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큰손 (3)
“일이 꼬였군.”
강엽이 걸어가면서 말한 한마디에 일행의 시선이 일순 모였다.
섭선으로 입을 가린 강엽이 말했다.
“태화문이 왔다.”
“...음, 아까 그 사람들이 태화문이었나?”
야차마곤도 뭔가 알아차린 듯 화려한 사두마차가 왔던 곳으로 슬그머니 눈길을 주었다.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조영옥이 내리는 건 봤어. 근데 그 여자보다는 함께 있던 노인이 더 신경 쓰이던데....”
“풍도마장이다.”
과거 조천방과 거룡방의 전쟁이 끝난 이후 조영옥과 함께 진영을 찾아왔던 전대 기인.
전성기 시절 태화문주와 함께 사천 무림에 두려움을 심어줬던 노고수가 언급되자 다른 일행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안색이 굳어졌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풍도마장의 이름을 들었던 당묘정과 소창후는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흑상과 혈교가 복잡하게 뒤얽힌 암시장에 태화문이라는 변수가 추가되는 순간.
강엽도 강엽대로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조영옥의 등장이 그들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보아하니 경매장에 온 것 같은데... 별일 없이 그냥 넘어가면 좋겠네.”
옆에서 백서희가 중얼거렸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겠지.
비록 조영옥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지만 이번 일은 완전히 별개였다.
‘태화문은 암시장에 지분을 가진 세력. 경매장에 어떤 물건이 나올지 미리 알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때 백서희가 작게 속삭였다.
“혹시 조영옥에게 부탁하면 흑상에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 그녀의 위치쯤 되면 흑상과 연줄이 있을 테니까.”
잠시 멈추는 일행의 발걸음. 하지만 강엽은 기대하지 않는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커서 거절할 수도 있어. 우리가 흑상과 싸우면 그녀도 피해를 보게 돼.”
“오히려 흑상에 알릴 수도 있어요.”
당묘정의 첨언에 다른 사람들도 공감했다.
‘함부로 의지할 여자는 아니지.’
몇 번 호의를 받긴 했지만 강엽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한 조영옥을 믿을 생각이 없었다.
태화문의 차기 권좌를 노리는 그녀가 흑상과 척지는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조영옥과 접촉하는 건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두자. 정말 방법이 없을 때 말이야.”
물론 그땐 탈출할 준비도 해야 하리라.
일행도 강엽의 말뜻을 알아듣고 납덩이처럼 굳어진 안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경매장의 입구로 가니 무인들이 막아섰다.
“경매장에 오셨습니까?”
“그렇다네.”
야차마곤이 험상궂은 면상을 들이밀자 무인들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느 분께서 입찰하실 건지요?”
“저분 공자님과 소저일세. 그건 왜 묻는가?”
“죄송하지만 일반 손님들께선 수행원은 인당 한 명씩만 대동하실 수 있습니다.”
“뭣이?”
야차마곤의 미간이 좁혀지자 정말 흉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강엽이 물었다.
“그럼 나머지 둘은 대기하고 있어야 하나?”
“그렇습니다.”
“흠....”
하긴 좌석은 정해져 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도떼기 시장밖에 더 되겠는가.
청수가 전음을 보냈다.
[저와 소창후가 남겠습니다.]
강엽과 당묘정은 입찰자의 신분으로 왔으니 들어가야 하고, 백서희 역시 나름 할 일이 있었다.
남은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른다면 가장 강한 야차마곤이 따라가는 게 나을 터.
[괜찮겠나?]
[예, 저흰 암시장을 좀 구석구석 돌아보겠습니다. 어제 들으니 중독자들의 소굴이 따로 있더군요. 거기 가면 뭔가 알아낼지도 모릅니다.]
[부탁하지.]
[그럼.]
청수가 소창후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도 알아듣고 일행에서 빠졌다.
그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본 무인이 말했다.
“입장하시려면 가면을 쓰셔야 합니다. 안에 계시는 동안 이걸 착용하십시오.”
누가 어떤 물건을 사갔는지 모르게 하려는 조치였다. 보물을 노린 자들이 강도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
경극에서나 쓸 법한 화려한 가면을 쓴 일행이 서로를 바라봤다. 남녀 따라 두 종류로 나뉘었기에 가면만으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입찰하실 땐 이 막대기를 들고 액수를 불러주시면 됩니다. 돈은 경매가 끝난 이후 사람이 따로 받으러 갈 거고요. 혹시 전표를 가져오셨습니까?”
