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5화 (185/450)
  • 33화. 큰손 (4)

    고수들이 침묵했다. 짧게 내뱉은 한마디가 심령을 자극한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있어 십오만 냥은 그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액수는 아니다.

    정말 무인상을 원한다면 그 이상을 지불하지 못할까.

    “.......”

    그런데도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채 침묵에 잠긴다. 사회자도 당혹스러운 티가 역력했다.

    그 역시 무공을 익혔지만 그 수준이 높지 않은 탓에 고수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 십오만 냥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십칠만 냥.”

    불현듯 위층에서 들려온 목소리.

    강엽의 내공 화후를 감지했음에도 재밌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조영옥이나 풍도마장은 아니다.’

    또다른 귀빈이 개입한 것이다.

    “십팔만 냥.”

    “십구만 냥.”

    “이십만.”

    오만 냥이 순식간에 이십만 냥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앞선 경쟁에 비하면 소소한 금액이었으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두 고수가 돈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공방을 겨루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강엽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더 비싸지면 깨끗이 포기한다.’

    무인상의 무공을 헤아려보면 완성본의 깊이는 아마 자성검법에 못지 않을 것이다.

    본래라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절세신공.

    그러나 금패무고를 열람할 수 있는 지금, 저 무인상이 어마어마한 액수를 들이면서까지 얻을 가치가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야차마곤은 협객의 유산이 스러지는 것을 한탄할지 몰라도 강엽은 그 정도까지 사명감을 갖고 있진 않았다. 관영신창의 사연이 안타깝긴 해도 그뿐. 재산을 함부로 낭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후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십만 냥.”

    지지부진하게 밀고 당기느니 한 수로 끝내버리겠다는 건가.

    백서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할 수 없지. 우리 돈을 다 합쳐도 오십만 냥이 안 되는데.”

    강엽이 협객의 무공을 복원하길 바랐던 야차마곤도 쓴웃음만 머금었다.

    그렇게 관영신창이 남긴 무인상이 누군지 모를 귀빈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백만 냥.”

    일행과 같은 층에 있는 사람.

    그러나 조금 더 앞에 있는 사내가 내뱉은 나직한 목소리가 경매장을 다시 한번 적막 안에 던져놓았다.

    아무리 절세고수의 유산이라도 불완전한 무공인데 백만 냥이나 주고 사겠다니?

    강엽마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사내를 바라봤다.

    “관영신창은 흑룡교와의 전투에서 패할지언정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싸운 사나이였지. 그런 남자의 유산이 후대에 이어지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것은 비극이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마치 관영신창을 잘 알고 있는 지인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지?’

    가면을 쓰고 있기에 얼굴은 볼 수 없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로 인해 젊은 사람이라는 것만 어림으로 짐작해볼 따름.

    고개를 슬쩍 돌린 사내가 강엽과 위층에 있는 누군가를 차례로 힐끔거리고는 차갑게 일갈했다.

    “수습할 자신이 없다면 꺼져라, 애송이들.”

    “...귀하는 수습할 자신 있소?”

    위층에 있는 귀빈이 물었다.

    “전반부가 없는 건 저 젊은이나 그쪽이나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러는 네놈은 갖고 있느냐?”

    “....”

    귀빈이 침묵하자 사내의 가면 속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나왔다.

    “전반부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무공의 오의를 터득하면 소실된 초식은 복원할 수 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후반부의 초식만 보고 무공의 근간에 깔린 오의를 터득하여 무(無)에서 재구축하겠다는 말이었다.

    강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론상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러려면 창술의 형(形)과 식(式)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무공을 만든 종사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하고.’

    그럼에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무공은 단순히 몸이나 병장기를 놀리는 기예가 아니라 창안한 자의 의념이 담긴 분신. 관영신창의 무맥을 잇지도 않은 자가 그걸 복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그러나 강엽은 사내가 왠지 그 일을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친김에 초음으로 사내의 경지를 살필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일전에 낭왕과 대련했을 때와 비슷한 예감. 초음을 쓰는 즉시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태화문의 풍도마장보다 더 강할지도....

    “어쨌든 저 무인상은 내가 입찰했다. 애송이, 관영신창의 무공을 진지하게 복원할 생각이 아니면 꺼져라. 거기 위층에 있는 네놈도 그만두고. 저기 애송이가 자극하는 바람에 장난질을 한 것 같은데.”

    “흐음.”

    고민이 느껴지는 침음이었다.

    하나 백만 냥 이상을 내는 건 아깝다고 여겼는지 혀를 차며 말했다.

    “...알겠소. 저 무인상은 귀하의 것이오.”

    “현명하군.”

    오연하게 자리에 앉은 사내가 단상의 사회자를 향해 턱짓했다.

    “정리됐으니 다시 진행하거라.”

    주인인 양 행세하는 광오한 태도. 몇몇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미간을 모았지만, 정작 사회자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사내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순서는....”

    * * *

    “이런이런, 간만에 재밌는 친구가 나타나서 골려주려고 했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인가.”

    가면의 중년인이 쓴웃음을 짓는 모습에 조영옥이 아미를 모았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만의 부를 쌓았어도 불완전한 무공에 백만 냥이나 투자하는 건 망설여지나 보군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구려. 소기의 성과를 거둔 걸로 만족해야지.”

    “소기의 성과요?”

    “불완전한 무공으로 백만 냥이나 벌지 않았소.”

    “...!”

    “원래는 젊은 친구를 겨냥한 거였는데 뜻밖의 월척이 걸렸구려.”

    “...만약 그가 응하지 않았다면요?”

