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신녀 (8)
투앙!
지풍을 맞은 거미줄은 크게 출렁였지만 끊어지진 않았다.
“이 정도는 쉽게 막는가?”
시험 삼아 지풍을 쏴본 신녀가 혀를 찼다. 가느다란 굵기에 맞지 않게 몹시 탄력적인 호신강기였다.
그 하나하나가 실처럼 뽑아낸 얇은 강사(罡絲).
씨실과 낱실처럼 얽히고설킨 호신강기의 실들은 곳곳에 자리한 혈목을 매개로 삼아 넓은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오하구나, 어린 동족아. 전장 전체를 영역으로 삼을 셈인가?”
강엽은 도리어 도발했다.
“그래서 무섭나?”
“하!”
만면 가득 웃음을 띤 신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제아무리 탄자결과 흡자결의 묘리로 호신강기를 짰다고 하나 무적은 아니었다.
창졸간에 강엽에게 접근, 훤히 빈 몸통을 향해 손톱을 박아넣는다.
강엽의 동공이 길쭉한 손톱을 포착했을 땐, 이미 서로의 간합이 한 치도 남지 않은 상황.
이제 와서 피하려고 한들 늦었다.
투아아아아앙......!
장대한 굉음이 허공 가득 울려 퍼지고, 신녀의 낯빛이 굳어졌다.
“호신부...!”
그녀의 손톱을 막은 투명한 파문.
강엽을 중심으로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공력 파동은 그녀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한 번뿐이지만 절세고수의 한 수도 능히 막아주는 부적.
강엽이 호신부를 갖고 있다면 막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촤아아아악!
연이은 공세에도 면면부절 이어진 파문은 그녀의 공세를 일절 통과시키지 않았다.
차라리 죽은 심윤처럼 호신부를 대량으로 갖고 있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강엽의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찢겨나간 부적 조각들이 흩날리는 일 따윈 없었다.
콰앙!
도리어 그녀가 격공을 맞고 튕겨간다.
호신강기로 제때 막았기에 피해는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당혹감에 물들었다.
“혈목이!?”
그녀가 물러난 곳에서 혈목 다발이 튀어나오며 그 안에서 얇은 강사가 쏘아진 것이다.
허공에서 몸을 반전시킨 그녀는 다른 곳에서도 혈목과 강사가 치솟는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안 그래도 남은 공간이 얼마 없는 술법진이 강엽이 불러낸 혈목과 강사로 발 딛을 곳이 없었다.
‘혈라지망’이라는 이름 그대로, 술법진의 공간을 핏빛의 그물로 가득 채울 심산.
그제야 발밑을 가득 채운 거미줄이 무언가 규칙을 띠고 있음을 안 신녀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호신강기로 술법진을 그렸던 건가...!”
단지 상대의 절초를 막는 것을 넘어, 자신이 궁구한 술법을 즉석에서 짜내기 위한 호신강기.
좀 전에도 호신부로 그녀를 막은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강사를 움직여, 술법에 필요한 수결을 맺었던 것이다!
‘심윤 그놈을 먼저 상대해서 다행이지.’
심윤이 두른 수십 장의 호신부를 찢어발기면서, 정안으로 호신부의 구성과 이치를 꿰뚫어봤다.
그렇게 훔친 호신의 술법을 혈라지망을 통해서 구현한 것.
부적이 아니기에 단발성도 아니고, 강엽 자신이 삼화취정에 오르면서 어지간한 술법은 일일이 진언을 외울 필요도 없어졌다.
호신의 술법만이 아니다. 의념이 일자 강사가 저 스스로 얽히고설키며 수인을 맺었다.
그림자에서 수십 마리의 독사들이 솟고, 날카로운 소리가 감각을 유린하고, 단단했던 땅이 물러지면서 발목을 옭아매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신녀가 짜증을 냈다.
“이딴 잡술들로!”
하나같이 그녀를 위협할 수 없는 너절한 술법들이었다. 기파만으로도 쉽게 떨쳐낼 수 있는.
한데 그런 것들이 끝도 없이 들이닥치니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흑무암쇄진.
설상가상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시커먼 안개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흑무암쇄진까지 익히고 있었나?”
흑룡교가 건재하던 시절에도 소수만이 익힌 술법이 현현하자 신녀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절세고수의 안법이라면 어둠 속도 꿰뚫어볼 수 있는 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단지 시야를 가릴 요량으로 절세술법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죄다 없애버리면 소용없는 일이다.”
