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4화 (214/450)

38화. 전향 (3)

엄밀히 말해서 두 사람의 비무(比武)는 성립되지 않았다. 무를 견주기에는 두 사람의 수준 차이가 극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연가휘는 물러나지 않았다.

방어만 하다 역전승을 노리거나, 피하기만 하는 싸움은 뇌리에 없다는 듯이.

“흐아아아아압-!”

방천화극의 궤적을 따라 노도 같은 경파가 쏟아졌다.

대기가 웅웅거릴 만큼 패도적인 공세.

마치 생사대적을 상대하는 듯한 기파를 피부로 느낀 한중 무림의 문주들이 침음했다.

“멸문한 마교의 잔당 따위가 어찌....”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 않습니까. 흑룡교가 망했다지만 무공이 온전히 전해졌다면....”

그들의 시선이 옥청선자에게 흘러갔다. 검성의 진전을 이은 그녀라면 무어라 말할까.

“호오, 저걸 저렇게 쉽게?”

“선자?”

“저 귀영이라는 청년, 생각보다 훨씬 고강하군요. 저만한 고수를 상대로 묘기를 부리다니... 정확히 반 치 간격으로만 피하고 있습니다.”

“예? 아, 그야 저 귀영이라는 청년도 강하긴 하지만... 선자께서 감탄하실 정도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벽을 넘었다고요.”

“예?”

옥청선자가 내심 혀를 쯧 찼다.

그러나 깊은 수양을 쌓은 도사답게 그녀는 한중 문주들의 무지함을 탓하기보다는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택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단 뜻입니다.”

“그 말씀은 삼화취...!”

지고한 경지를 차마 내뱉지 못한 채 도로 삼키는 문주들의 모습.

그들을 내버려둔 옥청선자가 시선을 돌렸다.

“당 원주께선 알고 계셨지요?”

“물론이오.”

당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시장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이다. 혈교의 신녀라는 강적과 싸운 게 도움이 됐던 모양이오.”

“혈교의 신녀?”

처음 듣는 말이다.

유상문주를 돌아봤지만, 모르는 듯 눈알을 굴리기만 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강력한 강시인데, 혈교의 신녀를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하오. 강시인데도 자아를 갖고 교성을 능가하는 무위를 발휘했다는군. 웬만한 부상은 바로 치유했다고 하고. 강 무사가 알아낸 바로는 혈교가 그런 강시를 몇 구는 더 만들 계획이라던데.”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요.”

화산의 검으로서 일월신교와 싸워본 경험 때문일까.

맥락을 쫓아가지 못한 문주들과 달리 옥청선자는 불괴강시의 위험성을 직감한 듯했다.

“암시장에서 처리해서 망정이지, 그런 게 풀려나왔다면 한중은 피로 물들었을 것이오.”

“.......”

과격한 말에 성격이 급한 문주들이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이 지긋한 문주들이 만류하자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앉았다.

그들의 반응을 곁눈으로 훑은 당우경이 다시 말했다.

“작금의 강호는 난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들을 반드시 무림맹으로 압송해야 하는 겁니다. 본보기를 보여야지요. 백도 무림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면?”

“무슨 말씀이시지요?”

“공자께서도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수치를 알고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하셨잖소. 내 선자의 앞에서 논어를 읊는 게 민망하지만, 이번 일은 재고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이오.”

“흑룡교가 침공했을 때 사조님들께선 생포한 마교도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셨으나, 그들의 광신은 금강석처럼 단단했습니다. 방심한 틈을 타서 사조님들을 살해하고 도관에 불을 질렀지요.”

화산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검성이 치욕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보존하라고 명했기 때문.

“원주님과 저 청년이 무얼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화산이 뜻을 굽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

쩌엉!

부딪친 병장기가 불티를 튀겼다.

중병기인 방천화극을 휘두르고도 힘에서 밀린 연가휘가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짜고 치는 연극이라지만 대충 싸우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필승의 기세로 싸웠다.

하나 그 어떤 공격도 강엽의 몸에 닿지 않는다.

사나운 경파는 산들바람처럼 흩어지고, 직접 치는 창격은 반 치 가량으로 비껴날 뿐.

