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잠입 (2)
데엥-! 데엥-!
야심한 밤에 울리는 경종음.
강엽의 품 안에 몸을 기댄 채 잠들었던 백서희가 눈을 번쩍 떴다.
“적이 온 거야?”
“아마도.”
먼저 잠에서 깨어난 강엽이 침상에서 나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백서희가 복장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창문을 슬쩍 열어보자, 횃불을 든 방도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재빠르게 병장기를 챙겨서 각자의 자리로 달려가고 있는 일사불란함.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다 보니 위급 상황이 되면 바로 대응하는 습관이 든 것이겠지.
“다 입었는데 왜 안 나가?”
흑단처럼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백서희가 물었다.
열락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앞머리가 살짝 젖은 채 상기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면서 강엽이 말했다.
“어떻게 싸우는지 좀 볼까 해서.”
“응?”
“이번에 암시장에 방도들을 데려가기로 했거든.”
애초에 숙정방에 막대한 투자를 한 것 자체가 병력이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방도들이 잘 싸운다면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겨도 되리라.
우우우웅......!
기감을 넓게 퍼뜨리자 몰려오는 기척들이 포착됐다.
굶주린 맹수처럼 사납고 폭급한 게 혈교도들과는 뭔가 궤가 다른 느낌.
처음 접하는 기운이지만, 강엽은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맹월림.”
“아, 운남에서 날뛰는 새끼들?”
“한 번 당했는데도 또 온 걸 보면 참 어지간히 독이 올랐나 본데....”
저번엔 은천패급 두 명이 왔다고 했던가?
그런데도 또 왔다면 승산을 자신할 만한 전력을 갖췄다고 봐야겠지.
“차라리 잘됐군.”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찜찜했거든. 확실히 밟아둬야 저놈들도 당분간 못 오겠지.”
방도들의 실력도 확인하고, 겸사겸사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놈들도 처리할 좋은 기회였다.
창밖을 향한 강엽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저기가 숙정방이냐?”
짐승의 털가죽으로 옷을 지어입은 흉터 사내.
황소만한 늑대를 탄 사내의 질문에 아래 있는 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렇습니다.”
“작은 장원이군. 너무 작아서 한 입에 털어먹을 수 있을 정도야.”
객관적으로 숙정방이 작다고 할 규모는 아니었다.
백 명이 넘는 방도들이 기거하는 만큼 웬만한 부잣집의 장원보다는 훨씬 거대했으니까.
다만 맹월림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사내가 봤을 땐 하찮기 그지없었다.
“저기 방주가 그렇게 미인이라면서?”
“예, 노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 났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사내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자 입매를 가로지른 흉터가 흉물스럽게 꿈틀거렸다.
“괜찮군. 미인도 얻고, 땅도 얻고.”
노주만 점령하면 금사강을 통해 운남에서 사천까지 통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윗선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사천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우리가 사천에 진출해도 막을 놈들이 없다.’
사천 곳곳에서 혈귀들이 창궐하면서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면 맹월림은 후방을 휘젓고 그 대가로 사천 남부를 챙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노주를 손에 넣어야 했다.
“노주의 주인은 숙정방이고, 그 숙정방의 주인은 귀영이라는 자입니다. 하지만 귀영은 무슨 일인지 몇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지요.”
“그 단혼마백을 죽였다는 놈 말이군. 한데 일전에 갔던 놈들은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아창족(阿昌族) 전사들이었습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매단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같은 맹월림의 전사들을 욕했다.
“천인장(千人將)도 배출하지 못한 놈들이 무리수를 뒀군. 얌전히 다른 부족들 뒤나 따르면 될 것을.”
강호 무림의 방파들과 달리 맹월림은 오랫동안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했던 부족들의 연합.
맹월림주의 강대한 존재감에 힘입어 하나로 뭉치긴 했으나, 경쟁하고 반목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딴 병신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건 짜증나지만... 뭐, 덕분에 공을 쌓을 수 있으니까. 안 그러냐?”
그가 뒤를 돌아보자 병장기를 들어올린 전사들이 살기 어린 웃음이 흘리며 격하게 동의했다.
“자, 노주를 접수하러 가라! 쓰레기들아!”
“호우우우우!”
“여자는 죽이고 사내는 겁탈하자!”
“이 새끼는 뜨신 밥 처먹고 뭔 개소리야!?”
