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콰아앙......!

    지척에서 작렬한 열양지기가 폭발하듯 옥청선자의 전신을 덮쳤다.

    매화검의 기파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지만,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는 주변의 수풀을 태우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옥청선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청홍일마의 후신이라고?”

    “네년의 사부가 우리의 스승을 죽였지. 네가 죽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나?”

    제자의 부고를 들은 사부의 심정이 어떠할까.

    얼굴에 뒤집어쓴 붉은 귀신의 가면 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거칠게 터져나간 열기가 옥청선자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 기세를 역으로 이용해 멀리 떨어진 옥청선자가 쓴웃음이 섞인 전음을 날렸다.

    [이자는 내가 맡겠네. 금방 합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혈라분을 조심하십시오.]

    홍면이라는 자의 실력으로는 옥청선자를 감당할 수 없으나, 혈라분을 복용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

    그러나 홍면이 입 안에서 무언가를 삼키는 시늉을 하더니 곧이어 폭발적인 존재감을 발하며 멀리 날아간 옥청선자를 추격했다.

    ‘...어금니에 박아두고 있었나?’

    아마 혈라분을 단환으로 굳힌 뒤 어금니 사이에 박아뒀다가 필요한 순간에 깨문 것이리라.

    그렇게 두 사람이 전장을 이탈하자 혈음마군이 어깨를 으쓱이며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제 세 놈이 남았군. 말은 충분히 나눈 것 같으니 시작해볼까?”

    “그 입을 꿰뚫어주마.”

    살벌하게 응수한 오사도가 혈음마군을 향해 세 발의 철시를 쏘았다.

    모든 동작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달인의 솜씨.

    머리와 가슴, 하복부의 삼단전을 차례로 노렸으나, 화살은 혈음마군에 닿기도 전에 터져나갔다.

    기이이이이이이잉......!

    일순 대기가 왜곡된 것처럼 보일 만큼 일그러진 압력이 화살을 터뜨려버린 것.

    “작염마궁의 명성은 나도 들어봤지. 명실상부 천하제일의 궁사. 하지만 그 정도 화살로는 내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다.”

    직후 혈음마군이 사라졌다.

    섬뜩함을 느낀 오사도가 몸을 돌렸을 땐 이미 혈륜이 그녀를 향해 짓쳐들고 있는 상황.

    그러나 혈륜의 칼날은 오사도의 그림자만 베는 데 그쳤다. 직후 강기를 담은 화살이 혈음마군의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꾸와아아앙!

    마치 절간의 범종이 울려 퍼지는 듯한 굉음.

    육중한 궁격이 혈음마군을 단단히 보호한 장벽을 때리면서 그의 몸뚱이를 뒤로 밀어버렸다.

    그때 강엽이 혈음마군의 배후를 노렸다.

    ‘지금은 녀석들을 믿을 수밖에.’

    마음 같아서는 혈음마군과 오사도가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 그리할 경우 혈음마군이 자신을 쫓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처리하는 걸 중시해도, 강엽이 떠나면 부하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동료들이 잘 싸워주기를 믿으면서 적에 집중할 수밖에.

    파지지지지직......!

    시뻘건 뇌격이 투명하게 일렁거리는 장벽을 찢는다.

    하지만 강엽의 의도와는 달리 뇌격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며 오사도와 괴뢰마를 노렸다. 깜짝 놀란 얼굴로 뇌격을 피한 오사도가 눈알을 부라렸다.

    “이 개새끼가... 벌써 뒤통수를 쳐!?”

    “아니, 오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흥, 입에 침이나 바르고...!”

    격분하던 그녀는 또다시 그녀를 향해 튄 경파를 서둘러 피하고는 기가 차다는 듯이 괴뢰마를 노려봤다.

    혈음마군을 향해 일장을 내민 괴뢰마가 깊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자의 말이 맞다, 오사도. 혈음마군을 둘러싼 호신강기가 투로를 강제로 비틀고 있어.”

    말하자면 이화접목의 기파를 상시적으로 두르고 있는 셈. 게다가 기파가 복잡한 방향으로 뒤엉켰기에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오사도가 눈을 껌뻑였다.

    “...그건 무당파 도사들이나 할 짓인데?”

    혈음마군이 차가운 눈으로 괴뢰마를 흘겨봤다.

    “눈썰미가 좋군, 늙은이.”

    젊은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수십 년 전부터 강호에서 활동했던 괴뢰마였다. 실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활동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전전대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삼십 년 전에 무당파에 한 절세기재가 나타났지. 동년배를 능가하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타고난 오만과 탐욕 때문에 기사멸조의 죄를 짓고 파문당한 자.”

    혈음마군의 기파에서 태극의 심상을 느낀 괴뢰마가 과거를 들추자 혈음마군의 낯빛이 차갑게 식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금 무당제일검의 사형. 사지근맥이 잘릴 위기에 처하자 동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쳤지. 그 일로 ‘무당혈검(武當血劍)’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고.”

    혈음마군의 입매가 비틀렸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는 낯짝.

    “별 걸 다 기억하고 있군.”

    송문고검을 버리고 혈교의 신병을 취한 파문제자가 혈륜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쌍으로 분절된 쌍혈륜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흩뿌린다.

    왼손에 쥔 혈륜을 내던진 그가 바로 강엽을 향해 달려들며 오른손의 혈륜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

    자성검과 혈륜, 두 신병이기가 충돌하며 일진광풍이 불고 지면이 깊숙이 패였다.

    상대가 내가중수법으로 내상을 노린다는 것을 깨달은 강엽은 혈공진기로 암경을 밀어냈다.

    붉다 못해 피가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혈륜. 붉은 뇌력과 찐득하게 뭉쳐진 핏빛 기운이 얽히고, 두 절세고수의 눈빛이 상대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혈음마군이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이 신녀를 죽였구나.”

    키이이이잉!

    혈륜에 얽힌 핏빛 공력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벼락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혈음마군은 강엽을 베는 대신 혈륜을 옆으로 휘둘러 오사도의 화살을 튕겨냈다.

    “여유만만하군, 교왕! 사도인 내게서 등을 보이다니!”

    “옆이나 보고 말해라.”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오사도가 놀랐다. 그녀가 튕겨낸 혈륜이 돌고 돌아서 칠사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혈륜에도 이화접목의 한 수를 담은 것이다.

    “설마 어륜술...!”

    이기어륜(以氣馭輪). 이화접목의 이치를 담은 혈륜은 제 스스로 의지를 가진 생물마냥 허공을 부유하더니 괴뢰마를 향해서 쏜살같이 날아갔다.

    괴뢰마가 몸을 날렸지만 이미 늦었다.

    쭈와아아아아악!

    혈륜이 뿜어낸 핏빛의 강기가 그의 허리를 양단하면서 안에 있던 피와 장기들을 쏟아냈으니까.

    “삼화취정도 아닌 놈이 사도라니. 빛쟁이들의 교주놈은 눈알이 단춧구멍인가?”

    눈엣가시 같은 괴뢰마를 처치한 혈음마군이 팔을 들자 혈륜이 날아와서 그 손에 안착했다.

    “이제 두 놈 남았군. 따로따로 상대하기 귀찮으니 둘이 한꺼번에 덤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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