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41화 (141/450)

23화. 수색 (1)

타강과 장강이 만나는 강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층의 해월루(海月樓).

사천의 명주들을 고루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서 상인들과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지만, 정작 꼭대기층인 사층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양견은 죽을 맛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다니.’

원래는 양견회의 사업장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해서 노주 분타주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건만, 강엽은 단칼에 거절하고는 해월루를 약속 장소로 잡아버렸다.

더 짜증나는 것은 해월루가 본래 청우방의 소유라는 거다. 청우방주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그의 사업장을 뜯어버렸다고 했던가.

태화문의 이공녀가 도움을 줬다는 소문도 나돌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는데, 하필 해월루를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을 보면 확실했다.

숙정방도 아니고 청우방의 소유였던 해월루를 통째로 대관한 무슨 뜻이겠나.

이젠 청우방의 세력까지 자신의 영역 아래에 들어왔음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다.

‘후우, 그나마 인원 제한은 두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지만 양견은 아무리 많은 인원이 자신을 호위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장 강한 열 명을 호위로 삼고, 바깥에도 칼잡이들을 깔아두었지만 혼섬잔도를 꺾은 고수가 작정하고 살수를 쓴다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계단에서 소리가 나며 일단의 무리가 올라왔다.

노주 분타주를 빼면 세 명밖에 안 되었다. 의외로 숙정방주는 보이지 않고 묘령의 미녀와 얼굴에 흉터가 난 사자머리가 흑포 청년을 뒤따랐다.

꼴에 사내놈이라고 양견회의 칼잡이들은 흑포 청년보다는 미녀에 눈길이 쏠렸다.

육감적인 몸매에 딱 달라붙는 경장 무복을 입은 미녀가 비식거렸다.

“왜 날 봐? 이쪽을 봐야지.”

“크흠!”

턱짓으로 흑포 청년을 가리키자 양견이 정신을 차리고 기침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양견회의 칼잡이들이 회주의 눈치를 보며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자꾸 백서희 쪽으로 눈길이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돌아가면 두고 보자.’

속으로 벼른 양견이 일어나서 양손을 모았다.

“양견회의 회주 양견이오. 명성 자자한 귀영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오.”

“강엽이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하하, 아니오. 우리도 방금 왔소이다.”

딱히 강엽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었다. 양견이 조금 더 일찍 왔을 뿐.

그때 해월루의 총관이 나왔다.

“오셨습니까, 대인!”

양견회주가 왔을 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사람이 강엽이 오자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청우방주가 가졌던 사업장이 모두 강엽의 손에 넘어왔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었다.

‘한데 원래 저 사람이 총관이었나?’

하마터면 무심코 넘어갈 뻔했다.

양견은 해월루에 처음 오지만, 원래는 다른 사람이 총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본디 청우방주의 측근이 해월루의 총관이었던 것이다.

그가 의문을 품거나 말거나 강엽은 늙은 총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대인이라니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부디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대인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소인은 말년에 큰 곤경을 겪었을 겁니다.”

“무슨 그런 겸양을. 천금상단에서 행수를 지내셨던 분이라면 누구나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겁니다.”

천금상단의 이름까지 나오자 양견은 물론 노주 분타주까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천 제일 상단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계속 말씀을 낮추라고 하시니 이렇게 말하겠소.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이쯤 합시다.”

“허허, 알겠습니다. 제가 손님들을 모셔놓고 너무 시간을 빼앗았군요. 바로 상을 올리겠습니다.”

총관이 한쪽으로 신호를 보내자 아리따운 시비들이 술과 음식을 내왔다. 노주 제일의 주루답게 입이 떡 벌어지는 명주와 진미들이 식탁에 올라온다.

하지만 양견은 술과 요리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총관이 시비들과 함께 인사를 하고 사라진 뒤에야 강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천금상단과 연줄이 있으실 줄은 몰랐구려.”

“운이 좋았소.”

총관은 천금상단의 행수로서 은퇴한 사람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상단에서 나온 그는 그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적단이 고향을 휩쓸어버리는 바람에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어찌 천금상단에 소식이 닿고 조영옥의 귀에도 들어왔던 것이다.

현장에 복귀하는 것보다는 아예 새로운 자리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마침 노주에 온 김에 강엽에게 천금상단의 행수를 추천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소? 청우방주의 사람을 계속 쓸 수는 없으니 바꿨지.”

