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냥 (1)
염왕과 유이강이 대화를 나누고, 다시 염왕과 풍도마장이 대화를 나누던 그 무렵.
서태진의 사가(私家)에 모여있던 흑상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어쨌든 칠사도의 목이 암시장에 흘러들어왔으니 조만간 광명마교가 올 거다.”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광명마교가 쳐들어올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만약 그들이 무력으로 암시장을 점령하고자 한다면 혈교와 광명마교가 전쟁을 벌일 판이었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지. 유이강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야겠어.”
서태진, 혈교에서 ‘명도상인(冥途商人)’이라 불리는 교성 역시 사태를 심각하게 진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계획에 변수가 있기 마련이라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물론 광명마교도 바보가 아니니 무턱대고 혈교와 전쟁을 하진 않겠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불쾌한 일.
“칠사도를 죽인 자도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놈은 내버려둔다.”
그만한 절세고수까지 상대하는 건 버거웠다.
지금은 유이강에게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
“놈이 암시장을 나가는 즉시 유이강을 친다. 유이강의 목을 주면 광명마교도 잠잠해질 터.”
유이강이 정말 배후에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암시장이 광명마교와 싸울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겸사겸사 목구멍의 가시 같았던 유이강도 제거하고 말이다.
“문제는 유이강의 힘이다. 놈을 무릎 꿇리려면 더 강한 전력이 필요해.”
명도상인 역시 삼화취정을 이룬 몸.
그러나 유이강을 상대로 필승을 자신하진 못했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겠소?”
“각자가 지닌 병력을 차출하도록.”
기껏해야 돈이나 좀 내면 될 줄 알았던 흑상들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러자 명도상인이 짐짓 정색했다.
“이 약의 효능을 잊은 건가!”
그가 탁자에 작은 호리병을 쾅 내려놓자 흑상들의 만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명도상인이 그들을 쭉 둘러봤다.
“호연 장주, 그대는 지병을 앓고 있었지. 그 지병을 해결해준 게 누구인가? 이 약이 없었으면 자네가 건강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닙니다. 교성의 은혜 덕분이지요.”
“서안전장주, 강룡방주. 당신들도 마찬가지다. 파뿌리처럼 허연 머리카락이 누구 덕에 검어졌나? 늙고 병든 몸을 누가 고쳐주었냔 말이다.”
“....”
서안전장은 서안에서 가장 큰 전장이고, 강룡방은 한수의 조운을 독점한 조운방회였다.
칠순을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내가기공의 성취도 높지 않아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상태.
하나 명도상인이 준 비약을 마시고, 술법의 혜택을 받으면서 십 년은 젊어졌다. 겉모습만 젊어진 게 아니라 매일매일 기력이 왕성하게 샘솟는 듯했다.
인제 와서 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나이라면 자다가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다.’
‘가장 젊은 호연 장주도 지병이 악화되면 얼마나 살지 장담할 수 없지.’
세 사람은 잠시간 눈빛을 교환했고, 강룡방주가 대표로서 간절히 호소했다.
“교성, 진정하게. 한 배를 탄 마당에 어찌 자네를 돕지 않겠나? 유이강은 우리도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네. 자네, 아니, 혈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야.”
한동안 어르고 달랜 끝에야 명도상인은 못 이긴 척 넘어가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야지. 셋 다 병력을 숨겨둔 걸로 안다. 은밀히 불러오도록. 거사일에 동시에 들이친다.”
세 흑상의 병력과 명도상인이 부리는 혈교의 세력까지 합치면 유이강을 쳐부술 수 있으리라!
그때 호연 장주가 물었다.
“한데 태화문은 어찌합니까? 풍도마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조영옥과 함께 다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내버려둬야 하지 않겠소?”
서안전장주가 말을 받았다. 유이강에게만 집중해도 빠듯한데 태화문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명도상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공녀도 언젠가는 처리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우리의 전력이 강해도 함부로 양면전선을 펼치는 건 위험하지. 그들을 처리할 방도는 따로 마련했다.”
