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큰손 (7)
그 시각, 다른 흑상들로부터 경계받고 있는 유이강은 정체불명의 사내와 독대하고 있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입찰한 것도 모자라, 광명마교 칠사도의 수급을 던져놓은 작자.
“솔직히 말하면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오. 실력을 떠나서 귀하는 내가 만든 경매장의 규칙을 어겼소.”
“규칙?”
“우린 물물거래를 하지 않소이다.”
차라리 금원보나 은원보, 하다못해 값비싼 보석을 가져왔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광명마교 칠사도의 수급이라니?
“광명마교 칠사도의 목엔 현상금이 걸리지 않았소. 저걸 관아나 무림맹으로 가져가봤자 아무런 가치도 없지. 명성을 얻는 것 말고는.”
그 명성의 대가로 광명마교가 눈이 뒤집혀서 찾아올 테니 오히려 손해면 손해였지 이득은 아니었다.
“귀하가 그걸 모르고 저 수급을 가져오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오. 그러니 묻겠소. 귀하의 정체가 무엇이며, 내 경매장에서 분탕질을 친 이유가 무엇이오?”
“살기가 짙군.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다면 무력도 불사할 기세야.”
가면 속에서 낮은 웃음소리를 토해내는 사내.
유이강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찰나, 사내가 스스럼없이 가면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냈다.
“.......”
기껏해야 서른이나 됐을까. 수염 하나 나지 않은 수려한 젊은이의 얼굴에 유이강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태풍을 만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가 생각보다 젊어서 놀란 게 아니라,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났기에 놀란 것이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역시 너라면 알아볼 줄 알았다.”
“오래전에 속세를 등졌다고 들었거늘... 아니, 어째서 하나도 늙지 않은 것이오?”
“환갑을 넘을 때쯤 젊어졌지.”
“반로환동...!”
무공이 고강하다고 모두가 반로환동해서 세월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천하팔존조차 본래 연배보다 젊게 살지언정 회춘하지는 못했다.
반대로 반로환동을 한다고 무조건 천하팔존보다 강한 것도 아니었다. 반로환동은 무공의 경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별개의 깨달음을 얻어야 했으니까.
반로환동이 무서운 것은, 육신이 전성기 시절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노고수가 일신의 무공을 고스란히 지닌 채 다시금 성장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자가 환갑에 반로환동을 했다면 삼십 년 전에 젊음을 되찾았다는 뜻. 이미 마흔 살에 절대고수였던 자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갔다면....’
꿀꺽!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유이강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손에 진땀이 배어나왔다는 것을 느끼고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암시장에 있는 줄 알고 오셨소?”
“답지 않게 예를 차리는구나. 그 시절엔 훨씬 건방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개차반이라 불린 귀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소. 질문에나 대답해주시오, 염왕(閻王).”
상대의 정체를 알았어도 유이강은 물러나지 않았다.
일신의 무공이 뒤쳐진다 한들 그 역시 한때는 천하를 풍미했던 절세고수였다.
염왕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구천호법의 막내가 많이 컸군.”
강호 무림이 알았다면 한바탕 뒤집어졌을 소리였다.
전멸했다고 알려진 구천호법의 일인이 멀쩡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암시장의 흑상으로 군림했다니.
“네 동료라는 놈들도 네 정체를 아나?”
“동료라니 당치도 않구려. 동업자라면 모를까, 그들과는 절대 동료가 될 수 없소.”
“사이가 좋진 않나 보군.”
염왕이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한 입에 털어넣자 유이강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독을 탔을 거란 생각은 안 하시오?”
“그 태화문의 여아가 준 독 말이냐?”
“...그것도 알고 계셨군.”
“워낙 시끄럽게 떠들어댔으니까.”
“우린 조용히 말했소. 귀하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것뿐이지.”
“그래서 술에 독을 탔느냐?”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오.”
한숨을 삼킨 유이강이 가면을 벗자 주름진 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심후한 내공으로 노화를 억눌렀기 때문에 연배에 비하면 젊은 편이었다.
물론 반로환동으로 젊음을 되찾은 염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알아본 것이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설령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지. 그날 내 손에서 도망친 구천호법의 막내가 내내 기억에 남았었다.”
“귀하를 떨쳐내고자 죽었다는 소문까지 냈었는데... 결국 귀하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나 보오.”
“죽여? 내가 네놈을 말이냐?”
“...아니오?”
유이강이 머뭇거렸다.
“전쟁은 끝났다. 네놈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면 모를까, 쥐죽은 듯이 산다면 건드릴 이유가 없지.”
“백도 정파답지 않은 발언이군.”
“내가 그런 것에 구애될 인간으로 보이나?”
“아니오. 옛날에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 손속만 보면 어지간한 사마외도 뺨을 후려칠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정파 무림인들도 두려움에 떨었겠나. 염라대왕의 화신으로서 일천이 넘는 흑룡교의 마인들이 그가 휘두르는 창염에 잿더미가 되었다.
