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낭왕 (3)
백서희는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돌겠네, 진짜.’
강엽이 낭왕을 따라서 나가니 목옥엔 그녀와 하오문주만 남은 것이다. 심지어 연도 목욕할 물을 끓인다며 자리를 비운 마당.
하오문주가 홀로 설거지할 접시를 모으는데 혼자서 빈둥빈둥 앉아있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오문주의 옆에 쪼르르 달려갔다.
“도, 도와드려도 될까요?”
“앉아있어요. 손님한테 일을 시키진 않으니까.”
“접시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보기에만 그럴 뿐이에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냥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
얼굴이 빨게진 백서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하오문주는 설핏 웃으며 대나무 바구니를 가리켰다.
“저거 들고 따라와요.”
“아, 네!”
접시와 냄비가 있어 제법 무게가 나갔지만 백서희는 번쩍 들어올렸다.
하오문주 역시 비틀거리지 않고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경사면을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냇가에 다다른 두 여인은 쪼그려앉은 채 볏짚과 살뜨물로 접시에 묻은 기름기를 닦기 시작했다.
‘으, 어색해!’
하오문주는 설거지만 할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백서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곤란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게 아니라, 하오문주의 정체는 비밀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정체를 밝혔냐고요?”
백서희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은 대륙 각지에 문도를 둔 방대한 방파였다. 문도의 숫자만 놓고 보면 개방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하오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있는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반 문도가 그럴진대 가장 꼭대기에 있는 하오문주는 어떻겠나. 이름과 별호는 물론이고 성별과 연배마저 알려진 게 없다시피했다.
“아는 사이라서 그런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고작 그런 이유로 정체를 알릴 거였다면 강호에 하오문주가 누군지 모르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문주의 정체가 사원루주 손가향임을 아는 사람은 하오문에서도 손에 꼽는다. 낭인전으로 범위를 넓혀도 낭왕과 연 등 극소수였다.
“그래도 금패급 낭인들은 하오문주가 낭왕의 부인임을 알아요. 단지 하오문주에게 사원루주라는 또 다른 신분이 존재한다는 걸 모를 뿐. 금파검이랑 진멸신권 정도만 알고 있죠. 두 사람은 절 사원루에서도 봤거든요.”
그리고 금패급 낭인들은 낭왕을 방문할 권한이 있었다. 강엽이 금패급이 된다면 낭왕이 어디 있는지 알고 즉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하오문의 일로 자리를 자주 비우지만 상공의 곁에 있는 때가 더 많아요. 나중에 해명하느니 미리 밝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면사를 쓰더라도 강엽 정도 되는 고수의 안법이라면 그 안에 있는 얼굴을 꿰뚫어본다.
“그래도 인피면구를 쓴다면....”
“얼굴은 가릴 수 있겠죠. 하지만 기운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이상 강 무사처럼 기감이 민감한 고수를 속이는 건 불가능해요.”
백서희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강엽이 얼마나 기감에 예민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긴 걘 얼굴 가려도 바로 기억할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고 제가 강 무사 때문에 상공의 곁을 피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그래서 시원하게 정체를 드러냈다. 하필 그녀가 사원루주임을 아는 사람이 금패급 낭인이 된다는 게 얄궂을 뿐이었다.
“강엽이 금패급이 된다고 확신하세요?”
“백 소저는 의심하나요?”
“...아니요.”
“전 강 무사가 흑접을 멸문시켰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제 생각보다 훨씬 빨라서 놀랐지만....”
흑접이 다시 언급되자 백서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평상시엔 아무렇지 않았는데 하오문주의 입에서 흑접이 나오니 가슴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
“...죄송해요.”
“네?”
하오문주가 의아해했다.
강엽이 금패가 되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웬 사과란 말인가?
“사원루에 쳐들어간 거요. 문주님이 아끼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도요.”
“....”
하오문주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풀이 죽은 백서희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날 백 소저로 인해 죽은 사람은 없었지요.”
한참이 지난 뒤에 나온 말에 백서희가 눈치를 봤다.
냇물에 그릇을 헹군 하오문주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물론 그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꽤 많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살수가 한 짓이었죠?”
“아... 네.”
