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수색 (2)
주루를 나오면서 백서희가 말했다.
“의외네. 너라면 더 조건을 올릴 거라 생각했는데.”
협상의 주도권은 강엽이 갖고 있었다. 조금만 더 피 말리게 했다면 그 이상을 뜯어낼 수 있었으리라.
하후진도 공감하는지 격하게 끄덕거렸다.
“내 말이. 솔직히 너라면 아예 먹어치울 수도 있지 않냐?”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아. 억지로 충성 맹세를 받았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
“어째서?”
“그놈이 내 밑에 들어오면 자기 처지에 만족할까?”
단목정과는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방주의 서녀로서 태어났기에 강엽의 뒷배가 없다면 생존마저 위태로웠다.
하지만 양견은 자신의 힘으로 회주가 된 자.
방회를 이끌 능력이 있는 만큼 기회가 되면 배신할 궁리부터 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양견을 억지로 휘하에 들일 만큼 노주 흑도가를 통일하는 게 절실한 것도 아니지. 당장 쳐부술 만큼 위협적인 것도 아니고.”
당장 숙정방을 키우는 것도 훗날 세력이 필요한 때를 대비해서 투자하는 것일 뿐.
양견의 앞에선 노주 흑도가를 통일할 기회니 뭐니 지껄였지만 그럴 마음은 없었다.
“청우방을 먹어치웠는데 양견회까지 먹어치우면 탈난다.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야.”
“하긴.”
자금력과 무공이 두루 갖추어졌으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숙정방은 강해지리라.
“혈교는 어떡할 거야?”
“없애야지. 놈들이 내빼기 전에.”
“내뺀다니?”
“놈들의 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
양견은 혈교도들의 전력이 미지수라고 했지만, 그가 겪은 일만으로도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교령만 있어도 양견회쯤은 하루 아침에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놈들은 무력 시위만 했어.”
그 말에 하후진이 뭔가 깨닫고는 혀를 찼다.
“그렇군. 혈귀놈들이 언제 그렇게 세상 친절했다고. 고민할 시간을 줄 리가 없는데.”
“진짜로 협박할 거였다면 혈서를 보내지도 않았겠지.”
바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놈들이 양견회를 도모하지 못할 정도로 숫자가 적거나 고수가 없다는 뜻.
백서희가 양 눈썹 사이를 모았다.
“그럼 양견 그 인간은 그걸 몰랐단 말이야?”
“마음이 급하니 시야가 좁아진 거지.”
냉정하게 살폈다면 양견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이나 칼잡이들을 보냈는데도 말아먹었기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럼 혈교가 협박질을 한 건....”
“아마 시간을 벌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은데. 왜 시간을 벌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정답이 무엇이든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하후진, 숙정방을 부탁한다.”
“엉? 안 따라가도 되냐?”
하후진이 눈을 끔뻑였다.
거들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숙정방에 남아달라고 말할 줄이야?
“너까지 나설 일은 아니야.”
“아니, 그래도 따라가고 싶은데. 혈귀놈들이랑은 싸운 적이 없거든. 그놈들 무공이 궁금해.”
“너랑 싸울 만한 놈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거야 모르는 일이잖냐.”
“...뭐, 마음대로 해라.”
하기사 하후진 같은 고수가 따라오겠다는데 한사코 말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원래는 흑무암쇄진을 쓸 생각이었는데....’
흑무암쇄진으로 몸을 감싸면 태양볕이 쨍한 날에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
백서희야 흑무암쇄진에 대해서 아니 상관없겠지만, 과연 하후진에게 그 사실을 밝혀도 괜찮을까?
‘나도 참 사람 어지간히 못 믿는군.’
하후진의 성격에 약점을 안다고 꼬투리를 잡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약점의 노출이 생존과 직결되는 만큼 쉬이 토로할 수 없는 것도 사실.
쓴웃음을 삼킨 강엽이 말했다.
“그럼 단목정에게 말하고 떠나자고.”
일행은 그날 밤 노주를 떠났다.
* * *
노주에서 황형촌이 있는 고인현까지의 거리는 삼백 리에 달했지만, 일행은 밤새 달린 끝에 동이 터오를 무렵엔 고인현 근처의 노상 객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단목정은 말을 타고 갈 것을 권했지만 일행이 거절했다.
‘튼튼한 다리 놔두고 왜 말을 타고 가냐? 말은 허약한 놈들이나 타는 거다!’
