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71화 (171/450)
  • 30화. 협력 (3)

    곡주의 죽음에 살수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정확히는 곡주에 이어 일제자와 이제자를 무너뜨린 강엽이 그렇게 만들었다.

    도망치는 자들까지 쫓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끄, 끄윽...!”

    곡주의 제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

    창백한 낯짝이 식은땀으로 절여진 그는 찢겨나간 복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피가 대량으로 쏟아진 건 물론이고 내장 조각까지 흘러나왔으니 전설 속 화타가 돌아와도 살기는 글렀다.

    “괴, 괴물....”

    갑자기 난입해서 사부와 사형들을 죽여버린 자.

    옥쇄를 각오한 살수들마저 일수로 도살해버린 괴물이 다가온다.

    삼제자는 한 손으로 복부를 잡으면서 칼을 휘둘렀으나 힘이 실리지 않은 칼질이 통할 리 만무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칼날을 잡아챈 강엽이 강제로 끌어당기자 엉거주춤 끌려오다 칼을 놓쳤다.

    퍽!

    “끄악!”

    몸을 가누지 못한 삼제자는 발에 채여 철푸덕 허물어졌다.

    피거품을 게워내는 삼제자의 가슴팍을 지긋이 밟은 강엽이 빼앗은 칼을 들어 목을 겨냥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경동맥이 잘려나가는 위치.

    “주, 죽여라....”

    삼제자는 강엽이 자신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음을 진작에 눈치챘다.

    강엽도 굳이 살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혈교에 투신할 생각이라고 했었지.”

    사원루에 오자마자 곡주를 죽인 게 아니었다.

    적들의 숫자를 살피고, 초음으로 놈들의 전력을 가늠해보면서 누가 가장 위협적인지 계산했다.

    곡주가 여인들에게 위해를 가할 조짐을 보이자 재빨리 나서긴 했지만, 놈들이 혈교에 가세하느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들었다.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평생 두려워했던 곡주에게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살의.

    삼제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파리하게 질렸으나,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제법 독기가 있는걸.”

    우드득!

    “끅, 끄윽!”

    “대답해라.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면.”

    가슴팍을 밟은 다리에 힘을 가하자 늑골에 금이 가면서 폐가 조이기 시작했다.

    삼제자의 입술이 부들거렸다.

    “임, 무를 완수하... 사람이, 끅! 오기로...!”

    폐가 눌리는 고통 속에서 띄엄띄엄 문장을 잇는다.

    대충 그들을 고용한 혈교의 본거지가 어딨는지는 모르고 전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듯했다.

    “임무가 뭐지?”

    “사천 정파들...! 명숙들을 암살...!”

    “뭣!”

    강엽의 입에서 나온 경호성이 아니었다. 살수들을 상대했던 소창후가 삼제자의 신음 섞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

    백서희와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홍가려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사천의 무림 명숙들을 암살한다니... 누굴 말입니까!?”

    소창후가 달려와서 물었지만 삼제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암살이라는 단어를 끝으로 숨이 멎었다.

    상대의 맥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안 강엽이 발을 떼면서 물었다.

    “놈들이 따로 지껄인 말은?”

    “그게....”

    “흑접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했어. 사원루, 아니 홍가려를 노린 건 일종의 여흥이었던 것 같아. 흑접은 실패한 일을 자기들은 성공했다고 자랑질을 하려던 거지.”

    백서희가 말을 전하자 소창후의 표정이 퍽 복잡해졌다.

    “놈들의 정체가 뭐지?”

    “백환곡. 섬서 남부의 살문이야. 숫자는 백여 명밖에 안 되지만 흑접과 위상은 비슷했어.”

    흑접과 달리 백환곡은 암살 현장에 어떤 흔적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악명은 살수업계에선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런 놈들이 작정하고 사천의 무림 명숙들을 암살했다면... 피해가 엄청났을 거야.”

    사천 무림은 사천삼패와 흑도 사파의 태화문으로 대표되지만, 그 아래로 수많은 무림 문파들이 난립하여 방대한 강호를 이루고 있었다.

    군소방파라도 엄청난 숫자가 모이면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무림 문파의 명숙들이 죽는다면 사천 무림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터.

