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09화 (209/450)

37화. 화산 (1)

아무것도 없는 대지.

칠흑처럼 검은 잿더미만 그득한 땅은 생명이 죽어버린 땅처럼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산짐승,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돌연 잿더미를 뚫고 올라온 시커먼 인영이었다.

“콜록! 콜록!”

메마른 기침 소리와 함께 아득바득 땅을 짚고 기어올라오는 남자.

피딱지와 잿가루를 뒤집어써서 본래 용모를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쿨럭, 정말로 염라대왕이랑 면담할 뻔했군....”

가까스로 지면에 올라온 강엽은 대 자로 뻗은 채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혈라지망의 폭주는 그 자신이 의도한 결과지만, 하마터면 신녀와 동귀어진했을 뻔했다.

호신의 술법과 호신기를 쳤음에도 전신의 뼈마디와 오장육부가 으깨졌던 것이다.

그것은 혈라지망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유예하고 있던 술법진의 붕괴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혈라지망만으로는 그 여자를 죽인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니... 하지만 제때 생로를 못 열었다면 나도 뼈도 못 추렸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쥐어짜서 생로를 열고, 그 안에 몸을 던졌기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다.

신녀가 먼지가 되는 바람에 그녀의 피를 취하지는 못했지만, 거기서 욕심을 부렸다면 자신이 당했겠지.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천운....

“윽.”

문득 종아리를 강하게 조이는 느낌에 뭔가 하고 만져본 강엽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종아리를 꽉 잡은 여인의 손목.

찢겨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종아리를 꽉 잡은 손목은 핏줄까지 불거져 있었다.

그 손목을 억지로 떼어낸 강엽은 삼매진화로 불사르려다가 멈칫했다.

피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뭔가 알아낼 수 있다면 남겨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흡혈귀라도 손목만 남은 상태에서 살아남진 못할 테고....’

잠시 애매한 표정으로 손목을 바라본 강엽은 넝마가 된 웃옷을 벗어 그것을 감쌌다.

이어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술법진을 빠져나온 것은 좋지만, 정작 그렇게 나온 바깥세상은 암시장이 아니었기 때문.

주변은 자신과 함께 빠져나온 잿더미로 엉망이었지만, 그 바깥은 녹음이 우거진 소나무숲이었다.

먼 곳엔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있고,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까지 아련하게 들려온다.

술법진이 워낙 장대한 만큼 생로 역시 여러 갈래였고, 생로가 반드시 들어온 입구와 같지 않기에 엉뚱한 곳으로 나온 것이다.

‘급하게 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만약 시간을 두고 차분히 생로를 열었다면 일행과 바로 합류할 수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은, 문득 자신이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위가 밝다고?’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진 숲이었기 때문에 마냥 밝진 않았으나, 한 줄기 햇살이 녹음을 비집고 내려왔다.

햇살이 몸에 닿자 본능적으로 물러났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몸이 타진 않았다.

“이건....”

따끔거리긴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약간 현기증이 나는 수준.

“.......”

강엽은 숨도 쉬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하필이면 지금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뜨거운 태양볕이 몸을 덮쳤는데도 화상을 입지 않는다.

그 사실에 묘한 감격과 환희로 몸이 떨릴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격정이 울컥 치솟았다.

“아....”

한참이 지나서야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얼굴을 닦았지만 그래봤자 잿가루 때문에 더 더러워지기만 할 뿐.

차마 감상을 토내해지도 못하고 멍하니 햇살만 바라보던 강엽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

힘든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보다도, 인생 최대의 난관을 마침내 극복했다는 게 눈물이 나올 만큼 기뻐서.

그러면서도 고작 햇살 따위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의 신세가 눈물이 나도록 서글퍼서.

실로 오랜만에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쬔 흡혈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하염없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오랫동안....

* * *

“사형, 이 사람 자는데요?”

“흠, 다친 건 아니고?”

별안간 귓가를 파고드는 속삭임.

‘이런....’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강엽은 자신이 줄곧 맨바닥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졸도했던 것.

하지만 낯선 인기척이 다가오는데도 전혀 몰랐다는 건 퍽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고 하나 삼화취정에 오른 자신이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다니?

“사고(師姑)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근데 이 사람은 뭔 일을 겪었길래 이런 행색이 된 건지... 여긴 왜 갑자기 잿더미가 됐고? 산불이라도 났나?”

“음, 그런 것치고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괜찮은데.... 딱 이 주변만 태워먹은 거 아닐까요?”

“이 사람이 일어나면 물어봐야지. 이보십시오, 형장. 괜찮습니까? 여기서 잠들면 안 됩니다. 자다가 고뿔 걸리는 건 둘째치고 산짐승한테 물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근데 이 보자기는 뭐... 앗, 시발! 깜짝이야!”

“아니, 사매. 갑자기 욕을 하면 어떡... 으허헉!”

“사, 사람 손목이에요!”

강엽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귀가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신녀의 손목을 들킨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글렀다.

“돌려주시오. 내겐 중요한 물건이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일어나자 후다닥 물러나는 두 선남선녀.

강엽의 눈에 소매 자락에 매화가 새겨진 연분홍색 도포가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검파를 쥔 두 남녀는 명백히 강엽을 경계하고 있었다.

“형장은 뉘신데 백주에 사람 손목을 들고 다니십니까? 이 주변이 까맣게 타버린 건 뭐고요?”

“매화....”

강엽은 대답하는 대신 두 사람의 소맷자락에 새겨진 매화 무늬를 지긋이 응시했다.

