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70화 (170/450)

30화. 협력 (2)

지붕 위를 달리던 강엽이 별안간 멈춰섰다.

‘혈목이...?’

백서희에게 따로 붙여둔 혈목.

혹시 그녀가 자신과 떨어졌을 때 위험에 처할 경우를 대비해서 호위로 붙여준 것이었다.

한데 혈목의 반응이 느껴진다는 것은,

‘소창후와 싸웠나?’

백환곡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강엽으로선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혈목까지 동원할 만큼 소창후가 위협적인지는 좀 회의적이었다.

기억 속의 소창후는 중단전을 열기는커녕 하후진이나 청수보다도 약했다.

그 뒤로 몇 달이나 지났으니 중단전을 열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위협이 될까?

사생결단을 내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위험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가보면 알겠지.’

만약 소창후가 정말로 백서희를 죽이려고 든다면 아미파고 뭐고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며 사원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붕에 내려선 강엽은 이상을 눈치챘다.

앞서 백서희가 봤던 보표들의 시신.

‘서희가 저들을 죽였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어. 보표들을 죽인 놈들이겠지.’

앞뒤 상황을 짜맞춰서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한다.

‘대가리부터 쳐야겠군.’

걱정됐지만 백서희를 믿었다.

함께 싸우는 것보다는 그녀가 안쪽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자신은 바깥에서 적들을 흔드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직 적들은 강엽에 대해 모르는 만큼 갑작스러운 기습엔 더없이 취약할 터.

구우우우우웅......!

초음의 파동을 넓게 퍼뜨려 사원루 전체를 훑는다.

다수가 소수를 압박하는 가운데, 그쪽을 관찰하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머릿수는 대략 쉰 명 이상.

한껏 무릎을 굽힌 강엽이 기왓장을 박차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흡혈귀의 눈이 맹렬한 살의를 토해냈다.

* * *

백발이 성성한 흑포 노인이 물었다.

“저건 대체 뭐냐?”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뭘 알아야 대답을 할 텐데, 다른 살수들 역시 이런 사태는 난생 처음이었다.

웬 붉은 줄기들이 전각을 에워싸더니 침입하는 살수들을 무차별로 공격하는 게 아닌가?

얼핏 보면 나무 넝쿨처럼 생겼는데, 제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마냥 기둥을 감싸고 벽을 뚫었다.

저 줄기들로 인해 전각 내부로 숨어든 여인들을 공격하는 게 곱절로 어려워지고 있었다.

살수들을 투입해도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한 백환곡주는 허연 수염을 쓸면서 분노를 토해냈다.

“혈교에 투신하기 전에 소창후의 목을 선물로 들고 가려고 했더니... 뜬금없는 계집이 일을 망치는군.”

“막내가 갔습니다, 사부님. 색을 밝히는 녀석이긴 해도 맡은 바 소임은 다 해내지 않습니까?”

“자만심이 넘치는 놈이기도 하지. 일 각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는 건 죽었다는 뜻이다.”

“....”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엔 분노하면서도 제자의 죽음엔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백환곡주를 보필하는 제자들은 그 사실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별달리 티를 내지 않았다.

사형제가 죽었다는 것은, 장차 곡주의 지위를 둘러싸고 경쟁할 적수가 나가떨어졌다는 뜻.

곡의 힘이 줄어드는 건 달갑지 않으나, 경쟁자는 꺾이길 원했다.

“손해가 너무 크군. 계집들을 죽인다고 메꿔질 손해가 아닌 듯하구나.”

“그건 혈교가 메꿔주지 않겠습니까. 소창후의 목과 중경제일미를 바친다면....”

당초엔 홍가려도 죽일 작정이었으나 계획을 바꾸었다.

사천삼미의 한 명이자 중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바친다면 혈교가 막대한 포상을 내리리라!

사천 총타를 책임진 혈교의 교성이 여색을 탐한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으나, 자고로 사내라면 절세미녀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었다.

“셋째, 넷째. 너희가 가거라. 스무 명을 내주마. 퇴로를 막고 화공을 퍼붓도록.”

“...중경제일미가 죽지 않겠습니까?”

“본전 생각하다 더 큰 손해를 보는 법이다. 계집을 생포하는 건 부차적으로 여겨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저년들도 타죽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나올 게다. 동굴에 불을 질렀는데 안 나올 짐승은 없느니라.”