...라고 하후진이 무식한 소리를 지껄였을 땐 다들 미친놈처럼 쳐다봤지만 말이다.
사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다.
크고 튼튼한 준마도 오랫동안 전력질주를 할 수는 없는 법.
반면 강엽이나 하후진 같은 고수는 내공이 허락하는 한 말보다 빨리, 더 오래 달릴 수 있다.
‘난 쟤들처럼 무식하지 않으니까 말 타고 갈게.’
백서희만 밤눈이 밝은 준마를 타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적수하(赤水河)를 따라 고인현의 경내로 들어간 일행은 운기조식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식사를 하러 모였을 때 교자를 우물거린 하후진이 문득 말했다.
“너랑 같이 다니면 어째 밤낮이 계속 바뀌는 것 같구만. 자꾸 밤에만 움직이니까 그런 소문이 나는 거 아니냐.”
“무슨 소문?”
“못 들었냐? 네가 밤에만 일하는 것 때문에 다들 무공 때문이 아니냐고 떠들던데.”
“...그런 소문이 돌았나?”
하기사 밤에만 일하는 걸 고집하니 다들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엽이 낮에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사자 앞에서 이런 얘기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너 갑자기 사라지는 재주 있잖냐?”
“암신?”
“어, 그래, 그거. 아무튼 그게 어두울 때만 쓸 수 있는 비기가 아니냐는 말들이 많더라. 밝은 데서는 잘 안 쓴다고 말이야.”
“으음....”
아무래도 많이 쓰다 보니 세인들은 암신을 강엽의 성명절기라고 봤던 것이다.
백서희가 전음을 보냈다.
[진짜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거지?]
[그래, 아직은.]
언젠가는 백서희나 전강에게 말했듯 진실을 밝힐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무조건 숨기는 게 능사는 아니겠지.’
분명히 하후진도 내심으로는 강엽이 밤에만 활동하는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 알고 지냈으니 단순한 생활 습관을 넘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계속 밤에만 다닌다면 의심만 깊어질 뿐.
만약 하후진과 앞으로도 같이 일할 거라면, 적어도 낮에 다닐 수 없는 이유 정도는 말해둬야 신뢰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뜸을 들인 강엽이 한숨처럼 말했다.
“...내가 밤에만 움직이는 건 암신 때문이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는 거냐?”
“난 햇볕에 약하다.”
“뭐?”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
용린투를 벗고 창 사이로 들이치는 햇볕에 손을 내밀었다.
약한 햇볕인데도 불로 지지는 고통과 함께 발진이 난 것처럼 피부가 울긋불긋 달아오른다.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하후진이 대경할 때 강엽이 손을 빼냈다.
다시 용린투를 끼면서 화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하후진의 안색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너...!”
“이젠 내가 왜 낮을 피하는지 알겠지?”
하후진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자 강엽이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굵직한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아니, 미친놈아... 이런 약점이라면 말하지 마! 어떤 멍청한 새끼가 지 약점 말하고 다니냐?!”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하후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입맛은 저 멀리 달아나버린지 오래였다.
“보아하니 백서희는 이미 아는 눈치인데... 나랑 이 여자 말고 또 누가 아냐?”
“전강과 장경.”
전강은 강엽이 흡혈귀라는 사실까지 알고, 장경은 거기까진 모르지만 햇볕에 약해서 흑무암쇄진을 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수한텐... 말해주지 않았겠구만.”
“네가 네 번째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백서희가 유일하지만, 햇볕에 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 건 이제 하후진을 포함해 네 사람이었다.
‘아니, 한 명이 더 있나?’
북해빙궁의 야율산산. 오래전 헤어진 색목인 소녀가 잠시 떠올랐다.
이후 만난 일이 없어서 잊고 지냈지만 그녀 또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거참... 내 뭘 믿고 말한 거냐? 내가 어디 가서 나불댈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앞으로도 나랑 같이 다닌다면 내가 왜 낮을 피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뭐... 전부 말한 건 아니지?”
하후진은 바보가 아니다. 강엽이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강엽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끝까지 말하지 마라.”
강엽뿐만 아니라 백서희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전부 말하라고 하지 않나?
하후진이 반주를 홀짝 마시며 덧붙였다.
“돈 때문에 서로 뒤통수치는 게 낭인이란 족속이야.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는 경우도 허다해. 다른 놈들 약점을 물고 뜯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뭐야, 그래서 배신하겠다고?”