“그것도 확인하는가?”
“아닙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무인들은 일행이 돈이 없거나 갖고 온 전표가 진짜인지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다면 암시장을 능멸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주 비싸게 말이다.
* * *
일행 모두가 가면을 썼다고 자리에 앉을 순 없었다. 입찰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만 앉을 수 있기 때문.
일행 중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강엽과 당묘정만 배석하고 백서희와 야차마곤은 뒤편에 섰다.
손님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좌석을 약간씩 떨어뜨려 놨기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일은 없었다.
먼저 온 손님들의 면면을 쭉 둘러본 강엽은 위쪽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올렸다.
‘조영옥과 풍도마장은 이층인가.’
아래층에선 각도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위층에서 강대한 기도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백 개나 되는 자리가 모조리 채워지자 사회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금일 본 경매장을 방문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상투적인 인사가 흘러나오는 동안 종업원들이 좌석을 돌아다니며 다과를 대접했다.
경매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손님들이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간단한 요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야차마곤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곡차가 없는 게 아쉽구만.”
백서희가 눈을 흘겼다.
“호위가 술 마시면 실격 아닌가요?”
“에잉, 말이 그렇다는 게지. 나도 여기 와서 술을 마실 생각은 없네. 뭐가 들어있을지 알고 마시겠나.”
물론 경매장이 손님들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위라면 주인의 안전을 위해 매사에 철저해야 하는 법.
차향을 맡은 당묘정이 말했다.
“뭐가 들어있진 않네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소?”
“독을 다루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후각이죠. 그래서 본문의 직계 혈족들은 어릴 적부터 수만 가지 약과 독을 접하면서 냄새를 구분하는 훈련을 한답니다.”
물론 모든 독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색무취(無色無臭)의 독도 있으니까. 당묘정은 차를 혀끝에 대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셔도 안전해요.”
“굳이 이상한 걸 타진 않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엽은 다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백서희와 야차마곤이 가만히 있는데 혼자만 먹기는 미안했던 것이다.
“아, 시작된다.”
백서희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멀리 향했다.
바퀴 달린 수레를 밀고 온 무인들이 단상 위의 석대(石臺)에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올려두는 모습.
보자기를 치우고 손님들의 입에서 터진 탄성에 사회자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말려올라갔다.
“내빈 여러분께 이 귀한 보물을 소개해드려 기쁘기 한량없군요. 저 멀리 서역에서 들여온 최상급의 금강석! 영롱하게 빛나는 게 참으로 크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잠시 동안 대식국(大食國)의 왕궁에서 나온 보석이라느니 뭐니 하는 소개가 이어진다.
보석의 영롱한 빛깔에 홀린 손님들이 막대를 들고 경쟁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 백서희가 말했다.
“대환단은 나중에 나올 건가 보네.”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
이후 차례대로 옛 황제의 무덤에서 도굴했다는 보물이나 이백이나 두보 등 시의 거장들이 남긴 친필본이 나오자 강엽이 움찔했다.
누가 시와 경전을 공부한 유생 출신 아니랄까 봐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던 것이다.
당묘정이 강엽의 변화를 눈치챘다.
“저런 거 좋아하세요?”
“아, 그게 그러니까....”
“본문에 왕희지의 친필본이 있는데.”
“...정말로?”
“네. 아버님의 집무실에 걸려 있죠. 아버님이 계실 때 본문을 찾아오시면 보실 수 있을지도....”
순간 강엽은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뒤에서 가자미눈으로 게슴츠레 쳐다보는 백서희만 없었어도 덜컥 수락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를 압박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강엽이 호흡을 골랐다.
“...아무리 그래도 당문주님의 집무실을 사사로이 찾아갈 순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찾아가겠소.”
“네, 나중에 오세요.”
당묘정이 입가를 가리고 방긋 웃자 백서희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저도 같이 가도 되죠?”
“물론이죠. 두 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이백과 두보의 친필본이 삼십만 냥에 팔린 이후 본격적으로 무림과 관련된 경매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병장기가 올라왔는데, 일행 모두 좋은 병장기를 갖고 있었기에 시큰둥했다.