허공을 가리킨 손가락 끝에 맺힌 강구.
한순간에 커진 강구가 어둠 속을 환히 밝히며 아래쪽으로 치달았다.
제아무리 호신의 술법이라 해도 한계 이상의 공력을 맞닥뜨리면 종잇장처럼 찢겨나갈 터.
“......!”
하지만 강구가 손가락을 떠나기도 전에 고개를 홱 꺾은 신녀가 배후로 손톱을 휘둘렀다.
손톱과 손톱이 맞물리며 경파의 파편이 튀고, 찢어진 손등을 따라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린다.
복부를 향해 날리는 관수를 잡은 강엽이 교묘하게 관절을 꺾으려고 하자, 그녀는 안쪽으로 파고들며 하박을 부딪쳐 강엽을 튕겨냈다.
기습적으로 날린 지풍을 흘려버린 강엽이 미간을 찌푸린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상단전은 이상하군.”
“무어?”
“처음엔 강시가 됐기 때문인가 싶었는데... 이 경지에 오르고 다시 보니 제대로 알겠어.”
서로의 숨소리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초음으로 그녀를 살펴본 강엽은 확신했다.
“당신의 백회는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
“...!”
“신녀라고 했으니 분명히 그 누군가는 혈교주거나 그에 필적하는 존재겠지. 어쩌면....”
“닥쳐라!”
역린을 건드린 걸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신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강력한 기파를 내뿜었다.
굳이 버티는 대신 뒤로 물러난 강엽이 그녀를 나직이 바라봤다.
“혈마인가?”
“무엄하다. 그대가 함부로 불러도 될 분이 아니거늘!”
명도상인의 기억을 엿봤기에 혈교의 대계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강엽이었다.
혈교가 혈마를 부활시키려 한다면, 신녀가 혈마와 이어진 것도 일견 이해되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죽은 자의 혼백이 남아있는 것은 상리에 어긋나지만, 이미 비슷한 사례를 보지 않았던가?
‘흑룡교주... 혈마가 그놈과 비슷한 상태라면 말이 되지.’
혈마의 혼백이 일부라도 남아있다면 그에 걸맞은 육신을 줘서 부활시킬 수도 있으리라.
다만 아무 육신에 시조의 혼백을 담을 수는 없으니 신녀나 모산혈조 등을 통해 시험해본 것일 테고.
모산혈조 또한 흡혈귀가 되기를 원하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셈.
“하긴 딱히 상관은 없겠군. 어차피 전부 죽이면 혈마가 부활하지도 못할 텐데.”
시조를 모독하는 발언에 신녀가 발끈하는 찰나, 강엽의 신형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
감각을 곤두세운 신녀가 강엽의 접근을 눈치채고 강기의 폭풍을 뿌리는 찰나.
우우우우웅...!
또다시 호신의 파문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 위에서 강엽의 일권이 떨어졌다.
“크읍...!”
혈익으로 몸을 가린 그녀가 이마를 찡그렸다.
연이은 격전으로 피로가 쌓이긴 했어도 재생력 덕분에 크게 다친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수마에 빠진 것처럼 둔해진 감각이 강엽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어깻죽지를 베였다.
‘환술!’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강엽의 마안이 조금씩 그녀의 감각을 어그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자료혈에 공력을 끌어올려 환술의 기운을 떨쳐내자 그제야 감각이 명료해진다.
공력을 많이 쓴 상태에서 강적을 맞닥뜨렸으니 천시를 빼앗겼으며, 적이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고 있으니 지리 또한 빼앗긴 셈.
사방에서 날아든 술법들이 발 딛을 운신 범위를 여지없이 제한하자 신녀가 탄식했다.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모든 절세고수들이 꿈꾸는 호신강기를 이제 막 삼화취정에 오른 애송이가 만들다니.”
흑무암쇄진 속에 녹아든 강엽의 암신은 절세고수도 쉽게 찾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상대의 전력은 철저히 깎고, 자신은 온전히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장을 구축하는 전술.
그로써 강엽은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신녀와 싸우며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차지했다.
이에 맞서 싸우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리라.
“인정하마. 본녀가 견식한 호신강기 중에 이토록 악랄하고 무자비한 호신강기는 없었느니라!”
