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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15화 (215/450)

38화. 전향 (4)

한중 무림의 문주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 어떤 감정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어찌한단 말입니까?”

마교도들을 처형해서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계획도, 화산파로 하여금 그들을 무림맹으로 압송한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마당.

마교도들이 백도 정파에 투항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그들은 넋이 빠졌다.

“유상문주,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그렇소. 귀하가 화산파를 초빙하여 마교도들을 몰아내자고 하지 않았소? 안 그래도 민심이 우리를 외면하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간...!”

성난 문주들이 따지고 들자 유상문주가 수염을 쓸며 마뜩찮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성격들 참 급하시구려. 일단 잠자코 기다려보시오. 상황이 녹록치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유상문주가 뒤편으로 눈길을 주자 호종 무인이 포권의 예를 갖추며 고했다.

“저잣거리에 낭설이 돌고 있습니다. 흑룡교도들이 마교도들을 진압했다고 합니다.”

“뭔 말도 안 되는...!”

울컥한 문주가 말을 삼켰다.

“마교는 하나가 아니지.”

유상문주의 말 때문이었다.

문주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가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소문을 낸 자는 혈교만 마교로 만들고, 흑룡교는 그들을 진압한 투사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나밖에 더 있겠소?”

“....”

“다만 당문의 능력이어도 한중땅에서 이런 소문을 이토록 빨리 퍼뜨리진 못할 텐데... 누군가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 같소. 어쩌면 하오문을 고용했을지도 모르지.”

“으음!”

“...선자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며칠 전의 비무 이후 옥청선자는 거처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적잖이 상심하신 듯싶소. 이 몸이 몇 번이나 찾아가봤지만 뵙지 못했소이다.”

“허어, 화산도 답이 없는가....”

“선자께선 귀계를 가까이하는 분이 아니시오. 이번 일도 원칙적으로 처리하려고 하셨을 뿐이외다.”

문주들이 답답함을 토로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힘과 명분 모두 상대가 쥐고 있으니까.

검성이 하산한다면 몰라도, 문주들이 머리를 맞댄다고 여론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소문을 내면 어떻습니까?”

“이미 늦었소. 당문이 놈들을 무림맹에 데려가겠다고 했소이다. 포로로 압송하는 게 아니라 투항병으로서 대우하겠다고 하는구려.”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나만의 방법이 있소.”

문주들은 그러려니 했다. 충격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일은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구려.”

“하오나...!”

“우리가 모인 이유가 뭐였소? 한중의 민심이 우릴 손가락질하고 욕해서 모인 것 아니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잊을 것이오. 먹고 살기 바쁜 무지렁이들이 언제까지 이번 일을 기억하겠소이까?”

그때쯤엔 그들의 권위도 회복될 것이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문주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못내 동의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문주들을 배웅한 유상문주가 무거운 안색으로 처소에 들어왔을 때였다.

황촉이 꺼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헉!”

헛숨을 들이킨 유상문주가 검으로 손을 가져갈 때,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고생했소, 유 문주.”

“...기척 좀 내시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사색이 된 유상문주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미안하오. 버릇이 돼버려서. 어차피 오늘 이후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저, 정말이오?”

“당신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

“흑상에게 받은 뇌물 장부. 유 문주가 엉뚱한 마음을 먹는다면 그게 무림맹에 전달될 거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유상문주의 안색이 썩어문드러졌다.

한중의 유지로서 그는 흑상에게 주기적으로 뇌물을 받고 있었다. 유상문이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뇌물이 더 많을 정도였다.

한데 그게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말이 통하니 좋군. 서로 양보하면 모두가 만족하지 않겠소? 유 문주가 말했듯 시간이 지나면 한중의 민심은 이 일을 잊을 테니까.”

괴인의 말에 유상문주는 소름이 돋았다.

문주들과 호종 무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거늘 대체 어디서 들었단 말인가?

“뭐,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하나만 물어봅시다. 흑상들은 전부 죽었소?”

“두 명만 빼고는 전부.”

강룡방주와 서안전장주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의 목숨도 풍전등화였다.

“언제나 과욕이 화를 부르는 법이지. 흑상은 선을 지키지 못해서 망했고....”

