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잠입 (1)
당문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강엽은 당가타와 접한 거강의 물줄기를 따라 노주에 도착했다.
‘돌고 돌아 겨우 도착했구만....’
떠날 땐 초겨울이었는데, 어느덧 초봄의 기운이 조금씩 고개를 들이미는 계절이었다.
적당히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숙정방으로 가자 문지기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헉, 주, 주군!?”
“그동안 별고 없었나?”
“아, 아마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그게... 아! 혈귀놈들이 쳐들어온 적은 몇 번 있습니다.”
“그건 들었다. 고생이 많았어.”
문지기들의 반응이 약간 어색했지만 그렇게 큰 일은 없었던 모양.
그만큼 하후진이 고생했겠지만....
‘뭐 공짜로 한 것도 아니니까.’
낭인은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그 원칙에 따라 하후진에게는 충분한 보수를 지급했고, 감사의 의미로 선물도 챙겨왔으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방주님께 즉시 기별하겠습니다.”
문지기들이 안쪽으로 가고 얼마 뒤에 단목정이 간부들과 함께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주군!”
“나 없는 동안 고생했군.”
“아닙니다. 한데....”
강엽의 옆을 힐끔거린다. 백서희는 어디 가고 왜 강엽 혼자서 돌아왔는지 궁금해하는 눈초리.
“서희는 다른 일로 따로 행동하고 있다. 중경에서 다시 만날 거야.”
“그렇군요.”
“하후진은?”
“여기.”
바지 위로 장삼만 걸친 채 건장한 근육을 드러낸 하후진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언제 오나 눈알 빠지게 기다렸네. 근데 백서희는 중경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안쪽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한중의 암시장 얘기를 꺼내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방주도 오지.”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장소를 옮긴 뒤에야 한중의 암시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하오문주에 대한 것만 숨기고 지금껏 겪은 일을 나열하자 두 사람도 곧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어째 너는 가는 데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구만. 광명마교, 백환곡, 암시장까지. 너처럼 파란만장하게 사는 놈도 별로 없을 거다.”
“세상이 개판이니 그런 거지. 너도 혈교와 싸웠다면서?”
“말도 마라. 독종 새끼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달라붙던지... 그나마 요즘 좀 잠잠해진 거야.”
“오다가 보니까 그을린 자국들이 많던데.”
“흠흠, 싸우다 보니 생긴 거지.”
사실 그을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싸움의 충격을 못 버티고 무너진 담장들도 꽤나 많았으니까.
단목정이 방도들을 동원해 장원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고 나서야 피해가 조금 줄었을 지경.
하후진이 정색하면서 말했다.
“맹월림 새끼들이 쳐들어온 적도 있어.”
“맹월림이?”
“다행히 많이 오진 않았지. 고수들도 별로 없었고. 은천패급이 두 명쯤 온 게 전부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기실 은천패급이 온다면 어지간한 방파는 버티기 힘들었다.
게다가 홀로 쳐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맙다.”
“수고비는 두둑이 주겠지?”
“아무렴.”
강엽이 챙겨온 물건을 탁자에 내려놓자 하후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영약이다. 이건 네 몫이고....”
중경의 안가에 보관했던 영약들.
일전에 백서희에게 주고 남은 영약들 중에서 가장 좋은 영약을 하후진에게 밀어주었다.
남은 영약은 단목정의 몫이었다.
“축기에 보탬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주군.”
“며칠만 더 고생해라.”
“야, 잠깐만.”
“왜?”
“그 암시장이란 곳 말이야...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냐?”
“너까지 가면 여길 지킬 사람 없어.”
단지 며칠만이라고 해도 그 사이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누가 막는단 말인가?
홍예칠위에게만 맡기는 건 불안했다.
“아니, 백서희도 있잖냐. 그 여자 대신 내가 가도 되잖아?”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찾는 거다. 미행을 하거나 숨어드는 경우도 상정해야 해. 서희만큼 은신술을 잘 쓸 자신 있나?”
“어? 아, 아니... 그건 아니지.”
강엽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은신술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하후진이었다.
그렇다고 청수나 소창후, 당묘정에게 하후진 대신 숙정방을 봐달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야차마곤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설사 받아들여도 이쪽에서 거절해야지.’
자칫하면 홍예칠위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는 노릇.
백도 출신인 그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하후진밖에 적임자가 없었다.
“며칠만 더 참고 기다려봐라.”