강호 무림에 수많은 무맥이 있다 하나, 매화를 상징으로 삼은 문파는 구파 중 하나인 화산파뿐.

“...화산에서 왔소?”

“화산파 이대제자 허무량입니다. 이쪽은 내 사매인 하윤이고. 이젠 형장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좀 전의 질문에 답하라는 뜻이겠지.

그러나 강엽은 입을 다물었다.

‘기도가 안 느껴진다.’

단순히 기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넘어 혈공진기가 결석(結石)마냥 딱딱해졌다. 흡혈귀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 이래선 필부와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응달진 곳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감각이 깨어났다.

‘태양볕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건가?’

삼화취정에 올랐는데도 태양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것이다. 어째서 두 화산파 제자가 접근하는 동안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다.

아쉬움을 삼키면서 말했다.

“...낭인전의 강엽이오.”

“강엽?”

화산파 제자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바로 떠올리지는 못하는 기색이었다.

“사천에서 활동하고 있소. 귀영이라는 별호로.”

“아!”

“귀영이라면... 금패급 낭인?”

비로소 강엽의 정체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금패급 낭인이 한갓진 산중에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귀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나요? 낭인전 소속이라면 낭인패가 있겠지요?”

하윤이라 불린 여인이 물었다.

무심코 허리춤을 뒤진 강엽이 멈칫했다.

“...잃어버린 것 같은데.”

술법진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허리춤의 끈이 끊어졌던 걸까.

두 사람이 더더욱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보다 여긴 어디요? 한중인가?”

“한중 근처이긴 하지요. 정확히 말하면 한중 북쪽의 산기슭입니다.”

그나마 한중에서 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강엽이 바닥에 떨어진 신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내게 중요한 물건이오.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소중한 분의 유해입니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기도 귀찮았던지라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이 곤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누가 봐도 여인의 손이었다. 그런 걸 따로 챙길 정도라면 생전에 매우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겠는가?

...설마 강엽이 단지 손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고 싶어서 가져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두 화산파 제자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강엽을 바라봤다.

허무량이 어쩐지 먹먹해진 얼굴로 보자기로 손목을 감싸서 강엽의 앞에 가져왔다.

“으음, 미안합니다.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그보다 옷 남는 거 있소?”

상의는 말할 것도 없고, 바짓단도 다 헤져서 은밀한 부위만 가리는 형국이었다.

허무량은 그렇다 쳐도 여인인 하윤이 맨몸을 슬금슬금 훔쳐보면서 얼굴을 붉히는데 조금 남사스러운 기분이었다.

허무량이 애매하게 웃었다.

“평상복이 있긴 한데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엽이 머리 반 개는 더 컸던 것이다.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다는 낫기에 허무량이 행낭에서 꺼낸 갈색 단삼으로 부랴부랴 갈아입었다.

조금 뒤에서 하윤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게 신경 쓰였기에 더욱 빨리 갈아입었다.

“그보다 화산파 제자들이 여긴 웬일이오?”

같은 섬서의 경내에 있다고 하나 화산에서 한중까지는 천릿길이 넘는 여정이다.

강엽의 말에 두 사람이 조용히 시선을 나누었다. 외인에게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걸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소.”

“아, 아닙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요. 실은 한중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본산에서 조사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중엔 본산의 속가들도 제법 있어서 못 본 척할 수 없기도 하고....”

“큰일?”

“한중에 큰 암시장이 있는데, 얼마 전 거기서 난리가 나서... 혈귀들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잠깐.”

강엽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암시장의 싸움은 불과 몇 시진 전에 났소. 한중에서 화산에 소식이 닿으려면 최소한 며칠은 걸릴 텐데?”

화산에서 한중까지 오는 여정까지 합치면 빨라도 보름은 걸릴 것이다. 험준한 진령산맥이 두 도시를 가로막은 데다 시일을 단축할 뱃길 또한 없기 때문.

그런 강엽의 질문에 두 사람이 더 혼란스러워했다.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한중에서 난리가 난 게 스무날도 더 됐습니다.”

“...며칠이라고 했소?”

“스무날이 넘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예.”

강엽의 안색이 경직되자 두 사람이 의아해했지만, 강엽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방금 전에 싸움을 끝냈다. 피곤해서 졸도했던 것을 감안해도 몇 시진밖에 안 지났을 터.

한데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니?

‘설마 생로를 여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혈라지망이 폭주하고, 연쇄적으로 술법진까지 무너지면서 무언가 잘못됐을 수도 있었다.

안에서 드문드문 정신을 잃은 채 표류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던 걸까.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돼. 재생력 덕분에 정신은 금방 차렸는데....’

설사 기절할 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어도 금세 회복하는 만큼 스무날이나 정신을 잃었을 리는 만무.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생로가 뒤틀려서 시간축이 어긋났다....’

믿기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화산파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암시장에서의 일을 듣고 온 건 맞는 것 같고.

“두 분만 오셨소?”

“아니, 저희는 잠깐 야영지 주변을 살피러 온 겁니다. 불쏘시개나 찾을까 해서요. 멀지 않은 곳에 본산의 사고님께서 계십니다.”

두 사람이 이대제자라고 했으니 사고라는 사람은 필시 일대제자일 것이다.

“형장이 정말 낭인전의 귀영이라면 본산의 옥청선자(玉淸仙子) 연 사고님의 이름을 아실 겁니다.”

옥청선자 연선하.

화산파 최정예 매화검수들의 당대 수장이자 정도십대고수의 일좌를 차지한 여인의 이름.

사실상 화산파 장문인의 뒤를 잇는 이인자가, 암시장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몸소 걸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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