유상문주는 왠지 뒷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 역시 선을 넘으면 망할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우회적인 경고.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괴인이 사라졌지만 유상문주는 감히 욕도 퍼붓지 못했다. 사라진 척하고 어딘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털썩 주저앉으며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올렸다.

* * *

잘 가꾼 정원과 연못을 접한 장원의 경내.

암신을 유지한 채 길을 거닐던 강엽은 순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감지하고 멈춰 섰다.

연분홍색의 도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

얼굴보다도 소매 자락에 수놓은 매화 문양이 더 눈에 띄는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독특한 재주를 가졌군.”

강엽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재차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가 정파인이란 생각은 안 했네. 하지만 흑룡교를 감싸고 그들을 거두다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녀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강엽을 서늘한 눈길로 노려봤다.

“흑룡교와 무슨 관계인가?”

“한때 적이었습니다.”

어둠이 걷히며 강엽이 나오자 옥청선자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적이었다?”

“명맥을 이을 수는 있어도 재건하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남은 자들은 큰 위협이 못 되지요.”

그런 시도를 한 자들은 모두 격퇴당했다.

흑룡교주의 핏줄은 백서희를 제외하면 누구도 남지 않았으며, 그녀 자신은 흑룡교를 싫어한다.

“그보다 무림맹도 급한 모양이군요. 이미 오십 년 전에 망한 마교의 잔당들을 잡는 데 열을 올리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광명마교와의 싸움이 쉽게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맹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걸 보면 말입니다.”

지난날 황산에서 하오문주와 나눈 대화.

당시 그녀는 무림맹이 광명마교에 집중할 방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힘겹게 버티나 보군요.”

“말을 삼가게. 자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든단 말인가?”

“정작 혈교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중에 혈교가 숨었는데도 그놈들에 대해 물으신 건 별로 없으시더군요.”

“...개방을 통해 알아보고 있네.”

“아무리 개방이 강호의 소식에 정통해도 직접 겪어본 사람들만 하겠습니까?”

화산이 정말로 혈교에 대해 무관심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옥청선자가 일행이나 당문에게 혈교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

그녀가 말한 대로 전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나 광명마교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양면전선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후우.”

옥청선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걷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강엽의 앞에서 과감하게 등을 보인다. 강엽이 따라오지 않자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채근했다.

“싸우자는 게 아니니 그냥 따라오게.”

“....”

잠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본 강엽은 걸음을 따라갔다.

유상문의 무인들이 강엽을 발견하고 움찔 떨었지만, 함께 있는 옥청선자 때문에 말을 걸진 못했다. 그녀가 강엽을 초대했다고 여겼는지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분분히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멀어지자 옥청선자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 말대로 전황은 녹록하지 않네. 복건을 시작으로 절강과 강서에 광명마교의 깃발이 꽂혔어.”

“결국 강서까지 먹혔군요.”

절강과 강서 모두 이렇다 할 대문파가 없는 만큼 작정하고 들이치는 광명마교를 막지 못했다.

“광명마교는 힘으로만 싸우지 않네. 그 지역의 악인들을 징치하고 구휼미를 풀지. 죄를 저지른 자들은 백도와 흑도를 가리지 않고 처벌하고 있어.”

물론 억울한 자들도 있었다.

복건의 무림 세가로서 광명마교의 음모에 의해 가문이 잠식당한 우문세가가 대표적이었다.

“관의 힘을 빌리자니 다들 광명마교가 혹세무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서 피하더군. 관무불가침을 들먹이면서 알아서 하라고 했네.”

“광명마교의 힘이 두려웠겠지요.”

“그도 그렇지만 복건의 포정사를 비롯한 권력자들이 광명마교의 편을 들고 있네. 폭건의 포정사는 광명마교의 이사도라고 하더군.”

“포정사가 말입니까?”

종이품인 포정사라면 일성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다.

그런 자가 광명마교의 사도라니?

“광명마교가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는 증거지. 어쩌면 북경의 조정에도 손을 뻗쳤을지 몰라.”