“내가 흑룡교를 적대한 건 네놈들이 사마외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죽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었어. 조용히 산다면 건드릴 이유가 없다.”
“반대로 조용히 살지 않는다면 건드릴 이유가 넘쳐난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혈교에 귀의했나?”
기습처럼 찌르는 질문에도 유이강은 술잔을 홀짝였다. 상대가 염왕임을 알았을 땐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경악했지만, 지금은 놀랄 만큼 냉철한 신색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오?”
“네놈쯤 되는 녀석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암시장에 혈귀들이 넘쳐나지 않느냐. 흑룡교도인 네놈이 자기 앞마당에 혈귀들이 설치는 걸 방관할 리가 있나.”
아무리 마교도끼리 서로를 원수처럼 대한다지만 흑룡교가 패망한 지 반백 년이나 지났다.
흑룡교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거나, 강호 무림에 복수하기 위해 혈교에 귀의했을 수도 있을 터.
“네놈의 본의가 뭐냐, 귀산자(鬼算子)?”
쪼르르륵....
유이강은 질문에 즉답하는 대신 잔에 술을 따르면서 논제에서 벗어난 얘기를 꺼내들었다.
“사십 년 묵은 서봉주(西鳳酒)요. 너무 귀해서 지금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소.”
“어쩐지 술맛이 좋더라니.”
“우리가 치고받은 세월이 이 술보다 더 오래되었소이다. 난 그 시절에 갇혀서 허송세월하기 싫소.”
“젊은 시절의 앙금은 잊었다?”
“그보다는 지긋지긋해졌다고 하는 게 맞겠소. 교의 생존자들은 교를 재건하니 뭐니 떠들어댔고, 나도 얼마간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겨워졌지.”
“신심 투철한 구천호법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군.”
“후후, 오랫동안 강호를 떠돌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할까. 노후를 교의 재건에 허비하는 것도 아깝고 말이오. 뭐, 그 시절을 못 잊고 허송세월하는 자들도 있긴 했지. 이를테면 흑접 같은 자들.”
“그건 또 뭐하는 놈들이냐?”
“보잘 것 없는 살수들이오. 얼마 전에 사라졌지. 그들은 나를 몰랐지만, 난 그들을 알고 있었소.”
만약 그가 흑접처럼 교를 재건하겠다고 설쳤다면, 그 또한 흑접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으리라.
“난 내 인생에 만족하오. 강호에서 한 발짝 빗겨나면서 적당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거든.”
귀한 서봉주를 목구멍에 털어넣은 유이강이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염왕을 노려봤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혈교에 귀의한다? 그건 죽어간 전우들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내가 바라는 안온한 삶도 아니외다.”
“그럼 바깥의 혈귀놈들은 뭐냐?”
안 그래도 한껏 좁혀진 유이강의 미간에 더욱 깊은 시름이 파였다.
“서태진이라고 아시오?”
“모른다. 그건 또 뭐하는 놈이냐?”
“흑상이오. 대지주 가문 출신인데, 비단길을 이용해서 거만의 부를 쌓은 상인이지. 본래는 그의 부친이 흑상이었는데, 몇 년 전에 그가 부친의 뒤를 이었소.”
아무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언급할 리가 없다.
염왕이 지긋이 응시하자 유이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유를 밝혔다.
“서태진의 진짜 신분은 혈교도요. 정확한 지위는 모르지만 느껴지는 기도를 보건대 교성으로 추측하오.”
어쩌다 보니 흑룡교의 잔당과 혈교의 주구가 흑상으로서 모인 것이다. 그러나 유이강이 먼저 그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서태진의 무위를 떠나서, 그를 쳐죽이면 배후에 있는 혈교가 나설 테니까.
“서태진, 그놈이 다른 흑상들을 포섭했소.”
돈이나 권력을 대가로 준 것은 아니다. 흑상은 더 큰 부와 권력을 원하지만, 서태진이 약속한 것은 흑상의 힘으로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젊음을 되찾아주겠다고 살살 꼬셨지. 당연히 진짜로 젊어지는 건 아니오.”
“사악한 술법을 썼군.”
“그렇소. 하나 효과는 있었지. 서태진에게 포섭된 흑상들이 십 년은 젊어졌더이다.”
“모든 흑상이 혈교에 포섭됐나?”
유이강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날 포함해서 세 명은 거부했소. 다른 두 명은 돌연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렇게 유이강을 제외한 흑상들을 제거하고, 다른 흑상들과 함께 유이강을 고립시켰다. 그가 암시장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제안을 하겠소, 염왕.”
“혈귀놈들을 쓸어달라고?”
“그렇게 해준다면 대환단을 드리겠소.”
염왕이 서태진을 죽인다면 한동안 잠적할 생각이었다.
칠사도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광명마교가 쳐들어오든, 서태진의 죽음에 분노한 혈교가 복수를 천명하든 두 마교의 화살은 염왕을 향하리라.