별안간 나온 헛소리에 핀잔이 나왔지만, 이내 그 핀잔조차 사기충만한 함성에 파묻혔다.
흉터의 사내처럼 거대한 늑대를 탄 선두의 전사 열 명이 곡선을 그린 만도(彎刀)와 철창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저 멀리 보이는 대문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쯤엔 숙정방의 문지기들도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황.
그들은 굳이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대신 안쪽으로 들어가서 빗장을 걸어잠갔다.
“으하하, 이제 와서 알려봤자 한참 늦었다!”
무장한 전사들을 태운 늑대들이 담장을 박차고 가볍게 담장 위로 뛰어오른다.
안쪽에 숨은 문지기들은 당황하면서도 도파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미 그때는 늑대들이 큼지막한 아가리를 벌려 그들을 물기 직전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문지기들이 눈동자의 동공이 한껏 수축채 석고처럼 굳어졌을 때였다.
별안간 밤하늘을 가른 빛살이, 황소만한 늑대의 목덜미를 부지불식간에 관통했다.
캐앵!
“어엇!”
늑대 위에 타고 있던 전사가 경호성을 내며 급하게 뛰어올라 철전을 쏜 흉수를 쏘아봤다.
“.......”
말없이 시위를 잰 가면의 궁수.
고개를 돌린 전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궁수가 걸친 남색의 흉갑뿐이었다.
“이런 개...!”
퍼억!
욕설을 잇기도 전에 목구멍 깊숙이 들이박힌 철전.
순식간에 뒤로 넘어간 동료의 참상에 다른 전사들의 눈이 뒤집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분노의 고함을 지른 그들은 문지기들을 내팽개치고 궁수를 향해 늑대를 몰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인영이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작!
크고 길쭉한 철곤을 휘두른 노란 흉갑의 가면인.
일격에 전사의 머리통을 때려부순 철곤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늑대의 등허리까지 바숴버렸다.
“젠장, 고수들을 숨겨놨구나!”
강시인 홍예칠위가 대답할 리가 만무.
남궁(藍弓)과 황곤(黃棍)이 적들의 손발을 묶는 사이 구사일생한 문지기들은 안쪽으로 도망쳤다.
두 강시가 시간을 버는 사이 변고를 알리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부탁드리겠수, 사범님들!”
곧이어 안쪽에서 요란한 징소리가 울려 퍼지자 전사들의 안색이 무겁게 경직되었다.
기습의 이점을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적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준 것이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
홍예칠위의 두 강시는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각자의 병장기로 전사들을 겨누었다.
그들이 다시 드잡이질을 벌이는 동안 속속들이 담벼락을 뛰어넘은 전사들은 죽어 나자빠진 늑대와 동료의 주검을 보고 크게 놀랐다.
흉터의 사내도 낯짝을 구겼다.
“저놈들은 뭐냐?”
그의 손에 대롱대롱 잡힌 길잡이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새된 비명을 질렀다.
“호, 홍예칠위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귀영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고수들입니다! 놈들이 청우방을 부쉈습니다!”
“청우방은 또 뭔데.”
사내는 청우방에 대해 몰랐다. 작은 방파를 짓밟는 데 노주의 정세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아, 그래. 기억 났다. 네놈이 이 방파에 고수들이 몇 명 있다고 말했었지. 그놈들인가 보군.”
청우방 출신의 길잡이는 자신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사내의 무신경함에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이미 사내의 신경은 두 강시에게 쏠려 있었다.
“가면을 쓴 고수들이라!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길래 아창족 놈들을 쫓아냈는지 보자.”
그가 손을 치켜들자 늑대를 탄 기랑병단(騎狼兵團)의 전사들이 두 강시들을 에워싼 채 공세를 퍼부었다.
동료를 잃은 원한으로 귀화를 토하듯 시퍼렇게 타오르는 안광. 하나 하나는 홍예칠위에 못 미치지만, 늑대들과 전사들은 연수합격을 펼쳤다.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늑대를 피하면 위쪽에서 창이 날아들었다. 그걸 막으려고 움직이면 이번엔 뒤쪽에서 다른 늑대가 달려들어 흉갑을 물었다.
절정고수답게 황곤은 적들의 공세를 막고 피하면서 간간이 반격을 넣었으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전사와 늑대의 합공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남궁이 담벼락과 지붕 위를 오가면서 궁격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위기에 몰렸으리라.