지금이야 해월루만 책임자가 바뀌었지만 머지않아 청우방의 사업장 전체가 물갈이될 것이다.

숙정방과 사업 영역이 겹치는 곳은 합병할 테고, 불필요한 사업은 전부 정리할 셈이었다.

“마침 사채도 정리할 생각인데 생각 있으면 말해주시오. 양견회에 넘길 의향도 있으니까.”

“그게 정말이시오?”

“값만 잘 쳐준다면야.”

사채뿐만이 아니다. 이 기회에 뒷말이 나올 만한 사업은 전부 정리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의뢰 때문에 약속을 잡은 것이지만 양견도 강엽의 속셈이 궁금했기에 진지하게 임했다.

“귀영이라고 부르면 되겠소?”

“강 무사라고 부르시오. 난 그 별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소.”

“아, 알겠소. 강 무사, 의뢰를 맡기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묻는 건 좀 그렇지만, 청우방을 어찌 하실지 여쭤봐도 되겠소?”

“생각 중이오.”

조영옥이 제안했던 대로 숙정방과 청우방을 경쟁시키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문제는 청우방을 이끌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강엽에게 반감이나 두려움을 품고 야반도주하는 인원도 늘고 있었다.

‘머릿수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정 안 되면 받을 놈만 받고 합병해야지.’

단목정이나 고섭풍의 부담이 좀 늘겠지만, 그 정도는 능히 감당해낼 거라 생각했다.

‘힘들면 영약 주고 일 시키면 되고.’

단목정이나 고섭풍이 알았다면 참 할 말 많은 표정을 지었을 생각.

강엽이 픽 웃었다.

“말이 다른 데로 샜군. 사업을 논하는 자리도 아닌데.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으음, 그러는 게 좋겠구려.”

양견도 동의했다.

* * *

“강 무사도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본회는 사채로 세를 일구었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채는 참 위험 부담이 많은 사업이오.”

담보를 받지 않고 큰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빚쟁이가 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거주지가 확실한 사람한테만 빌려주고, 확실하게 이자까지 받아내기 위해서 부하들을 시켜 독촉을 했다.

“한데 가끔 있단 말이지. 돈 빌린 주제에 안 갚고 튀는 연놈들이.”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고리대를 감당하지 못해서지만, 양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담보도 없이 목돈을 턱턱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억울하면 사채를 쓰지 말고 전장에 가서 돈을 빌리면 된다.

“그런 놈들은 본회의 칼잡이들을 보내서 잡아온다오. 사내 새끼는 염전이나 광산에 넘기고, 계집은 매음굴에 넘기지. 암시장에 노예로 팔기도 하고.”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닌데.”

“뭐, 이해하오. 근데 어쩌겠소? 원금이라도 회수하려면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문제는 도망친 빚쟁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고, 있어도 양견회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빚쟁이가 암담한 심정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만 제외한다면.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튼 양견은 강엽 일행이 아무도 웃지 않자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도망친 건 젊은 연놈이었소. 당연히 부하들한테 잡아오라고 했지.”

“그런데 실패했다는 건가?”

“그렇소.”

지나가던 무림 고수가 흑도 방회에 쫓기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해준 것도 아니었다.

양견이 짓씹듯 이를 갈았다.

“재수가 없었지. 정말로... 연놈이 도망친 곳에 혈교도들이 있었소.”

“...!”

혈교라는 말에 강엽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백서희와 하후진도 마찬가지였다.

“혈교라는 건 어찌 알았소?”

“살아서 돌아온 놈의 말에 의하면 그놈들은 피처럼 시뻘건 옷을 입었소.”

도망친 빚쟁이들은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간 셈이었다.

늑대도 뭣도 모르고 쫓다가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한 끼 식사거리가 됐고 말이다.

“혈귀 새끼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소.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연히 그놈들이 거기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살아 돌아온 자는 뭐라고 했소?”

“말하지도 못하고 죽었소. 화살을 맞은 채 간신히 도망쳤는데, 유언만 남기고 절명했지.”

혈귀들이 동료들을 몰살시켰다는 말만 남기고 죽은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 있소. 혈귀 새끼들한테 우리 애들 잃었는데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지. 그래서 더 많이 보냈는데... 그 녀석들도 감감무소식이었소.”