당시 백서희와 함께 홍가려의 목숨을 도모했던 팔호가 술법을 써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그러나 팔호가 그런 짓을 했던 것은 그녀로 하여금 홍가려에게 접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으니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고 싶진 않아요. 어쨌든 제가 홍 소저를 죽이려고 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려아는 살았어요.”
만약 홍가려가 죽었다면 강엽이 비호했더라도 용서하지 못했겠지.
하나 강엽이 홍가려를 구했고, 나아가 그녀를 노렸던 흉수들까지 처단했다.
의뢰 때문이었다고 하나 하오문주는 감사하고 있었다. 다른 낭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백 소저가 흑접을 멸문시키는 일에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백 소저에 대한 저의 감정은 그걸로 탕감할게요.”
“아니,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려아를 찾아가서 사과하세요. 그 아이의 용서를 받아야 백 소저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꼭 그럴게요.”
그래도 백서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오문주의 용서를 받았는데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구나.’
흑접이 멸문했다고 그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었다.
살수로서 손에 피를 묻힌 이상 과거와 결별할 수는 없었다.
하오문주의 말대로 홍가려를 찾아가야 한다. 그녀가 용서하든 말든 사과하지 않으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한 짐덩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주님, 저는....”
뒤를 이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멀리서 울려 퍼진 굉음이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뭐, 뭐야?!”
당황한 백서희가 벌떡 일어나서 굉음의 진원지를 돌아봤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안력을 돋우자 그럭저럭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언뜻 보면 가느다란 실처럼 보이는 무언가.
지난날의 경험으로 그것들이 강엽이 부리는 혈목임을 알아본 백서희는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시험이에요.”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오문주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심원처럼 퍼진 기파가 그녀들이 있는 곳까지 훑고 지나갔다.
“금패급에 오르는 시험인가요?”
“아뇨.”
하오문주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강 무사가 차기 천하팔존에 오를 만한 재목인지 확인하는 시험이랍니다.”
“예에?”
생각지도 못한 말. 얼이 빠진 백서희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 * *
쿠구구구궁...!
두 사람이 딛고 선 곳은 단단한 기암괴석이 떠받친 산봉우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부딪치자 산봉우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지면이 파헤쳐지고 있다.
강엽은 시작부터 패를 아끼지 않았다.
“요상한 재주를 쓰는구나.”
기암괴석들 사이의 흙바닥을 뚫고 치솟은 붉은색의 줄기들.
혈목을 구경한 낭왕이 나지막이 웃었다.
“오라.”
콰아아아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쇄도한 혈목 다발이 낭왕을 덮친다.
낭왕은 일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터터터터텅!
혈목 다발들이 몸에 닿기도 전에 연쇄적인 경파를 맞고 터져버렸다.
강엽은 낭왕이 무엇을 한 건지 알았다.
단혼마백과 싸우면서 질리도록 겪은 기예.
‘격공권.’
수준은 비교를 불허했다.
단혼마백은 주먹을 뻗거나 손을 휘젓는 등 작게나마 몸을 움직여야 격공권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하나 낭왕은 팔 한번 휘두르지 않고 간단하게, 연달아 격공권을 뿌렸다.
‘힘을 아낄 상대가 아니다.’
우우우우웅......!
고속으로 회전하는 다섯 고리의 용환.
하단전과 공명하자 강엽의 기파가 폭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낭왕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오호라.”
동시에 강엽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오는 서늘한 안광을 알아차렸다.
동자료혈에 공력을 모은 낭왕이 심신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
“붉은 용이라... 재밌는 심상이야.”
“...!”
설마 중단전의 심상까지 들여다볼 줄이야.
‘전강과 같은 건가?’
타인의 감정을 꿰뚫어보는 타심통.
낭왕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타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심상을 엿본 것이다.
강엽도 초음으로 비슷한 짓을 할 수 있지만 낭왕처럼 무공만으로 그 일을 해내려면 얼마나 안법이 출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꾸 뭔가 튀어나오는군.”
“어떻게...?”
이제까지 누구도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초음마저 낭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음(音)을 이용해서 단전을 두들기나? 어지간한 녀석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어.”
사람은 듣지 못할 소리였기 때문에 감각이 뛰어난 무림 고수들도 초음을 막진 못했다.
삼화취정에 이른 전강이나 단혼마백도 마찬가지.
