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56화 (156/450)
  • 26화. 낭왕 (2)

    “맛은 어떠냐?”

    식사를 하던 중에 낭왕이 물었다.

    “맛있습니다.”

    “와, 정말 끝내주는데요?”

    강엽은 덤덤하게 대답했고, 백서희는 그래도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서 과장되게 감탄했다.

    사실 맛을 떠나서 천하팔존이 직접 잡아온 물고기로 만든 요리인 만큼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하하, 그렇지? 내 마누라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 요리를 잘한단 말이야.”

    “상공도 참.”

    칭찬을 받은 하오문주가 쑥스러워하자 낭왕이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눈길을 보냈다. 손님만 없으면 당장 침실로 달려갈 기세였다.

    “너무 치켜세워주지 말아요. 연도 도왔으니까요.”

    “전 손질만 했을 뿐입니다.”

    식탁엔 연도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주인과 가복이 겸상을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지만 낭왕은 자유로운 사내였다. 하오문주 역시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고.

    “술은 좀 하나?”

    “웬만큼은 마십니다.”

    사실 흡혈귀가 된 뒤로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몸이 됐다. 재생력이 주독마저 해독하는 것이다.

    재생력을 억누르면 취기가 올라오긴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마음을 놓아선 안 되리라.

    “받아라. 그 옛날 조조가 황제에게 진상한 술이다.”

    “고정공주(古井貢酒)군요.”

    원래 고정공주는 조조가 태어난 휘주 지방의 명주로 황제에게 바칠 만큼 훌륭한 술이었다.

    강엽도 가져온 선물을 꺼냈다.

    “이게 뭐냐?”

    “행화촌의 분주입니다.”

    비악채주를 죽이고 수적들을 몰살시켰을 일로 선장이 고맙다며 준 선물이었다.

    낭왕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호오, 이 귀한 걸... 근데 넌 사천에서 활동하지 않았나? 이건 산서땅의 술인데?”

    “운이 좋았습니다.”

    장강에서 겪었던 사건을 설명하자 낭왕의 표정에 흥미진진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오문주와 연도 말없이 강엽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강수로채는 내분을 겪고 있죠.”

    술잔을 내려놓은 하오문주가 담담히 말했다.

    “수로맹주가 자기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서 이인자인 비갑채주를 견제하고, 비갑채주는 친분이 있는 채주들을 선동하고 있어요.”

    낭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강엽과 백서희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강 무사님과도 연관이 있고요.”

    “저와 말입니까?”

    “조천방과 거룡방의 항쟁. 항간에선 수운대전(水運大戰)이라고 불리는 싸움에서 장강수로채의 세 개 수채들이 조천방을 도왔지요? 그쪽 채주들이 바로 비갑채주를 따르는 무리들이랍니다.”

    “...!”

    “당시 싸움에 끼어든 채주들은 어마어마한 뒷돈을 챙긴 건 물론이고 조천방주와 약속을 했어요. 자신들의 관할에선 통행세를 삼 할 더 올리기로.”

    “그게 얼마나 됩니까?”

    “그쪽 장부를 본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군요. 조운 사업은 계절에 따라서 물동량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래도 달에 오만 냥 이상은 챙길 걸로 추정하고 있어요.”

    최근 강엽이 떼돈을 벌어서 그렇게 큰 돈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오만 냥이면 엄청난 액수였다. 심지어 달마다 챙기는 돈이 아닌가?

    “세 개의 수채에서 십오만 냥. 그 뒤로 넉 달이나 지났으니 육십만 냥에 달하는군요. 그중 절반만 군자금으로 쓰여도 수로맹주 입장에선 큰 부담일 거예요.”

    “수로맹주가 그걸 그냥 둘 리가 없을 텐데요.”

    “강 무사님이 수로맹주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세 채주와 비갑채주를 이간질할 겁니다.”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비갑채주를 위해 쓸 필요가 없다고 설득할 것이다. 비갑채주를 돕지 않으면 모른 척 넘어가주겠다면서.

    “물론 그러면 비갑채주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높은 지위와 찬란한 미래를 약속할 겁니다.”

    “그들 중 두 명은 비갑채주의 의동생이고, 한 명은 오랜 지기랍니다.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비갑채주가 더 유리하군요.”

    “세력이 반반으로 갈린 겁니까?”

    “육 대 사. 수로맹주가 육이에요. 그가 사도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라는 게 유리하게 작용했지요.”

    수로맹주가 노쇠했어도 명색이 사도십대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천하팔존 다음으로 가장 강한 고수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비갑채주가 외부세력을 들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무공도, 세력도 떨어지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수로맹주도 바보는 아닐 테니 독살이나 암살은 방비할 테고 말입니다.”