    “뭐,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도로아미타불이 됐지만. 사천 무림 입장에선 운이 좋은 거지.”

    “하지만 몸통을 잡지 않고선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겠지요. 하루 빨리 놈들을 잡아야 할 텐데....”

    한숨처럼 중얼거린 소창후는 문득 위화감을 깨닫고 양 눈썹을 치켜떴다. 강엽과 백서희가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문을 내뱉을 새도 없이 강엽이 백서희에게 말했다.

    “하던 일은 못 끝냈지? 여긴 신경 쓰지 말고 가봐.”

    “어? 하, 하지만....”

    “사원루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죽은 건 아니야. 슬쩍 보고 왔는데 대부분은 잠들어 있었어.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수면향을 쓴 것 같던데. 뒷수습은 나랑 소창후가 할 테니까.”

    “...응. 고마워.”

    백환곡 때문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원래는 지난날의 과오를 사과하기 위해 사원루에 온 것이다.

    몸을 돌린 백서희는 소창후를 지나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창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고갯짓이 어떤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예를 표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소창후의 눈이 살짝 커지는 찰나.

    “우리는 이만 갑시다.”

    “저리 보내도 되는 겁니까?”

    같이 싸웠다고 해도 믿는 것은 아니다. 소창후는 홍가려에게 향하는 백서희를 내버려둬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강엽은 단호했다.

    “별일 없을 것이오.”

    뭘 믿고 그러냐고 묻진 못했다. 확고한 목소리는 반문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소창후 당신에게 할 말이 있는데.”

    “뭐지요?”

    “그건....”

    백서희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소창후를 일행에 포함시키는 게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백환곡과의 싸움에서 두 사람은 겉으론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손발은 의외로 잘 맞았다.

    소창후가 창으로 전방을 휩쓰는 동안 백서희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빈틈을 메꾸면서 합격의 수준을 끌어올렸던 것.

    소창후는 몰랐지만, 강엽은 그때의 싸움으로 그녀가 꽤 도움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조금 전 당신이 말한 대로 혈교의 몸통을 잡는 것과 관련이 있소.”

    예상치 못한 말에 소창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

    홍가려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데 뜬금없이 암살 위기를 겪었고, 옛날에 그녀를 위협했던 살수가 그녀를 구하려고 왔다.

    한창 위험했을 때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는데, 싸움이 끝나고 보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백서희에게 목숨을 빚진 것은 사실.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일단...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당신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그 뒤에 하지만, 이라고 짧게 덧붙였다.

    “당신을 용서한 건 아니에요.”

    “....”

    “저를 죽이려고 한 건 그렇다 치고, 그날 흑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보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매향이라는 이름 알아요?”

    “어?”

    “흑접 때문에 죽은 시비였어요.”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러나 백서희는 홍가려가 말한 시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사원루에 잠입하기 위해 납치한 시비였다.

    비록 그녀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시비의 죽음을 이용했다는 점에선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강 무사님이 알려주셔서 그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 아이의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죠.”

    그럴 것이다. 시신이 나오면 골치 아파지니 은밀히 처리했으리라.

    “매향의 아버지는 작은 표국의 쟁자수예요. 어머니는 시장에서 국수를 팔고 있고, 동생은 표사가 되기 위해서 무관에서 열심히 무공을 배우고 있어요.”

    풍족하지 못한 만큼 먹고 살기 위해서 가족이 전부 일을 해야만 했다. 흑접이 홍가려를 죽이기 위해 이용한 시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고를 들은 가족의 심정이 어떨 것 같아요?”

    “....”

    백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가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마음을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딸과 누이를 잃은 가족의 상처에 비하지는 못할 테니까.

    “당신은 날 찾아오기 전에 매향의 가족을 찾았어야 했어요. 보표들의 가족을 찾고, 그들에게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고요.”

    “...미안해.”

    그럼에도 백서희는 고개를 숙였다.

    “네 말대로 난 죽어도 싼 년이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어. 그러니 사과하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선 무리야. 네 도움이 필요해.”

    “어떤 도움 말인가요?”

    “그 사람들의 집을 알려줘. 집을 알지 못한다면 연통할 방법이라도.”