괴력난신 같은 마물일지라도 고작 나무 줄기.

무릇 목재라면 소낙비에 몸을 적시지 않고서야 화공에 취약한 게 세상 이치였다.

두 제자를 따라나선 스무 명의 살수들이 부싯깃을 꺼내 화살촉에 둘렀다. 맹화유에 적시고 불을 붙이자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전각에 숨은 여인들도 창문 사이로 그 광경을 봤다.

“망할 늙은이, 화공을 쓰다니...!”

“...어쩔 겁니까?”

소창후가 물었다.

난데없이 마주친 백서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같은 배를 탄 처지였다.

정체 모를 붉은 줄기들이 도와준 덕분에 살수들을 상대하는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이젠 불바다에 갇힌 채 통구이가 될지도 모르는 신세.

홍가려와 그녀의 호위들도 불안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

“어, 그게... 일단 얘가 이래봬도 불에 강하거든? 아예 안 타는 건 아닌데, 또 쉽게 타진 않아서....”

혈목이 화공에 약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강엽 또한 진작에 했던 바.

장작불에서부터 맹화유를 끼얹은 화공, 심지어 하후진의 열양지기까지 두루 시험해보면서 혈목이 불에 얼마나 강한지 가늠했었다.

“당장 타진 않을 거야. 대충 반 시진쯤 걸릴 것 같은데.”

“결국 타긴 탄다는 말이군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그럼 나무가 안 타겠어? 그리고 나무가 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나무가 어디 있습....”

무심코 따졌던 소창후가 입을 다물었다. 혈목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전각도 대부분 목재였다.

옻칠을 했어도 화공에 취약한 건 매한가지.

“혈목보다 전각이 먼저 탈 거야. 이래서 한시 바삐 탈출하려고 했던 건데.”

“그 말을 왜 절 보면서 합니까?”

“왜겠어?”

전각에서 농성한 것은 살수들에게 발목을 잡힌 소창후를 차마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가려가 그녀를 두고 도망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백서희 역시 내버려두면 죽을 게 뻔한 사람을 버릴 만큼 매정하진 않았다.

만난 뒤엔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말이다.

“지금 이게 제 탓이라는 겁니....”

“그만! 그만 좀 해요!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요!”

홍가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나무라자 두 여인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다투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왜 사이가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말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요!”

“와, 방금 말투 되게 영웅소설 속 주인공 같았어.”

백서희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감탄하자 홍가려는 기가 막혀서 뒷목이 뻣뻣해졌다.

“정말 당신은... 하아, 뭐 됐고! 이 난관을 타파할 자신 있어요? 설마 정면으로 뚫고 나갈 건 아니죠?”

“맞는데?”

“....”

“....”

모두가 귀를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불화살을 쏘는 적들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겠다니 그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무식한 방법이긴 한데,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야. 소창후가 정면을 뚫고, 내가 후미에 설 거야. 홍가려와 호위들은 중간에.”

“일자진(一字陣)을 만들자는 겁니까?”

“일종의 충각이지. 적들이 성벽이라면 우리는 성벽을 뚫는 공성병기가 되는 거야.”

굳이 소창후를 전열에 세우는 것은 복호창이 적진을 관통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소창후가 문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왜?”

“좋게 설명하면서 그런 천박한 손짓을 해야겠습니까?”

“응...?”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백서희는 자기가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모은 채 그 사이로 손가락을 통과시키고 있다는 걸 깨닫고 빨게졌다.

“아악! 실수, 실수야!”

“역시 전직 살수답게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군요. 음란마귀라는 마구니가요.”

“시끄러워!”

“화살 날아옵니다!”

감 호위가 대경하여 소리쳤다.

철궁에 불화살을 매긴 살수들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시위를 놓은 것.

파파파파파파팍!

화살 세례가 박히면서 거센 화마가 전각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붉게 타오르는 불길과 대조적으로 여인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문득 홍가려의 입술을 비집고 아련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럴 때 그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사내.

밤하늘의 어둠을 떼어내 몸에 두르는 듯했던 청년의 뒷모습이 기억 속에서 아른거린다.

백서희와 소창후도 똑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홍가려가 입에 담은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우리밖에 없어. 누가 구해주길 기다리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나서야 해.”

“모처럼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전직 살수답지 않은 건설적인 의견입니다.”