그때 단목정이 슬쩍 끼어들며 물었다.
“저, 주군. 암시장에 혈귀들이 있다면 어찌 되는 겁니까?”
“당연히 싸우겠지.”
이제까진 암시장에서 혈라분을 퍼뜨리는 큰손과 본거지를 별개로 생각했지만, 당묘정의 주장을 듣고 나선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당묘정의 말대로 놈들이 약재를 암시장에서 구했다면 혈라분을 다른 데서 만들 이유가 없어.’
암시장이 놈들의 본거지일 가능성도 있었다.
단목정이 의견을 내놓았다.
“본방도 함께 싸운다면....”
잠입할 때는 소수가 함께하겠지만, 본격적으로 싸운다면 세력과 세력의 충돌이 될 것이다.
“혈교가 암시장에 숨었는데도 그냥 넘어간 거라면 둘이 한편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에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바깥에서 호응하는 아군이 있다면 암시장 역시 강엽 일행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터.
“내우외환을 노리자는 거겠지?”
“네, 주군께서 안에서 흔들고 본방이 밖에서 몰아붙이는 식으로....”
“괜찮은 작전이야. 신호만 잘 주고받는다면.”
사실 안쪽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바깥쪽에서도 어떻게든 알 수밖에 없었다. 일행 모두가 절정고수이니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리라.
‘원래는 당문에서 먼저 제안했던 건데....’
당문은 당묘정의 참가를 허락했다.
단목정이 제안한 것처럼 혈교가 숨어있을 시 그들이 외부에서 들이친다는 조건 하에.
숙정방 단독으로 싸운다면 승산이 떨어지겠지만, 당문과 함께 싸운다면 얘기가 다르다.
하지만 강엽은 그러한 속내를 감춘 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단목정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숙정방이 보탬이 될까?”
“본방은 강해졌습니다.”
“그건 인정. 오면서 보니 방도들의 눈빛이 달라졌어. 자세나 호흡도 꽤 안정적이고.”
“하후 무사님 덕분입니다.”
숙정방을 지키면서도 틈틈이 방도들과 대련하며 싸우는 감각을 길러주었던 것.
코밑을 슥 훔친 하후진이 멋쩍게 웃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많이 강해졌다. 네가 보는 것 이상으로. 실전도 많이 겪었고.”
하후진과 홍예칠위가 위험한 싸움을 도맡긴 했지만 숙정방이라고 손 놓고 있진 않았다.
혈귀들이나 맹월림의 무인들이 담장을 넘을 때마다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많은 방도들이 죽었고, 두려움에 질려 야반도주를 꾀했던 자들도 있었으나, 몇 번의 실전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잘 연마된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흑도 특유의 악바리 근성에 상승의 무공과 실전 경험이 더해졌으니 강해질 수밖에.
“아직 애들이 좀 들쑥날쑥하긴 한데, 그래도 어디 가서 허무하게 뒈질 놈들은 아니다.”
숙정방에 씨앗을 뿌린 것은 강엽이지만, 그 씨앗이 무사히 발아할 수 있도록 보살핀 사람은 하후진이었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강엽이 쓰게 웃었다.
“그럼 방주의 말대로 하지. 홍예칠위만 남겨두고 방도들을 동원한다. 하후진도 따라가는 걸로.”
“명을 따르겠습니다.”
단목정이 절도 있게 머리를 숙였다. 탁상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내일 안에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자리를 파하자 단목정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녀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하후진을 향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우물쭈물하다 편안한 밤 보내시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그... 할 말이 있는데.”
“말해.”
단목정이 있을 때는 말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둘이서만 해야 할 내밀한 이야기일까.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 하후진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런 썩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말하지 못하겠네. 미안한데 술 좀 마셔야겠다.”
“...술상 내오라고 하지.”
잠시 후 시비가 술상을 내왔다.
간단한 안주 서너 가지와 대곡주 두 병. 마개를 열자 농밀한 누룩향이 훅 풍겨왔다.
독한 대곡주를 나발째로 불은 하후진이 푸 하고 길게 날숨을 토했다. 그리고는 일생일대의 대적에게 생사결을 청하듯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결연하게 말했다.
“나 단목 방주 좋아한다.”
“푸훕!”
똑같이 병나발을 불고 있던 강엽이 술을 뿜었다. 독한 술이 기도로 들어간듯 한동안 마른 기침이 콜록콜록 이어졌다.