“그쯤 되면 혈교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

“사흘 전에 본회의 대문에 화살이 날아왔소.”

양견이 시선을 보내자 뒤에 있던 부하들 중 한 명이 시커먼 화살을 들고 왔다. 강엽은 화살에서 나는 은은한 피냄새를 맡고 미간을 좁혔다.

“사람을 죽인 화살이군.”

“그렇소. 활잡이놈은 이걸 대문을 지키는 녀석의 심장에 쐈소. 한 발로 등짝까지 뚫어버렸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소만.”

“혈서가 묶여 있었소.”

양견이 꾸깃꾸깃해진 서찰을 꺼내들자 노주 분타주가 그것을 강엽에게 전달했다.

“얌전히 혈교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쓸어버리겠다고 하더이다. 무림맹이나 구파에 알린다면 본회의 개새끼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고 몰살시키겠다고 했소.”

“.......”

“난 목숨 걸고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이오.”

강엽이 일을 맡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였다. 혈교에 굴복하거나, 처참하게 몰살당하거나.

“그러면 나한테 말하나 구파에 말하나 그렇게 큰 차이도 없지 않소?”

“그들이 나 같은 흑도 무림인을 만나줄지도 의문이고, 찾아가는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오.”

하긴 가장 가까운 아미파도 팔백 리가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미파를 설득해도 그때쯤엔 혈교가 양견회를 짓밟으리라.

“놈들이 숨은 위치는?”

“고인현(古藺縣)의 황형촌(黃荊村) 근처요.”

노주 분타주가 첨언을 보탰다.

“그 근처는 울창한 수림이오. 지형이 복잡한 만큼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외다.”

“거기서 혈교가 뭔가를 꾸민다는 거군.”

뭔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얌전히 교리 공부나 하자고 인적 드문 산골에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혈교와는 척을 진 만큼 한두 놈 더 죽인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마당.

하지만 강엽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혈교가 끼었다면 위험하군. 자칫 이쪽에 불똥이 튈 수도 있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양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쪽이 나와 혈교를 붙이려고 끌어들이려는 게 아닌지 의심도 되고 말이오.”

“내가 거짓 의뢰를 한다는 말이오!?”

“의뢰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겠지. 근데 공멸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강엽이 혈교와 같이 죽으면 숙정방은 붕 떠버린다. 청우방도 풍비박산이 난 판국이니 양견회가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의뢰를 받아서 얻는 이득이 없군. 오히려 혈교가 양견회를 박살낼 때까지 기다리면 노주 흑도가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

양견회의 칼잡이들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양견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혈교에 항복하면 어쩌시려고?”

“구파에 제보하면 되겠군.”

“당신이 혈교의 교성을 죽였음을 알고 있소. 귀주의 무림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소이다.”

“...그 소문이 벌써 퍼졌나?”

강엽이 혀를 찼다. 양견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협상에서 완벽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좋소. 나도 혈교와 친하지는 않으니 도와드릴 용의는 있소. 하지만 공짜는 안 되오.”

“돈이라면 얼마든지....”

“돈은 나도 많소. 물론 낭인전에도 수수료를 줘야 하니 돈도 받아야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무엇을 원하시오?”

“동맹.”

뜻밖의 요구였다. 차라리 충성을 요구했다면 모를까, 동맹이라니?

“그게... 참말이오?”

“내 밑에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올 거요?”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강엽도 사채나 굴리는 빚쟁이놈의 충성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놓고 손을 잡자는 건 아니오. 특정 상황에서 같이 뜻을 맞추자는 거지. 맹월림을 아시오?”

“...들어봤소. 운남에서 기승부리고 있다던데.”

“놈들이 노주를 통해 사천에 진출하려고 했소. 청우방이 교두보가 될 뻔했지.”

“그런...?”

“조건은 둘이오. 맹월림과 혈교를 배격할 것. 그리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것. 노주 분타주가 약속의 공증인이 되어야 하오.”

노주 분타주가 공증인이 된다는 건 낭인전이 약속의 증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약속을 어기면 낭인전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

“어쩌겠소?”

“...답은 정해졌고 난 대답만 하면 되는군.”

혈교의 개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

약속만 지키면 온전히 회주로서 행세할 수 있는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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