    “그래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요.”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옮겼을 뿐이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

    기이한 침묵. 하지만 조영옥은 가면 속 눈매가 호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흑상....’

    태화문의 이공녀이자 경매장의 귀빈인 그녀도 누가 흑상에 속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경매장의 주인이 흑상 중 한 명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흑상의 일원이 묻는다.

    “소저도 대환단을 노리시오?”

    “그러는 대인께서는요?”

    “난 관심 없소.”

    “무려 대환단인데요?”

    “다른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조영옥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대환단이 천고의 영약이기는 하나 모든 이에게 그렇진 않았다.

    음한지기의 내공 심법을 익힌 이에게는 극독이나 매한가지.

    “그렇지만 내 친구들은 관심이 넘치나 보오. 자기들은 오지 않은 주제에 대리인만 잔뜩 보냈구려.”

    아래층에 흑상의 대리인들이 잔뜩 있다는 말.

    다른 흑상들이 대리인을 보내겠다고 통보한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안 건지 의문이었다.

    “욕심쟁이 친구들이 매상을 올려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다만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소저께서도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오.”

    “대인의 충고는 유념하지요.”

    “저 남자도 마음에 걸리고.”

    조금 전에 관영신창의 무신상을 산 장발의 사내를 말함이었다. 행색은 초라해도 예삿사내가 아니었다.

    삼화취정을 목전에 둔 조영옥도 사내의 기도를 읽지 못했다.

    사내가 기도를 숨기는 데 특화된 무공을 익혔거나 그녀보다 고절한 경지에 올랐다는 뜻.

    [노사께선 어떻게 보셨나요?]

    [그는 틀림없는 고수요. 이 늙은이도 통 읽을 수 없구려. 나이는 젊은 것 같은데, 어쩌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르겠소.]

    [그 정도라고요?]

    태화문을 대표하는 절세고수가 이토록 높이 평가할 줄이야. 조영옥은 사내의 뒷모습을 향해 새삼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소. 앞서 했던 말도 마음에 걸리고....]

    [...?]

    [관영신창을 아는 눈치였소. 단순히 이름이나 들어본 것 같진 않고, 실제로 본 사람처럼....]

    [노사께서도 관영신창을 아시나요?]

    오십 년 전이면 부친인 번천광야 조광해 역시 후기지수 소리도 듣지 못할 어린 나이.

    그나마 부친보다 나이가 많은 풍도마장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도마장이 씁쓸한 얼굴로 백염을 쓸어내렸다.

    [그 시절엔 수많은 고수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소. 관영신창 역시 그런 고수였지.]

    [역시 알고 계셨군요.]

    [이름만 들어봤을 뿐 만난 적은 없소. 그 시절 이 늙은이는 약관의 애송이였으니까. 반면에 관영신창은 이미 완성된 무인이었지.]

    [그런 사람이 흑룡교와 싸우다 전사했군요.]

    [요충지에 있는 마을을 공격하던 흑룡교도 천 명을 홀로 막아냈다고 들었소. 무려 구천호법이 이끌었던 정예군세를 말이오.]

    [......!]

    [비록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에 무림맹은 요충지를 지킬 수 있었지.]

    그런 전투들을 무수히 치른 끝에 무림맹이 정마대전에서 승리하고 흑룡교를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저 흑상도 관영신창의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게 아닌가 싶소. 비록 불완전한 무공이라지만, 구천호법과 비견되는 초고수의 무공을 얻을 기회가 흔하겠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장발의 사내는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한데....

    ‘처음에 십오만 냥을 지른 녀석도 헷갈리지만, 이자는 아예 파악할 수가 없구나.’

    설마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올라 삼화취정에 이른 자신이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 테지만, 풍도마장은 사내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뒤통수가 따갑구나.]

    불현듯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

    풍도마장의 이마에 파인 밭고랑이 더욱 깊어졌다.

    [고인께선 뉘시오?]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난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모시는 아가씨나 잘 보살피도록.]

    [그게 무슨 말씀이오?]

    [감이 무디군. 혈귀놈들의 기척이 소란스럽지 않나. 교성급도 있는 것 같은데.]

    [...!]

    [몰랐나? 삼화취정에 올랐어도 전성기에선 내려온 모양이군. 정기신의 균형에서 흐트러짐이 느껴진다.]

    [당신은 대체...!]

    [아, 그리고 대환단은 탐내지 말도록. 그건 내가 찜해놓은 거니까.]

    이미 대환단을 차지한 것마냥 지껄이고 있는 사내였다. 풍도마장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

    ‘공녀가 포기할 리가 없거늘....’

    대공자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개세적인 무공으로 짓눌러야 한다. 조영옥이 단기간에 강해질 방법은 현재로선 축기량을 늘리는 것밖에 없었다.

    ‘한데 저 사내는 백만 냥이나 썼는데 대환단을 살 돈이 있단 말인가?’

    아니, 저 남루한 사내의 수중에 백만 냥이나 되는 거금이 있는지도 의아했다. 돈이 있다면 일부러 초라하게 하고 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설마 힘으로 강탈하려는 건가...?’

    찰나 상단전을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에 풍도마장의 노안에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 * *

    이후 몇 가지 경매품들이 스치듯이 지나가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사회자가 불법을 설파하는 승려처럼 경건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으로 이번 경매에서 가장 귀한 물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소생이 이 자리에 선 이래로 이토록 귀한 물건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군요.”

    수레를 끄는 무인들도 한껏 경직된 낯빛이었다. 작은 목함을 옮기는데도 떨어뜨릴까 봐 극히 조심하는 태도.

    사회자가 침을 삼키며 선언했다.

    마침내 소림의 대환단이 경매장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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