    “....”

    이번엔 홍가려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을 찾아온 백서희의 태도를 보고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했지만,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백서희의 눈빛을 보고 진심임을 깨달은 그녀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사과를 받을게요. 부탁도 들어주고요. 정리해서 드릴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고마워.”

    “고마우면 하나만 말해줘요. 강 무사님하고 무슨 사이예요? 둘이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동료야.”

    “평범한 동료는 아니죠?”

    “....”

    백서희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홍가려는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알겠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행운을 빌어줄게요. 작금의 세태를 해결하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강 무사님과 함께 싸워야 할 테니까요.”

    “고마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백서희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에 홍가려를 돌아봤다.

    “내 진짜 이름은 백서희야.”

    “좋은 이름이네요. 칠호보다는 훨씬 예뻐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은 우리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거든.”

    “기억해둘게요.”

    백서희가 떠난 뒤에도 홍가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 식은 차를 홀짝이며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시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보다못한 감 호위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섰다.

    “아가씨.”

    “말해보기도 전에 차였네요.”

    “예?”

    “그런 게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말해볼걸. 그랬다면 이런 패배감을 곱씹진 않았을 텐데.”

    최고급의 용정차를 마시는데도 쓴맛만 감도는 게, 한동안은 이 감정이 남아있을 듯했다.

    홍가려가 몸을 일으켰다.

    “루주님께 연통할 방법 알죠?”

    “아가씨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루주님께서도 본루에서 일어난 일을 곧 아실 겁니다.”

    “아,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본루에서 일어난 일도 중요하지만, 전 다른 일로 연통을 드리려는 거예요.”

    “그 말씀은?”

    “루주님의 제안을 받으려고요.”

    홍가려는 하오문주의 정체를 모른다. 심지어 하오문 소속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원루주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루주가 사원루를 비우는 날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서 요양한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런 사원루주가 얼마 전에 수양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는 말과 함께.

    당시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사원루주의 비밀이 가볍지 않음을 느꼈기에. 이전엔 보지 못했던 감 호위 같은 고수들을 척척 내주는 걸 보면 무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 노래와 음을 벗 삼아서 살고 싶었어요. 그것만 하면 만족할 수 있었는데....”

    하나 이제 그녀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다. 힘이 없다면 강자에게 짓밟히는 난세가 도래했음을 안다.

    “루주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어요.”

    “그분께 모시겠습니다.”

    “어디 계시죠?”

    “휘주의 황산입니다.”

    * * *

    “잠깐 떨어져야 할 것 같아.”

    갑작스러운 말에도 강엽은 놀라지 않았다.

    홍가려를 만나겠다고 할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홍가려를 만나고 온 소창후가 거들었다.

    “홍 소저가 부탁했습니다. 백 소저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해달라고요.”

    사실 홍가려는 백서희가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부탁한 것이지만, 소창후는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흑접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은 백서희의 몫이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진 마. 잘 해낼 테니까. 한중의 암시장에 갈 때까진 합류할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응, 그럴게.”

    말은 그렇게 해도 강엽은 백서희가 그 말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소창후가 말을 더듬었다.

    “나, 남녀가 유별난데 어찌...!”

    “우리 소창후님께는 자극이 좀 셌나 보네? 평소엔 더한 것도 하는데.”

    “더한 거라니...!”

    “흐응, 뭘까나?”

    “마구니답게 음란마귀가 가득하군요!”

    “에이, 그건 아니다. 난 설명도 안 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야말로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낀 거지.”

    “갈!”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불호를 외는 소창후의 모습에 백서희가 키득거렸다.

    강엽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열흘 뒤에 중경에서 보자.”

    한중의 암시장은 매월 보름에 가장 큰 규모로 개최된다.

    열흘 뒤에 모이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소창후가 물었다.

    “강 시주는 노주로 가실 겁니까?”

    “그전에 들를 데가 있소. 당문에 갈 생각이오.”

    “당문에 말입니까?”

    “알아볼 게 있어서.”

    등에 짊어진 광명마교의 방패.

    한중의 암시장에 가기 전에 당문을 방문해서 방패의 내부 구조를 뜯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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