약속대로 소창후가 전열에 서고, 백서희가 후미를 지키면서 일자형의 돌격진을 만들었다.

“셋을 세면 가는 거야. 하나, 둘... 셋!”

콰아아아앙!

복호창이 문짝을 부수고, 그 앞을 빗장처럼 둘렀던 혈목이 알아서 길을 터주었다.

백서희가 밖으로 나오자 더 이상 전각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듯이 지면을 타고 미끄러진다.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걸 보면 마물이 분명한데....’

사마외도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소창후로서는 마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하나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걸린 위기였다.

인명과 신념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인명을 구제하지 않고 어찌 불제자라 하겠나.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번뇌를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창격을 퍼부었다.

“살고 싶으면 막지 마라!”

오연하게 경고했으나 살수들은 잠시 움찔하기만 할 뿐 물러설 기미가 안 보였다.

백환곡주의 삼제자가 반색했다.

“하핫, 계집들이 나왔구나!”

“갈!”

정순한 내공이 담긴 창격이 삼제자에게 쏘아졌다. 전사경의 무리가 가미된 강맹한 창격.

좌우의 살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여인들을 양 옆에서 호종하는 혈목이 그들을 막아섰다.

카앙!

살수들의 칼날과 혈목이 충돌, 마치 강철이 부딪치는 듯한 파찰음이 울렸다.

“...!?”

나무같지 않은 단단함에 살수들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지만, 고작 절정도 되지 못한 자들의 칼날에 잘릴 만큼 연약한 혈목이 아니었다.

“멈추면 안 돼! 한 번에 뚫는 거야!”

“말 안 해도 압니다!”

일행의 숫자가 적은 만큼 앞뒤로 포위당하면 답이 없었다. 백서희의 말마따나 지체해선 안 되는 형국. 그러나 백환곡주의 삼제자도 만만한 적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적수도 있었다.

“사형, 돕겠소!”

살수들을 끌고 온 사제자가 백서희를 향해 쌍도를 휘두르며 냉큼 뛰어들었다. 쌍검과 쌍도가 맞붙는 공교로운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봤자 내 상대는...!”

호기롭게 외친 사제자는 백서희의 검이 엇박자를 내면서 종횡무진 움직이자 따라가지 못했다.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허물어졌다.

“내 상대가 어쨌다고?”

“...!”

사제의 죽음에 삼제자가 동요했다.

‘저렇게 빨리 죽이다니!’

사제자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이라고 자부하는 그도 몇 초식 만에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사부인 백환곡주만 가능한 일.

소창후도 강한 적수를 간단하게 제압한 백서희의 무위에 깜짝 놀랐다.

“뭐 해? 여기서 천년만년 살 거야!?”

백서희는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고함으로 일깨우면서 뒤쪽의 살수들을 상대했다.

삼제자나 사제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뒤편에 있는 백환곡주가 나서면 그때부턴 첩첩산중이었다.

그녀 혼자만이라면 겨뤄볼 만하나, 홍가려를 지켜야 하는 이상 탈출이 최우선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노부가 너흴 과소평가한 것 같구나.”

신령한 은발을 휘날리면서 몸을 일으킨 백환곡주가 무감정한 눈길로 싸움터를 굽어보았다.

살수답게 대놓고 기세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여인들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백환곡주가 손에 쥔 꼬챙이가 뇌리를 헤집는 것 같았다.

“정면대결은 살수의 소양이 아니나, 압도적인 힘으로 약자를 찍어누르는 것은 강자의 특권이지. 잘 보고 눈에 똑똑이 새겨두어라, 이 백환곡주의 힘을...!”

그렇게 말한 노인은, 곧이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에 잡혀서 목이 뒤로 돌아갔다.

우드득!

“.......”

바람조차 침묵하는 어색한 분위기.

비현실적인 죽음에 모두가 금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릴 때, 백서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보, 보고 있는데...?”

“....”

“뭐지? 상대의 방심을 이용하는 고도의 술책인가? 내가 살수업계를 떠난 동안 새로운 전술이 나온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뒤늦게 소창후가 버럭 소리쳤다.

그에 사람들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백환곡주를 죽인 자가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한 줄기 소슬바람에 흑포를 나부끼는 청년이, 사방을 쭉 둘러보다 백서희에 이르러 멈춰선다.

혹여나 다친 곳이 있는지 살피는 눈길.

백서희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자 그제야 안도하며 쓴웃음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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