    “맞아요. 비갑채주는 원래 태화문에 접촉했어요.”

    조영옥이 거룡방을 손에 넣음으로써 태화문은 장강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비갑채주는 그 점을 노려 조영옥의 세력과 손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태화문의 이공녀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쪽도 대공자 측과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남의 권좌 싸움에 끼어들 여력은 없지요. 그래서 비갑채주가 다른 세력과 접촉했는데....”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대목에서 강엽은 불길함을 느꼈다. 태화문이 거절했다면 누가 받아들였겠나.

    “광명마교를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혈교, 일월신교, 흑룡교와 함께 사대마교의 일각을 차지한 마도 종파.

    하오문주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갑채주가 그들과 손을 잡았어요.”

    “가볍게 볼 일은 아니지.”

    독한 고정공주를 한 입에 털어넣은 낭왕이 입을 닦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자의 천하 정세를 보면 혈교가 사천과 운남 등을 공략하고, 일월신교는 섬서 방면을 공략하고 있다. 광명마교는 복건에서 발호했지.”

    대륙의 동서에서 각각 다른 마교들이 발호한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무림맹도 감당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생각해봐라. 흑룡교와 대등한 마교가 세 개나 있는 거다. 이걸 누가 막겠느냐?”

    “무림맹도 어느 쪽을 먼저 막을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자칫 한 마교와 먼저 싸우다 다른 두 마교가 뒤에서 치면 답이 없으니까요.”

    “그나마 그 세 놈들이 서로를 웬수처럼 생각해서 다행이지. 그놈들 교리상 손을 잡진 않을 게야.”

    “확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사이비 광신도들은 정파 이상으로 완고한 놈들이다. 다른 마교와 손을 잡는 건 놈들을 인정한다는 건데... 그놈들에게는 자기네들 신을 배신하는 반역질이지. 설령 교주가 그럴 마음을 먹었어도 못 한다.”

    현실적으로 손을 잡아야 유리함에도 교리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말뜻이었다.

    “하지만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는 할 수 있겠지. 그래서 골 때리는 게다. 무림맹의 입장이 애매해졌거든.”

    그러나 삼마교 입장에서도 쉽게 전쟁을 일으키진 못했다.

    먼저 무림맹과 전쟁을 했다가 힘이 소진되면 다른 마교 좋은 꼴만 시켜주는 것이다.

    “대화가 좀 다른 데로 샜군요. 아무튼, 장강수로채로 돌아오면... 광명마교가 장강수로채의 내분에 참견했어요.”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하는 법. 다른 두 마교와 달리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은 광명마교는 이미 장강을 넘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강엽의 반응은 딱 거기까지였다.

    광명마교의 장강 진출을 흥미진진하게 들을지언정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담백한 반응에 오히려 백서희가 놀랐다.

    “무지 심각한 문제 아니야?”

    “심각하지. 하지만 아직 현실이 된 것도 아니고....”

    오래 얘기해서 건조해진 입 안을 술로 적시면서 말을 이었다.

    “혈교 문제만 해도 골치 아파. 지금은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래, 혈교도 만만치 않지. 부인?”

    고개를 끄덕인 낭왕이 하오문주에게 공을 넘겼다.

    하오문주가 말했다.

    “최근에 사천땅에서 이상한 약이 돌고 있어요.”

    “약?”

    그 말에 강엽과 백서희는 서로를 돌아보고, 같은 생각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낭왕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뭔가 아는 눈치인데?”

    “그게 실은....”

    강엽 대신 백서희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양견회의 의뢰를 받아서 혈교도를 친 이야기를.

    “그렇군. 그 건은 아직 보고받지 못했는데... 어쨌든 당문도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이지.”

    “뭔가 이상한데요.”

    하오문주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뭐가 말이오?”

    “붉은 가루라고 하는 걸 보니 색깔은 제가 말씀드린 약과 비슷한 것 같지만, 효과는 전혀 달라요.”

    이번엔 강엽이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말씀드린 약은 암시장을 중심으로 돌고 있거든요. 복용한 사람은 앵속을 빤 것처럼 기분이 고양되고 황홀감을 느껴요. 자결할 것처럼 불행했던 사람도 약을 복용하면 행복해하죠.”

    “그게 전부는 아니겠군요.”

    그게 전부라면 하오문주가 구태여 이 자리에서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하오문주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중독되는 건 둘째치고, 환각과 환청을 겪어요. 문제는 그 환각과 환청이... 혈신에 대한 신앙을 은연중에 심는다는 거고요.”