백서희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 하후진이 짧게 기침했다.
“크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가서 떠벌리진 않아.”
“모르지. 술김에 떠벌릴지도. 아니, 생각해보니 진짜 위험하네. 이놈한테 말한 거 실수 아냐?”
“그래서 전부 다 말해주진 않았잖나.”
“아하.”
백서희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후진이 벙찐 얼굴로 돌아보자 강엽이 코웃음을 쳤다.
“내 약점이 소문나면 범인은 십중팔구 이놈일 테니까 그때 가서 족치면 되겠지.”
“아, 아니, 이 여자도 안다며!? 전강과 장경도 알고! 왜 나만 갖고 그래!?”
“전강과 장경은 그럴 성격이 아니거든. 그리고 백서희는 말 못한다.”
“맞아. 말하면 죽는 불치병에 걸렸어.”
진조가 금제를 걸어버린 탓에 어디 가서 소문을 내는 순간 목숨이 날아간다.
하후진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불치병은 또 뭐냐?”
“그런 게 있어. 알면 다쳐.”
“뭐라는 거야. 여하튼, 네 문제 말인데... 낮에 습격받으면 위험한 거 아니냐? 대책 만들어둬야 하는 거 아녀?”
“안 그래도 마련했다.”
사실 이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강엽은 말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흑룡교의 술법진을 얻었거든.”
“푸훕! 쿨럭! 뭐, 뭐라고?”
독한 화주를 콧구멍으로 뿜어내는 진귀한 묘기.
옷에 몇 방울이 튀자 기겁한 백서희가 후다닥 뒤로 물러나서는 쌍욕을 내뱉었다.
“야이... 더러운 새끼야! 술을 왜 코로 뿜어!?”
“아, 아니 이런 망할...! 하도 놀랐으니까 그렇지!”
억울해하며 하소연하는 하후진의 모습에 강엽이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보여줄 테니까.”
* * *
객잔을 벗어나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서 팔찌를 들었다. 의념이 일자 안에 담긴 술법이 발동, 바닥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강엽을 감쌌다.
“이게 흑무암쇄진이구만. 사부한테 말로만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하후진의 사부인 염왕은 오십 년 전 흑룡교와의 정마대전에 참전한 전대의 고수, 심지어 흑룡교주를 격살한 영웅이었다.
흑룡교의 마인들과는 지겹도록 싸웠을 테니 흑무암쇄진을 아는 게 당연했다.
“근데 그 상태면 앞도 안 보이는 거 아니냐?”
“걱정 마라. 방법이 있어.”
안갯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안개가 압축되면서 강엽의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얼굴과 목을 비롯해서 햇볕에 노출되는 부분을 틀어막자 백서희와 하후진의 표정이 해괴한 것을 보듯 야릇해했다.
‘저건 뭔 안개인간도 아니고....’
‘눈 가리는 건 똑같은데?’
그때 얼굴을 감싼 안개에서 시뻘건 안광이 스치듯이 떠올랐다.
동자료혈로 공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향상시킨 것.
“좋아. 잘 보이는군.”
팔다리를 움직여도 안개가 아교처럼 따라온다.
하후진이 물었다.
“그럴 바엔 가면을 쓰는 게 낫지 않냐?”
“가면보다 훨씬 효율적이야.”
옷 안쪽도 내의처럼 감싸주기 때문에 햇볕에 완전 면역이었다.
“근데 아깝구만.”
“음?”
“너 낮엔 쥐약이라며. 그럼 낮에 지고 밤에 이기는 거 아니냐?”
“.......”
“이참에 별호를 주패야승(晝敗夜勝, 낮져밤이)이라고 바꿀 수 있었는데... 에잉, 재미없는 놈.”
이놈한테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 흑무암쇄진을 얻어서 다행이다.
강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구겼다.
“근데 혈귀놈들을 어떻게 찾을 거야?”
백서희가 의문을 제기했다.
노주 분타주가 말한 대로 이 근처의 지형은 복잡해서, 작정하고 뒤져도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술법으로 찾을 거다.”
우우우우웅......!
동심원처럼 넓게 퍼지면서 산골짜기 곳곳을 훑는 초음의 파동.
뭘 하는지 궁금해했던 두 사람은 잠시 후 하늘을 채우는 날짐승들의 등장에 오싹함을 느꼈다.
강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산골에 박쥐가 없을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