“어쩌겠소?”
“거절한다.”
“그렇군. 거절... 뭐요?”
유이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득하는 게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이야?
“...대환단을 얻으러 온 거 아니었소?”
“그렇긴 한데 네놈에게 휘둘리는 건 싫어서. 대환단은 아쉽긴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지.”
유이강은 기가 막혔다. 대환단을 간절히 원해서 비갑채주와 칠사도의 목을 친 줄 알았는데, 염왕은 의외로 미련없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럼 칠사도는 왜 죽인 거요?”
“일월신교를 턴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장강수로맹도 턴 건데, 거기에 칠사도가 있더군. 덤비길래 죽인 거다. 일부러 죽인 건 아니야.”
무려 사대마교 중 둘을 건드렸다는 정신 나간 말에 유이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놈이라는 건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나갈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
“뭐 이런 망나니 같은 작자가...!”
“혹시나 현상금이 걸려 있나 했는데 아니라니 어쩔 수 없군. 그럼 난 가보겠다. 술 잘 마셨다.”
남은 서봉주를 호리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킨 염왕이 입가를 닦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제야 유이강은 그의 등에 염왕도문의 상징인 염마도(閻魔刀)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이채를 띠었다.
“염왕, 칼은 안 가지고 다니시오?”
“가지고 다닌다.”
염왕이 한쪽으로 손을 뻗자 유이강의 방에 걸린 고풍스러운 유엽도 한 자루가 쭉 빨려들어왔다. 칼등으로 어깨를 툭툭 친 염왕이 짓궂게 입가를 들어올렸다.
“현지에서 조달해서 말이지.”
“...나가시오. 꼴 보기 싫어졌소.”
정말로 저 밉살스런 얼굴을 일 각이라도 더 본다면 홧병이 도져 정기신 합일이 깨질 것 같았다.
염왕이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나가자 유이강이 빠득 이를 갈며 하인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오냐. 문에 소금 좀 뿌리고 와라. 가장 좋은 소금으로 말이다. 다시는 저 미친놈이 안 오도록 말이다.”
만약 염왕이 사마외도였다면 ‘광마(狂魔)’라고 불렸을 것이다. 미친 인간과 말을 섞으니 자신마저 저 광기에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저런 인간에게 교주를 잃은 게 흑룡교 제일의 수치다. 교주, 죽을 땐 죽더라도 저 인간과 동귀어진하지 그러셨소?’
사무치는 원망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염왕이 거절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태화문의 협조를 끌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 * *
염왕은 저 아래에 있는 암시장을 내려다보았다.
삼경이 훨씬 넘은 밤인데도 암시장은 불야성처럼 화려한 야경을 자랑했다. 하지만 초월적인 기감을 지닌 염왕은 암시장의 어둠에 도사린 악의를 느끼고 있었다.
혈교가 퍼뜨린 비약이 암시장을 좀먹고 있었다. 염왕은 혈라분에 대해 잘 모르지만, 혈교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챘다.
“혈귀놈들은 예전부터 음습했지. 사람들을 현혹하고 병들게 하는 데 도가 튼 놈들이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자신 말고도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염왕은 어둠 속에 시선을 주었다.
“엿듣는 게 취미냐, 늙은 후배?”
“...설마 전대 천하팔존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가 근처에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귀산자가 기막(氣幕)을 쳐서 소리가 새진 않았을 텐데, 용케 들었구나.”
“밀도청(密盜聽)이라고 합니다.”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대화가 새어가지 않도록 주변에 기막을 친다. 매번 전음을 구사하는 것보다 더 편리하기 때문. 하지만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공부가 있다면, 그걸 뚫는 공부도 있기 마련이다.
‘전대 천하팔존인 염왕이 젊음을 되찾아서 더욱 강해졌다면... 이자야말로 천하제일인일지 모른다.’
옛날에도 걸어다니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선배님께서 강호에 나오신 목적을 이 말학 후배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상당히 직설적이군.”
“송구합니다.”
“아니, 됐다. 나도 직설적인 걸 좋아하니까. 하지만 내가 얘기할 이유가 없구나.”
“....”
“뭐, 그래도 말해주마. 하나는 사문의 일과 관련 됐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기(天氣)와 관련 됐느니라.”
“천기...라고 하셨습니까? 이젠 천기도 보실 줄 아십니까?”
“그래, 늙은 후배는 모르겠지만 천기가 요동치고 있다. 곧 이 땅의 운명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나타날 것 같군. 그게 뭔지 확인하러 나왔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고, 알아도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 함부로 천기를 누설한 죄는 크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군. 하늘에 세 개의 별이 떴다.”
“예...?”
“세 명에 의해 이 땅의 운명이 바뀔 거다.”
염왕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천기가 말한 세 명이 누구인지는 그도 몰랐다.
하지만 상단전이 예고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근처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