    “혈신이라면 혈마 아닙니까?”

    혈교를 개파한 시조.

    강호 무림은 혈마라 멸칭하고 혈교는 혈신이라 칭송하는 자에 대한 신앙을 주입하는 비약.

    그제야 강엽도 하오문주가 어째서 심각했었는지 깨닫고 안색이 딱딱해졌다.

    “...비약으로 교도를 늘렸군.”

    흑룡교가 전쟁으로 교세를 넓혔고, 광명마교는 민생을 구휼하여 교세를 넓히고 있다면.

    혈교는 약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 * *

    식사가 끝난 뒤 낭왕은 강엽과 함께 밤산책을 나왔다.

    “문주와 얘길 나눠보니 어떻더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몰랐던 것도 새로이 배웠고요.”

    식사 자리는 두 시진이 넘게 이어졌다. 정확히는 배를 채운 뒤에도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 너에 대해 들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염왕의 제자와 무당제일검의 제자를 주목했었지.”

    천하팔존인 낭왕에게도 염왕과 무당제일검은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염왕은 전대 천하팔존이고, 무당제일검은 정도십대고수의 한 명이지. 무당제일검은 천하팔존에 공석이 생기면 되면 그 자리를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강호 무림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들. 그들의 제자에게 신경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넌 그런 사람들의 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히려 넘어섰지.”

    “제가 그 녀석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건 아닙니다.”

    강엽이 빠르게 성장해서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것 같지만 하후진과 청수도 타고난 무골이었다.

    특히 하후진과는 중단전을 개방한 시기도 큰 차이가 없었다. 자신이 조금 더 앞서갈 뿐, 하후진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청수 역시 다시 만나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

    “하지만 네 녀석에겐 술법도 있지 않느냐? 또 술법인지 뭔지 모를 괴상한 능력도 있다던데?”

    그것까지 다하면 하후진과 청수가 빠르게 성장해도 강엽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

    강엽이 대답하지 않자 낭왕이 돌아보지도 않고 낮게 웃었다.

    “네 녀석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건 보자마자 알았다. 그토록 강해진 것도 그 덕분이겠지?”

    예상대로라고 할까,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강엽이 아무리 기파를 갈무리해도 천하팔존의 안목을 완벽히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흡혈귀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너를 부른 건 그냥 식사나 하기 위함이 아니다. 네가 정말 금패급의 의뢰를 받을 실력이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지.”

    “이미 보고받으신 것 아닙니까?”

    “그래, 혈교의 교성을 죽이고 태화문의 혼섬잔도를 제압했다지? 그만하면 금패급으로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지. 하지만 난 직접 싸워보는 걸 선호해서 말이다.”

    “.......”

    “두렵나?”

    말이 없는 강엽에게 낭왕이 웃으며 물었다.

    강엽이 실소했다.

    “천하의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힘이 천하를 오시하는 절대고수에게 얼마나 통하는지 궁금할 따름.

    “네가 사마외도든 뭐든 상관없다. 이 자리에서 겪은 일은 함구하마. 이쯤 되면 거리낄 게 없겠지?”

    “충분합니다.”

    전력을 숨긴 채 낭왕과 싸운다면 오히려 상대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전력을 다한다.’

    술법도, 흡혈귀의 능력도 아끼지 않는다.

    “선공은 양보해주시는 겁니까?”

    “흠, 그래. 삼초까지는 양보하마.”

    낭왕이 한쪽 손을 뒷짐을 진 채 다른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저 아래 목옥이 있는 곳에서 십수 자루의 빛살이 날아와서 그의 주변에 꽂혔다.

    파파파파파박-!

    검도창월곤(劍刀槍鉞棍). 흔히 십팔반병기로 알려진 병장기들뿐만 아니라 특이한 기문병기들까지.

    목옥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헤아린 강엽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족히 백 장은 넘을 텐데...!’

    그 거리를 격하고 허공섭물로 십수 자루의 병장기를 불러왔다. 대체 얼마나 넓은 범위를 의념으로 장악한 건지 모를 허공섭물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낭왕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차례 별호가 바뀌었지.”

    강엽도 알고 있었다.

    낭왕 혁세기가 이전에 불렸던 별호.

    ‘천무병장(千武兵將).’

    천 가지의 병장기로 천 가지의 무학을 펼친 고수.

    낭왕은 이 세상의 모든 병장기에 통달했다고 알려졌다.

    “삼초 양보, 일단은 적수공권으로 싸워주지. 내가 병장기를 쥐게 해봐라, 후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