어떤 병장기들은 문인들의 친필본보다 더 비싸게 팔렸는데, 무림에 이름을 남긴 장인이 만들었거나 유명한 고수가 썼다는 사연이 있었다.
강엽의 눈길을 끄는 경매품이 올라온 건 병장기들의 순서가 끝난 이후.
“오십 년 전 흑룡교가 발호했을 당시 수많은 무림의 정영들이 목숨 바쳐 싸웠지요! 개중엔 안타깝게도 후인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절세고수가 있었습니다! 이 청동무인상은 관영신창(貫影神槍)이 남긴 비급! 비록 후반부지만 그 가치는 굉장히 높습니다!”
사회자가 열변을 토했지만 그에 호응하는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영신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몇 명만 약간의 호기심을 보일 뿐.
강엽이 턱을 매만졌다.
“관영신창이라....”
“왜 그래?”
“내가 남은 절반을 갖고 있어서.”
“뭐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묘정과 야차마곤은 물론 백서희도 깜짝 놀랐다.
“예전에 구했는데 잊고 있었군.”
비호창 양평. 낭인전의 은천패급 고수였으나 낭왕삼칙을 어기는 바람에 척살된 자.
그가 구양세가로부터 뇌물로 받은 무인상 절반은 강엽이 전리품으로서 보관하고 있었다.
‘잠깐 연구만 하고 처박아뒀지만 말이지.’
무인상의 창술을 익히기보다는, 창술에 대응하는 법을 고찰하기 위해 분석했던 무인상.
창술에 담긴 요체를 어느 정도 알고 난 뒤로는 집구석에 처박아둔 채 잊고 있었는데, 남은 절반을 몇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이다.
“그럼 살 거야?”
“글쎄....”
그때도 처치 곤란이었던 물건을 억지로 떠맡은 것에 불과했다.
지금 와서 비싼 돈 주고 살 가치가 있을까.
“오만 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절세고수의 비급이라고 하지만 절반만 남은 비급. 장병기를 소지한 몇몇 무림인들이 손을 들 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 야차마곤이 말했다.
“관영신창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만, 흑룡교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라면 협객 아닌가?”
“그건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무인상의 무공은 정도를 따랐으니까요.”
“협객의 유산이 스러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구만. 익히지 않는다면 기증할 생각은 없나?”
“기증? 어디에 말입니까?”
“당연히 낭인전이지. 실제로 낭인전이 수집한 무공 비급들 대부분은 이런 데서 얻은 것일세.”
무맥이 멸문해서 전승이 끊긴 무공 비급들.
낭인전은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그런 무공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 무공을 기증하면 의뢰를 완수한 것과 동등하게 취급되거든. 절세고수의 비급쯤 되면 금패무고에 들어갈 걸세.”
“금패무고라....”
그러고 보니 금패가 됐는데도 금패무고는커녕 은패무고도 못 가봤다.
무공관을 확립한 지금 다른 무공을 탐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무공을 더욱 연마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금패무고는 어떤 곳입니까?”
“말 그대로 절세무공들이 잠든 곳이지. 동패무고는 각 분타에, 은패무고는 각 성의 가장 큰 도시에 있다면 금패무고는 대륙에 두 곳밖에 없네. 강북과 강남.”
야차마곤은 자세한 위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서희와 당묘정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서라도 금패무고에 한번 들러보는 걸 추천하네. 때론 무공 비급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문이 넓어지지. 익히지 않더라도 도움은 되지 않겠나.”
강엽도 금패무고의 위치는 낭왕에게 들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사실 사천으로 오는 중에 들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그냥 생략했었다.
“자네가 저 관영신창이라는 협객의 무공을 기증한다면 금지패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걸세.”
야차마곤도 돈을 보태겠다고 하자 거절하기도 뭐해졌다. 야차마곤은 본인이 익힐 것도 아닌데 선뜻 오만 냥을 내겠다고 한 것이다.
‘하긴. 기왕이면 끝을 보는 게 낫지.’
길쭉한 막대를 들어올린 채 내공을 담아 말했다.
“십오만 냥.”
“.......”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내공 화후를 느낀 고수들이 침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