물론 이런 식으로 싸우면 강엽의 내공이 금세 바닥나겠지만, 여유가 없는 건 그녀도 매한가지.
장기전의 양상으로 흘러가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구명절초를 준비했다.
-혈천대라인(血天大羅印).
시조인 혈마가 창안한 무공이다. 혈교에서는 오직 교주와 신녀만이 익힐 수 있는 존귀한 신공.
시뻘겋게 타오르는 손이 허공을 부드럽게 허공을 휘젓자 허공에 붉은 공력이 물결쳤다. 멀리 있던 강엽도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경세적인 기파.
‘저게 완성되면 혈라지망이 전부 날아간다.’
삼화취정에 오르긴 했어도 객관적으로는 유이강과 대등하게 싸운 그녀와 비할 바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그녀가 유이강과 싸우면서 상당한 공력을 소모하고, 혈라지망으로 방해했기에 대등하게 겨루었을 뿐.
만일 혈라지망이 박살난다면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다 죽거나 사로잡힐 게 뻔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결국 하수의 수법. 주도권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닌 것을. 이것이 그대와 본녀의 눈높이가 다르다는 증거다!”
이제껏 일방적으로 밀렸으면서도 주도권을 가져온다.
그러나 강엽은 섣불리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
오히려 반대.
쿠구구구구구궁......!
발밑에서부터 일어난 진동이, 혈목을 타고 사방에 퍼져나간다.
그 흔들림에 불길함을 느낀 신녀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강엽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에 갇힌 순간부터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으니까.”
강엽이 지칠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버티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승부수를 띄우는 것뿐.
언제 술법진이 붕괴할지 모르는 지금,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다.
‘남은 공력은 이 할도 안 되나.’
삼화취정에 올랐다고 하나 공력이 무한이 된 것은 아니다. 혈라지망은 그 공능만큼이나 많은 공력을 잡아먹기 때문에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만약 신녀가 공력이 여유로워서 장기전을 택했다면 강엽 자신의 패배로 끝났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귀찮은 술법으로 공력을 소모시킨 것이지만.’
혈라지망을 완성하면서 갖가지 술법으로 그녀를 공격한 것은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품이 덜 드는 술법들로 그녀의 내공을 소모시켜 억지로 승부수를 띄우도록 유도하고,
그녀가 결정적인 절초를 쏟아붓는 순간 역습을 가하기 위함.
쩌저저적! 쩌저저저저적!
흑무암쇄진으로 어두워진 공간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정신없이 싸울수록 상대에게 집중하지. 하지만 그 때문에 발밑을 소홀히 했던 거다.”
“이런, 설마....”
신녀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했다.
하찮은 술법들을 고집한 것도, 흑무암쇄진을 쓴 것도, 환술을 쓴 것도, 그녀와 난타전을 치른 것도.
모두 처음부터 혈라지망으로부터 그녀의 신경을 가로채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애써 만든 호신강기를 일부러 폭주시키겠단 말이냐!?”
“못할 게 뭐 있겠나.”
“흥, 지금이라도 방해하면...!”
그녀 또한 흡혈귀였다. 혈목을 불러내서 혈라지망을 부수면 이 폭주를 잠재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여겼던 그녀는 자신이 불러낸 혈목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전율했다.
“당신이 어떻게 흡혈귀가 됐는지 알 것 같더군. 모산혈조가 혈목을 대법에 썼겠지?”
아마 그 혈목은 진조에게서 얻었겠지.
과거에 진조와 협력했던 시절이라면 혈목을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공은 당신이 더 낫지만, 흡혈귀의 격만 논한다면 내가 윗줄이지.”
그렇기에 신녀의 혈목은 강엽의 혈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강엽의 혈목이 더 질기고, 수도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강엽이 짠 판에서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눈을 붉히며 악다구니를 썼다.
“빌어먹을! 본녀가, 본녀가 이렇게 죽을 것 같으냐! 어떻게 살아난 목숨인데, 시조를 배알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을 수는...!”
“그 잘난 무공으로 살아나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신녀가 두 손을 혈라지망이 있는 아래쪽으로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강엽이 손가락을 튕기는 속도가 더 빨랐다.
-......!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부시게 찬란한 광채가 흑무암쇄진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시야를 새하얗게 불태운다.
일순 붉은 무언가가 번쩍였지만, 임계를 돌파한 혈라지망의 폭주는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