일단 유이강의 목을 쳐서 광명마교를 달래는 게 먼저였다. 무슨 수를 쓰든 혈교와 광명마교가 만마대전(萬魔大戰)을 벌이는 것은 막아야 했다.
“거사일은 나흘 뒤로 잡겠다.”
“칠사도를 죽인 사내가 그때까지 떠날까요?”
“내일까지 안 떠나면 유이강을 압박한다. 암시장의 안전을 명분으로 들면 유이강도 무시하진 못할 게야. 어떻게든 놈을 내보내려고 갖은 수를 쓰겠지.”
이후 구체적인 계획과 일시까지 정한 네 사람은 원탁이 있는 방을 빠져나왔다.
“멀리 나가진 않겠다.”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들 근처에 살고 있는데 별일이 있겠습니까.”
골목을 채운 중독자들은 걱정할 거리가 안 되었다. 약에 찌든 자들도 흑상을 건드리진 못했다. 혈라분만 주면 알아서 진정하는 놈들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흘 뒤에 봅시다, 교성.”
그렇게 세 사람이 교성의 장원을 빠져나왔고, 갈림길에서 또 각자 집을 향해 돌아갔다. 젊은 호연 장주가 명도상인의 장원에서 가장 멀리 살고 있었다.
건장한 가마꾼들이 짊어진 사인교 위에서 거리의 중독자들을 곁눈질한 그는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흥, 더러운 천것들 같으니....”
몇 년 전까만 해도 약쟁이들이 북쪽 구역까지 기어올라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
명도상인이 써먹을 데가 있다고 했으니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이놈들, 서두르지 못하겠느냐? 천것들이 싸지른 분뇨와 구토 냄새 때문에 내 코가 마비된단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차마 명도상인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애먼 아랫것들에게만 화풀이하는 호연 장주였다. 하지만 주인의 지엄한 명령에 아랫사람들은 얌전히 굴종할 뿐이었다.
그제야 호연 장주의 입가에 흡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 * *
호연 장주가 들어오자 아리따운 시비들과 하인들이 대문 안쪽에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장원을 관리하는 늙은 총관이 물었다.
“침소에 드시겠습니까?”
“그래, 술상부터 내오도록.”
“밤이 늦었습니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어찌....”
“감히 나를 가르치는 게야?”
호연 장주가 눈알을 부라리자 총관이 찔끔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어찌 감히... 그저 장주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총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짜악!
총관의 노안이 모로 꺾이자 주변 사람들이 식겁했다.
매섭게 손찌검을 한 호연 장주가 상처입은 짐승처럼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이런 건방진 노친네가...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총관이면 총관답게 시키는 일이나 잘 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쯧쯧, 나이를 처먹더니 말귀가 어두워졌어.”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언사에도 총관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총관의 허연 머리를 내려다본 호연 장주가 혀를 차면서 침소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총관이 몸을 일으키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염려했다.
“총관님.”
“괜찮다. 하루이틀 일도 아닌 것을.”
“장주님께서 너무 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느냐?”
“예?”
“...아니다. 별 의미없는 말이니 잊거라.”
호연장은 무림 세가는 아닐지라도 섬서 남부에선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대지주 가문이었다.
선대부터 광산과 농장을 운영하며 부를 쌓았고, 가업도 성공했기에 흑상이 될 수 있었던 것.
명문가의 주인으로서 호연 장주가 특권의식을 지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정이 더 폭급해지셨다.’
어렸을 때부터 지병으로 몸이 약해서 가전무공을 익히지 못한 호연 장주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었다면 장주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열등감과 특권 의식이 지금의 호연 장주의 정체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몇 년 전부터 급속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물론 그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성정이 더욱 거칠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폭력을 쓰는 것은 예사였고, 술과 여색에 빠지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들을 탐했던 것이다. 심지어 방사하는 중에도 시비들에게 폭력을 휘둘러댔다.
‘휴, 호연장이 어떻게 되려는지.’
총관이 한숨을 삼켰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암시장에 발을 걸친 게 실수였는지도 몰랐다.
흑상이라 불리면서 권세를 누린 대가로, 가문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총관이 걱정하든 말든 호연 장주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독한 술로 병나발을 불었다. 그리고 시비와 알몸으로 뒤엉키면서 끊임없이 욕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서태진 새끼, 유이강 새끼....”