정 못 피하는 공격만 적당히 튕겨내는데, 그때마다 막강한 반탄력에 관절이 삐그덕거렸다.

“왜 그러지? 이게 전력은 아닐 텐데?”

“...대충 싸우는 걸로 보이나?”

“교도들이 보는 앞이다. 죽을힘을 다해 싸워라. 네 어깨에 저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지 않나?”

“....”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반박하지 못했지만, 화가 치민 연가휘는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쿠콰콰콰콰콰쾅...!

비무대를 누비는 두 사람의 싸움에 파찰음이 연속으로 터졌다.

큼지막한 방천화극이 폭풍처럼 전면을 휩쓸고, 자색 검광이 폭풍을 찢어발기며 질주한다.

농밀한 공력 파동에 먼지가 쓸려나가고 섬광과 굉음이 터지자 관중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개중에 몇몇은 도박을 주도하기도 했다. 관중들 속에 숨은 숙정방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이 도박을 주도하자 양민들은 철전이나 은전 따위를 꺼냈다.

장원에 들어오면서 돈을 받았기에 도박에 응하는 군상들은 상당히 많았다. 더러는 짧은 지식을 내세워 누가 이길 거라고 품평했다.

구경거리에 도박이 더해지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자기가 돈을 건 상대를 응원하고, 그가 위기에 처하면 탄식했던 것이다.

일견하기엔 팽팽한 접전.

‘틈이 없다.’

연가휘의 뺨을 타고 굵직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마나 목덜미만이 아니라 온몸이 땀으로 흥건할 지경.

‘고작 백여 합이다. 이 정도 싸운 걸로 지치다니....’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강엽이 흘리는 위압감이 심령을 옥죄이는 기분.

깊은 수렁에 들어온 것처럼 발걸음 하나를 옮기는 데도 몇 배나 많은 힘이 필요했다. 호흡도 거칠어져서 내공이 십이경맥 구석까지 닿지 않았다.

그에 반해 강엽은 땀을 흘리기는커녕 호흡도 평온한 상태.

“와라.”

강엽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금니를 꽉 깨문 연가휘가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창으로 찍고, 창대를 당기며 월아(月牙)로 일진광풍을 일으켰다.

강엽은 이렇다 할 초식도 쓰지 않고 슬쩍슬쩍 걸음을 옮길 뿐.

투로를 이어나가려던 연가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힘이 방천화극을 붙잡자 당황했다.

투아아아앙!

“컥!”

호쾌한 궤적을 그리는 족격.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든 발길질에 명치를 맞은 연가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방천화극을 놓친 그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허공섭물...!”

“완전히 붙잡지는 못해도 행동을 잠깐 제약하는 용도로는 써먹을 만하더군.”

연가휘가 얼른 방천화극을 회수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강엽이 허공섭물로 방천화극을 빼앗았다. 주인이 아닌 자의 손에 들어간 방천화극이 웅웅 떨었다.

“신병이기라더니 영성을 가졌나?”

그러고는 방천화극을 비무대 바깥으로 던졌다.

병장기를 회수하려면 비무대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장외패가 되고 마는 상황.

연가휘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힘내십시오, 대주님!”

별안간 관중석에서 터진 외침.

흑룡교도 한 명이, 사방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포승줄에 묶인 두 손을 입가에 모았다.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저, 저...!”

맞은편에 있던 한중 무림의 무인들이 눈알을 부라릴 때, 흑룡교도들이 일어섰다.

“옳은 말이구만! 일어나세요, 대주님!”

“그런 놈에게 지지 마십시오! 검병대(劍兵隊)의 의기를 보여주십시오!”

흑룡교도들이 함성을 퍼붓자 관중들도 당황했다. 그들의 정체는 몰라도 연가휘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은 여실히 느껴졌던 것.

당문의 무인들이 당우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당우경은 내버려두라는 듯이 고개를 젓기만 했다.

강엽이 피식 웃었다.

“인기만점인걸, 대주 나리.”

“저놈들....”

연가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삭신이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우면서 들숨을 길게 뱉었다.

“...이제부턴 검병대주로서 싸우겠다.”

허리춤의 흑검이 뽑혀져 나왔다.

치켜세운 검을 몸 쪽에 붙인 자세로, 서서히 간격을 좁힌다.