면전에서 벽력탄이 터진 기분이 이러할까.
“지금, 뭐라고?”
“단목 방주, 아니 단목정한테 관심 있다고.”
한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안주도 안 먹고 독한 대곡주를 바닥까지 비운 하후진이 살짝 취기가 도는 얼굴로 말했다.
“원래부터 좋아한 건 아니고, 무공을 가르쳐주면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다가....”
“그래서 고백은 했고?”
“어, 그게 거시기....”
“...?”
“좀 생각해보겠다고 하던데.”
“긍정적인 신호 아닌가?”
“그, 그렇지? 날 싫어하는 건 아니지?”
“싫다면 싫다고 했겠지.”
“역시!”
“매정하게 거절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에둘러 얘기했을 수도 있지만.”
“이 자식아, 너 누구 편이야!?”
“나야 단목 방주 편이지.”
당연하지 얂냐는 듯한 코웃음으로 반박하자 하후진은 차마 대거리하진 못하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친구라는 새끼가 응원은 못해주고.”
“알아서 잘 해봐라.”
단목정이 명목상 수하이긴 하지만 함부로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놓고 도와주진 않겠지만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단목 방주한테 상처 주진 말고.”
“헹, 너나 잘하십쇼.”
“난 잘하고 있는데?”
“잘하긴 개뿔. 보나마나 손도 못 잡았을 게....”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순간 강엽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어렸다. 일순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하후진의 전신이 통나무마냥 뻣뻣해졌다.
“아니, 설마? 아니지? 이보쇼? 저기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야!”
“나 먼저 일어난다. 아, 그리고....”
불현듯 서늘한 눈빛이 꽂히자 하후진은 왠지 모를 위기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또, 또 뭔데?”
“다음부턴 백 소저라고 부르라고. 어딜 남의 여자 이름을 함부로 불러?”
그렇게 승자의 미소를 남기고 사라지자 하후진은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뒤늦게 뒷목을 잡았다.
“크악! 내가 저 목석놈한테 뒤쳐지다니...!”
실로 통한의 외침이었다.
***
“후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욕탕에 몸을 뉘이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후진 녀석이랑 단목 방주라....’
생각해보면 젊은 남녀가 몇 달 동안 같이 지냈는데 아무 감정도 안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 감정이 꼭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란 법은 없지만, 두 사람은 잘 맞았던 것이겠지.
그러다가 또 다투거나 틀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신이 상관할 수 없는 문제.
당장은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는 게....
“이얍.”
별안간 튀어나온 손길이 눈을 가렸지만 강엽은 태연했다.
“중경에서 만나는 거 아니었나?”
“뭐야? 놀라지도 않네?”
“엄청 놀랐는데.”
“거짓말.”
“진짜야. 욕탕에 침입할 줄은 몰랐어.”
물론 그녀가 문을 따고 슬금슬금 들어오는 것은 진작 눈치챘다.
“마지막에 만날 사람이 노주에 있었거든. 근데 멀리서 너 가는 모습이 보이길래 일 끝나고 온 거야.”
“소창후는 어디에 두고?”
“먼저 중경으로 보냈지.”
“그렇군.”
“...응.”
잘 지냈냐고 묻진 않았다. 그녀가 어떤 고생을 했을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물을 생각은 없었다.
곧이어 천자락 떨어지는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질거리더니 백서희가 옆에 들어왔다.
“목욕하고 싶어. 나도 들어갈래.”
“이미 들어왔으면서.”
배시시 웃은 그녀가 강엽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평생 먹을 쌍욕 다 먹었어.”
“....”
“죽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고, 진짜 죽이려는 사람도 있더라. 어떤 사람은 나한테 똥물에 튀겨죽일 년이라면서 진짜 똥물을 뿌렸어.”
“뭐?”
강엽이 드물게 정색하자 백서희가 손을 뻗어 콧잔등을 눌렀다.
“화내지 마.”
“그래도....”
“흑접에 있을 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나 자신한테 수도 없이 변명했었는데....”
하나 소중한 자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너저분한 핑계거리이리라.
그걸 부정할 순 없었다.
“무릎 꿇고 싹싹 빌었어.”
모두에게 용서받진 못했다.
끝까지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소창후 덕분에 불상사로 번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내가 죽인 사람들 숫자만큼 협(俠)을 행하라고. 그럼 협객이었던 부군의 원한을 묻겠다고.”
“....”
“그러겠다고 했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