한데 이 순간, 처음으로 초음이 타인에 의해 막히는 경험을 했다.
“절대고수의 감각을 얕보지 마라. 평상시라면 모를까, 싸움에 임한다면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초음이 막혔는데 암신이라고 안 막힐까.
그럼에도 강엽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면서 낭왕의 배후로 접근했다.
‘아직 일초 남았다.’
당초 예상했던 삼초의 양보.
혈목이 일초, 초음이 이초라면 이게 마지막 삼초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요상한 재주를 또 부리는군. 하지만 감각을 기만하는 게 전부라면 실망이다.”
느긋하게 중얼거리면서 배후를 찌르는 강엽의 일권을 손바닥을 들어 막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기감이 한 단계 더 도약한다.
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족처럼 다루는 것을 넘어 밑바닥부터 재구축한다.
그렇게 꺼내든 회심의 한 수.
투아아아앙......!
낭왕의 장심과 접촉한 상태에서 이제까지와는 격이 다른 외기를 발출한다. 종아리 비복근에서부터 끌어올린 전사경의 이치로 꽂아넣은 두 번째 권격.
이 한 수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줄곧 여유로웠던 낭왕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후우...!”
잇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거친 호흡.
단 일격이지만 주먹을 내뻗은 오른팔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과도하게 집약된 진기를 감당하지 못한 경맥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재생력 덕분에 통증이 빠르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뼈를 주고 살을 취한 셈이군.’
심지어 치명타를 입힌 것도 아니었다.
콰앙!
“하하, 깜짝 놀랐다! 권기성강(拳氣成罡)이라니!”
초절정의 고수들에게 허락된 비기.
강엽은 삼화취정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한순간 강기(罡氣)를 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피 섞인 침을 퉤 뱉은 낭왕이 하얗게 웃었다.
“인정하마. 예상치 못한 한 수였다. 제대로 한 방 먹었어. 급하게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다면 망신당했을 게야.”
‘제기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삼초 양보와 맞바꾼 회심의 한 수를 처먹였음에도 약간의 내상으로 그친 것이다.
“한데 그 검은 장식이냐? 보고서엔 자성검법도 쓴다고 하더니만.”
“아직은 어설픕니다.”
처음부터 자성검을 뽑지 않은 것은 몸으로 강기를 쓰는 게 더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억지로 검강을 쥐어짜내봤자 권강만큼 강하지 않았다.
“됐으니 꺼내봐라. 자성검호의 진전을 얼마나 잘 이었는지 봐야겠다.”
“자성검호도 아십니까?”
“옛날에 몇 번 교류했었지. 마지막으로 받은 연통이 제자를 키울 거라는 서찰이었고. 운을 빌어줬는데 그렇게 가서 유감이었다.”
몇 번 교류한 게 전부였다곤 하지만 서찰을 주고받았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이젠 제가 그분의 새로운 제자입니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빠져나온 보랏빛 검날이 밤하늘의 어둠을 몽환적으로 물들인다.
만족스럽게 웃은 낭왕이 몸을 돌려 자신의 병장기가 꽂힌 곳으로 걸어갔다.
“자성검호의 검법은 나보다 뛰어났다. 공력을 쓰지 않고 검만 논한다면 나도 승산을 점칠 수 없었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검으로 전주님을 이기지 못하면 그분의 발끝에도 못 미친단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마침내 낭왕의 손에 병장기가 쥐어지는 순간.
자성검과 비슷한 길이와 너비를 지닌 검을 쥔 낭왕이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쌓은 네 공훈을 인정하여 은천패의 자격을 내리겠다. 또한 귀주성에서 야차마곤을 비롯해 수많은 낭인들을 살렸으니, 이는 단순히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공이다. 너의 활약을 금패에 오를 만한 공로로 인정하고 금인패의 자격을 내리겠다.”
동천패에서 금인패로 단숨에 뛰어오른 것은 낭인전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
그러나 그걸 허락한 이가 낭왕이다. 천하팔존에게 작게나마 내상을 입혔으니 심사는 통과한 셈.
“하지만 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겠다. 너도 만족하지 못할 테지?”
강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낭왕과 검을 맞대는 이 순간에 비하면 낭인패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낭왕의 손이 앞뒤로 까딱였다.
“와라. 내가 널 제련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