관부가 광명마교의 편을 드니 상계도 흔들렸다. 관과 무림은 서로를 백안시하지만, 상계는 양쪽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리고 전황을 지켜본 많은 상단들이 광명마교가 득세할 거라고 보고 그쪽에 붙었다.

“궁검께서 광명마교주의 손에 돌아가셨네.”

“......!”

그 말엔 강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궁검(穹劍) 창천검군(蒼天劍君) 남궁진룡.

팔가인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로서 천하팔존의 일인이었다.

무당의 검선, 화산의 검성과 함께 검으로 무의 끝자락에 올랐다고 일컬어지는 무신.

“자네 말이 맞아. 무림맹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네. 백도 무림은 밀리고 있어. 항간에선 남직례 전체가 광명마교의 수중에 떨어질 날도 머지 않았다고 하더군.”

이런 상황에서 혈교까지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

무림맹엔 그만한 전력이 없었다.

“자네 사문... 사문이라고 하니 좀 이상한걸. 여하튼 낭인전에 대규모 의뢰를 넣었네. 낭왕이 합류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일 테니까.”

“낭왕이 수락했답니까?”

“거기까진 모르겠군.”

강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토록 속을 터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무림맹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았다.

‘쥐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군.’

정말 얼마나 절박했으면 옛날에 망한 마교의 잔당을 잡아서 맹원들을 고취시킬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광명마교의 위험 때문에 혈교를 등한시하면 그땐 또다른 재앙을 맞닥뜨리리라.

“혈교의 교리에 대해 아십니까?”

“갑자기 화제가 거기로 뛰나? 대충은 알고 있네. 그들의 시조가 강림해서 온 천하를 혈세(血世)로 물들인다고 하지 않나?”

“놈들이 그 목표를 목전에 두었다면요?”

“뭐...?”

옥청선자의 걸음이 멎었다. 강엽을 응시하는 하얀 얼굴엔 의심과 당혹감이 번지고 있었다.

“불괴강시. 이번에 제가 상대한 강시입니다. 놈들은 그 괴물을 다시 한번 만들어서 혈마의 혼백을 불어넣을 생각이지요.”

“그게 말이 되는가? 혈마는 수백, 아니, 거의 천 년 전의 사람일세. 마교가 괴이한 술법을 부려도 그렇지, 어찌 상고시대의 사람을 부활시킨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놈들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봅시다.”

“.......”

“혈마가 부활하면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그건....”

“혈마가 부활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병력이 부족하네.”

“저기 있지 않습니까.”

강엽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이 당문이 있는 장원이라는 것을 깨달은 옥청선자가 미간을 좁혔다.

“...흑룡교를 이용하자고?”

“이이제이라고 했습니다. 무림맹 입장에선 공짜 병력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그들로 어떻게 혈교를 막는단 말인가?”

“혈교의 본단에 쳐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놈들이 하는 짓에 재를 뿌릴 수는 있습니다.”

강엽의 말에 옥청선자의 눈동자가 거친 파도를 만난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운남의 맹월림을 칠 겁니다.”

또다른 구파인 점창파와 연수한다. 그로써 맹월림을 몰아내고, 혈교의 대계에 큰 지분을 차지한 모산혈조를 죽인다.

강엽이 옥청선자를 향해 말했다.

“무림맹을 설득해주셨으면 합니다.”

“장문인을 설득하는 게 우선일세.”

흑룡교를 깊이 경계하는 만큼 검성은 강엽이나 흑룡교의 의도를 의심할 터.

“검성께 전해주십시오. 제 선물입니다.”

“이게 뭔가?”

강엽이 건넨 작은 책자.

당문이 암시장을 뒤져서 찾아낸 증거를 면밀히 살펴본 옥청선자가 깜짝 놀랐다.

“서안전장주가 흑상이라고?”

“알고 보니 서안전장은 화산과도 연이 있더군요. 자식들을 화산의 속가 제자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옥청선자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강엽이 픽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고한 매화나무에 썩은 나뭇가지가 달렸으면 쳐내야지요. 남이 자르는 것보단 화산이 자르는 게 낫지 않습니까?”

“...어차피 알려질 일이니 먼저 쳐내라는 건가.”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범한 자들을 두둔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

질린 표정이 된 옥청선자는 아무 말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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