하지만 그 남궁마저 이내 지붕 위로 올라온 적들에 의해 운신이 제약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문득 흉터의 사내가 대뜸 일갈을 터뜨렸다.
“이놈들, 고작 두 명에게 묶여있을 거냐? 손발이 비는 놈들은 모두 안쪽으로 가라! 많이 죽인 놈에게 더 많은 포상을 내릴 것이야!”
“와아아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안쪽으로 들어가는 전사들.
마침 징소리를 듣고 온 숙정방의 방도들이 시뻘게진 눈으로 악을 쓰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아, 네놈들 때문에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앵앵이랑 좋은 시간 보냈는데!”
“으아아아! 죽어, 혈귀 새끼들아!”
요 몇 달간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 혈귀들 때문에 방도들도 악바리 근성밖에 남지 않은 걸까.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당혹해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실로 살벌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뜻밖의 광기에 맹월림의 전사들이 주춤거릴 때 선두에서 달린 고섭풍이 이를 갈며 외쳤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몇 달 전에 강엽이 전수한 무공.
용아십도의 도격이 고섭풍의 손에서 올올이 풀려나와 적들의 살점을 가르고 피를 흩뿌린다.
수련 기간이 짧기에 아직 오의를 깨우치진 못했으나, 옛날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무위.
순식간에 두 명을 베어넘긴 고섭풍이 다음 사냥감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엽이 짧게 말했다.
“은지패급은 되겠는걸.”
“헤에, 예전엔 어느 정도였는데?”
“은인패를 받을까 말까였지.”
숙정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간부였던 만큼 방도들보다는 강했지만, 냉정하게 놓고 보면 고섭풍의 무공이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그랬던 자가 몇 달간 상승 무공을 익히고,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흔히 절정의 경지라 일컫는 외기 발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발경을 대략이나마 이해하고 도격에 싣는 수준까진 올라왔다.
“이만하면 혈령교위와 붙어도 쉽게 지진 않겠어.”
물론 그가 원하는 수준은 이보다 더욱 높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은 맹월림의 전사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고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 저기 단목정도 나왔네.”
백서희가 가리킨 곳. 경장 무복을 입은 단목정이 맹월림의 전사들을 때려눕히며 방도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방주가 되기 전엔 무공도 배우지 못한 만큼 아직은 고섭풍보다 약했지만, 평범한 규수였던 그녀가 맹월림의 전사들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날붙이를 든 적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침착하게 싸우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잘 싸울 수 있도록 용린투를 빌려주긴 했지만... 그래도 수신공의 공능이 정말 크군.’
흑룡교의 용혈들이 몸을 닦기 위해 익히는 공부.
수신공을 수련한 단목정은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했음에도 고섭풍을 제외하면 숙정방에선 가장 강했다.
아무리 영약을 먹고 절세무공을 익힌다 한들 본인의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만약 그녀가 일찌감치 상승 무공을 익혔다면 숙정방의 이름을 드높인 후기지수가 되었겠지.
“근데 정말 도와주지 않을 거야?”
“당분간은.”
이미 단목정에게도 말해놨다. 잡병들과 싸우는 동안에는 관망만 하겠다고.
“그래도 혼자 싸우라고 한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어느새 두 사람이 있는 곳에 온 하후진이 백서희를 힐끔 곁눈질하며 물었다.
“근데 너... 아니, 백 소저는 언제 온 거야? 중경에서 합류한다고 들었는데?”
“일이 끝나서 일찍 왔어.”
“으음, 그렇구만.”
“...?”
어째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는 하후진의 태도가 희한하게 다가왔지만, 하후진은 바로 강엽에게 물었다.
“뭐, 잡것들은 그렇다 치고... 늑대놈들이 나서면 피해가 커지지 않겠냐? 수를 내야 할 것 같은데.”
“홍예칠위를 투입해야지.”
“전부?”
하후진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그들의 위로 다섯 줄기의 빛살이 지나갔다. 황곤과 남궁을 합공하는 적들을 공격하며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도왔다.
대문의 지붕 위에 선 적들의 우두머리가 무어라 분노를 터뜨리면서 강엽 일행을 쏘아봤다.
“그럼 저놈은 내가 맡아야 하나?”
“아니.”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맡지. 맹월림의 무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해보고 싶은 것도 있거든.”
“그게 뭔데?”
“삼화취정의 고수를 죽이기 위한 예행 연습.”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