건강을 인질로 삼고 자신에게 명령질을 하는 명도상인도, 흑상 주제에 고고한 척하는 유이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놈들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죽이고 놈들의 것을 모조리 빼앗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이 치솟자 시비를 다루는 손길도 거칠어졌다. 시비의 얼굴을 내려친 것이다.
시비의 교성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악! 요, 용서해주세요, 장주님...!”
“개 같은 년! 아가리 다물지 못해!?”
손에 잡힐 듯이 넘실거리는 살기에 시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히끅거렸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정말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비를 범하면서 억지로 욕심을 채운 호연 장주는 다시 한번 술에 취해서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럭-.
‘응?’
호연 장주는 절로 눈이 떠지는 걸 느꼈다. 원래 술에 절은 채 잠들면 어지간해선 잘 깨지 않는데,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뭐지. 유이강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비몽사몽이 됐는데도 그런 의문이 불쑥 치솟았다.
흑상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떨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긴장하지 않았던가.
‘다시 잠들면 되겠지.’
그런데....
“이 새끼 웃고 있는데? 깬 거 아냐?”
“그렇군.”
상황은 그의 생각과 영 딴판이었다.
* * *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남녀의 목소리. 직후 명치에 빡 소리와 함께 강렬한 충격이 찾아왔다.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란 호연 장주가 몸을 꺾은 채 꺽꺽거렸다.
“크억! 이, 이건 도대체....”
폭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시비에게 행했던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무자비한 폭력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해지고 있었으니까.
호연 장주도 무작정 당하지만은 않았다.
술독과 여색에 빠지는 한편 틈틈이 익힌 무공을 벼락같이 출수했다.
‘놈, 내가 참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두 줄기의 장력이 습격자의 복부로 쏘아졌다. 놈의 단전을 타격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장력이 몸에 닿기도 전에 습격자가 그의 완맥을 낚아채고 바깥으로 꺾었다.
“끄아악!”
흡사 천근 바위에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옆구리에 꽂히는 충격에 호연 장주는 정신이 대략 아득해졌다.
오장육부가 조각조각 끊기는 고통이 이러할까.
“쿨럭! 끄윽...!”
“좀 고분고분해질 마음이 드나?”
“흐흐....”
“더 맞아야겠군.”
호연 장주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고통에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도 광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습격자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호연 장주의 전신 요혈을 툭툭 건드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호연 장주가 의아함을 느낄 때, 몸 안쪽에서 생애 처음으로 겪는 고통이 들이닥쳤다.
“커헉!”
“분근착골이다.”
근육을 찢고 뼈를 뒤트는 고문.
뒤에 있던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결국 터득했구나?”
“실전에서 쓰는 건 처음이야.”
각종 무공서와 의서를 독파하며 분근착골을 독자적으로 깨우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지가 꺾인 채 경련하는 호연 장주는 눈물과 콧물은 물론 땀까지 흥건하게 쏟아졌다. 살과 뼈가 분리되는 고통에 안구의 실핏줄까지 터지면서 피눈물이 흘렀다.
상당히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강엽과 백서희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호연 장주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난행을 당한 시비를 발견했기 때문.
“흐, 주겨... 주기라고...!”
뭉개진 발음으로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에 백서희가 살짝 감탄했다.
“오, 분근착골을 버티네. 생각보다 독종인걸.”
그녀가 보기에도 강엽의 분근착골은 처음 해보는 것치고는 꽤나 완성도가 높았다. 단지 호연 장주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굴복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강엽은 심드렁했다.
“정말 죽으려고 했다면 혀를 깨물었겠지. 소리쳐서 사람 부르고 싶나 본데, 그래봤자 아무도 안 온다. 여긴 장원이 아니니까.”
“...!?”
그제야 호연 장주도 주변이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지 나게 두들겨맞느라 몰랐던 것이다.
백서희가 차갑게 말했다.
“이해했나 보네.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 편하게 해줄게. 널 비롯한 흑상들이 집결한 이유, 구성원, 그리고 누가 혈교도인지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