쐐애애애애애액!

교도들의 응원으로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은 건지 방천화극을 휘두를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살짝 몸을 젖힌 강엽의 앞머리 몇 가닥이 잘려나가는 것과 동시에 연가휘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배후를 점하고 검격을 내질렀다.

중단전의 심상이 담긴 필살의 일격이 비무대를 휩쓸었다.

쿠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이무기가 지나간 것처럼 단단한 비무대 바닥을 부순 절초. 비대한 경파가 십여 장 범위를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고, 한중의 무림인들도 아연실색했다.

줄곧 우세했던 승부가 이런 식으로 뒤바뀔 줄 누가 알았으랴?

“와아아아아아아!”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흑룡교도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강엽 일행만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저 자식, 아직도 봐주면서 싸우고 있지?”

“예, 그래도 막판엔 호신강기를 쳤네요.”

“새끼, 하여튼 멋은 오지게 부려요.”

하후진과 청수가 태평하게 말했다. 연가휘의 검격이 닿기 직전 호신강기가 움튼 것을 봤기 때문.

혈라지망하고는 다른 형태의 호신강기였다.

파직! 파츠츠측......!

흙먼지 사이로 튀어오르는 뇌기.

흙먼지가 걷히고, 전설 속 뇌공(雷公)처럼 수백 줄기의 벼락을 두른 강엽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성검법 육초식.

-뇌벽(雷壁).

여타 검초들과 달리 육초식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호신강기였다.

하후진의 창룡갑처럼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이런 싸움에선 혈라지망보단 뇌벽이 훨씬 편리하지.’

위력이나 범용성을 생각하면 혈라지망이 훨씬 윗줄이나, 내공을 많이 잡아먹는 문제가 있었다.

연가휘가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괴물이군....”

이길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뇌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신위를 보니 기가 질렸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지.”

그를 위해 응원을 보내준 교도들을 위해서라도.

심호흡을 하며 달려들었다.

쾅!

굉음이 터지고 연가휘가 나뒹굴었다.

강엽에게 닿기도 전에 그를 감싼 벼락을 맞은 것.

“큭... 으아아아아!”

그럼에도 몸을 일으킨다.

몇 번을 얻어맞아도, 화상을 입고 피를 흘려도 꿋꿋하게 일어나서 다시 달려들었다.

이미 흑검은 날아간 지 오래. 손아귀는 검을 잡지 못할 만큼 찢어졌고, 입에선 피가 쏟아졌다.

함성을 질렀던 흑룡교도들도 대주의 처절한 몰골에 탄식할 따름.

심지어 마교도가 망신당하는 꼴에 좋아해야 할 정파인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저러다 폐인이 되겠어요.”

당묘정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당장 말려야 하지 않겠냐는 듯이 숙부를 돌아보았지만, 당우경은 담담했다.

“놔두거라.”

“하지만 숙부님.”

“남자의 싸움이다. 설령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게야.”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흑룡교도들에게는 자긍심과 각오를, 백도 정파인들에게는 처참하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목숨을 건 남자는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계속 부딪쳤다.

투욱!

그렇게 때린 강엽의 몸.

몸통엔 닿지도 못하고 손바닥에 막혔지만, 연가휘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간신히... 닿았구만.”

“그래.”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닿았군.”

“하하하....”

힘없이 웃은 연가휘가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서 연기를 피워올린 몸뚱이는 쓰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극한까지 쥐어짠 내공으로 사자후를 내질렀다.

“흑룡교 교룡왕의 증손 연가휘! 패배를 인정하오!”

쿠웅!

바닥에 머리를 찍는 고두(叩頭).

강엽을 향해 절하면서 외쳤다.

“또한 우리 어르신의 원수, 혈교의 마녀를 쓰러트린 은공께 감사를 표하오! 은공께 우리 목숨을 맡기겠소! 백도 정파에 투항하겠소!”

웅성웅성!

예상치 못한 폭탄 선언에 술렁임이 일었다.

옥청선자과 한중 문주들의 얼굴도 낭패감에 휩싸였다.

항복한 장수를 처형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투항을 했으니, 이제 무림맹은 공개적으로 그들을 처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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