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6화 (126/450)

19화. 혈룡 (10)

심장까지 닿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단혼마백의 대처가 빨랐다. 전강에게 공격받는 와중에도 심장만은 심후한 내공으로 보호한 것이다.

“헉! 허억!”

숨을 몰아쉬는 단혼마백의 얼굴에선 차갑게 식은 땀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네놈... 모산파의 술법을 익혔구나. 모산혈조와 원한만 있는 게 아니었어.”

“그래, 그 늙은이 술법을 훔쳤다.”

그 말엔 전강과 백서희도 놀랐다.

안 그래도 강엽이 어디서 술법을 익혔는지 궁금했었는데 모산파의 술법이었을 줄이야?

“근데 그 정도는 망혼소를 썼을 때 알아봤어야지.”

“그것도 모산파의 술법이었나?”

망혼소는 몰랐던 모양이다.

앞머리를 쓸어올린 단혼마백이 돌덩이처럼 굳어진 어깻죽지를 곁눈질했다.

‘몰아내려면 시간이 걸리겠구나.’

이깟 술법으로 죽을 그가 아니지만, 문제는 승부의 추가 놈들에게 기울었다는 것이다.

“쯧, 이것만은 쓰기 싫었건만.”

쿠르르르르르릉......!

의념이 일자 지진이 일어난 것마냥 공간이 흔들렸다.

백서희가 인상을 썼다.

“뭐야? 또 기관진식이야?”

단혼마백이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말하지 않았느냐? 이미 흑룡교의 노부의 것이라고.”

닫혀 있던 벽이 열리며 통로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수십의 인영들.

“저들이 왜...!”

전강이 신음처럼 외쳤다.

며칠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해서 해골처럼 피골이 상접한 자들이 허연 눈을 희번뜩거린다.

술법진에 사로잡혀 이지를 잃은 자들이 제 발로 들어왔던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은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대기시켜뒀군.”

“어찌할 테냐?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 노부와 싸울 테냐?”

그 말을 하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강엽을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아, 그래. 네놈도 사마외도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구나. 죽일 테면 죽여보거라.”

“....”

구태여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강엽은 일행을 힐끔 돌아봤다.

당연하지만 전강과 백서희 모두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운도 좋네. 쫄쫄 굶은 사람들 맞아?”

“술법의 힘 같구려.”

수십, 수백 명이 떼를 지어 덤비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빠르기는 해도 관절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게 일행을 위협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단혼마백이랑 싸울 때 덤비면 귀찮아지겠지.’

강엽이 초음의 파동으로 그들을 훑었다.

술법의 기운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가 팔다리를 조종하고 있는 걸 보면 억지로 움직이는 괴뢰인(傀儡人)이나 다름없었다.

“백서희.”

“죽이지 말아야겠지?”

“가급적.”

“쓰읍, 어쩔 수 없지.”

혼자서 수백 명을 감당하긴 힘들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입구를 틀어막는 수밖에.

하지만 그 시도는 시작도 전에 좌절되었다.

“오, 설마 통로가 하나뿐이라 여겼던 게냐?”

“뭐라고?”

쿠그그그긍......!

반대쪽 벽의 기관진식이 움직이면서 또 하나의 통로가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이지를 잃은 괴뢰인들이 삐걱거리며 달려오자 백서희가 뜨악했다.

“이건 나 혼자서 무리야!”

“....”

이번엔 강엽도 할 말을 잃었다.

‘상관추영을 너무 빨리 죽였나?’

진법으로 입구를 가뒀으면 이런 곤경에 처할 일도 없었을 텐데.

물론 당시엔 상관추영을 죽이는 게 최선이었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전강, 혼자 싸울 수 있겠습니까?”

“맡겨주시오.”

백서희만 싸우게 둘 수는 없다.

전강이 단혼마백을 붙잡고 있는 동안 괴뢰인들을 막아야 했다.

그렇게 달려가려고 할 때.

“갑시다, 무림 동도들이여!”

“와아아아아아!”

돌연 통로 뒤쪽에서 터진 함성.

낯익은 목소리에 강엽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후개?”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을 모으겠다고 떠났던 후개가 통로를 돌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단혼마백도 예상치 못했는지 혀를 찼다.

“엉뚱한 놈들까지 낚였군.”

그가 손을 휘젓자 기껏 열린 통로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당혹성이 터져나왔다.

“전강!”

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엽이 부르기도 전에 단혼마백을 향해 한 줄기 유성처럼 쏘아졌다.

“흥, 팔 하나 못 쓴다고 해도 네놈쯤은!”

휘우우우웅... 쿠앙!

막강한 경파가 충돌하자 충격파가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한 팔을 못 쓰게 됐음에도 의외로 단혼마백은 그리 밀리지 않았다.

강엽이 눈을 빛냈다.

‘술법진과 한 몸이 된 건가?’

* * *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어주는 술법진의 기운.

정확한 원리는 몰라도 단혼마백은 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공력을 퍼다 쓰는 셈이었다.

필시 젊음을 되찾은 것도 술법진 덕분일 터.

그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강엽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어째서 혈교도인 단혼마백이 흑룡교주의 의지가 깃든 술법진과 하나가 되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지.

‘차도살인. 단혼마백의 손을 빌려서 우릴 죽이고 백서희를 제압하려는 건가?’

돌이켜보면 싸움에서 꽤나 가까이 있었음에도 백서희가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잘 피해다닌 덕분도 있지만, 단혼마백이 그녀가 있는 쪽으론 잘 공격하지 않았다.

일행 중에 가장 약한데도 말이다.

‘만약 술법진이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면....’

단혼마백을 죽이는 걸론 끝나지 않겠지.

서둘러 백서희 쪽으로 달려간 강엽이 그녀를 뒤에서 기습한 괴뢰인을 발길질로 날려버렸다.

발끝에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맴돌았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어, 강엽?”

“상황이 바뀌었다. 옥좌에 앉아야겠어.”

“뭐? 제정신이야!?”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설명해 봐.”

“아마 단혼마백은 죽었을 거다.”

“...?”

“저기서 싸우는 건 단혼마백이 아니야. 자기가 단혼마백이라고 믿고 있는 미친놈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괴뢰인의 옷깃을 쥐고 다른 괴뢰인을 향해 집어던졌다.

이어 너머에서 몰려오는 놈들을 태극반의 경파로 엉뚱한 데로 날려버리면서 혀를 찼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놈들과 같다는 거다. 놈도 술법진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어. 실질적으론 죽은 셈이지.”

“끄응, 무슨 말인지 원... 아무튼 그렇다 치고 옥좌는 왜?”

“흑룡교주와 만나려고.”

“그게 될까?”

“해봐야 알겠지.”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

마침 반대쪽의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개가 무림인들을 이끌고 이쪽에 합류했다.

“강 형! 백 소저! 무사했구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흐흐, 시운이 따랐소. 모여있는 곳에서 갑자기 통로가 뻥 뚫리지 뭐요. 물론 저치들이 나타났을 땐 좀 식겁하긴 했지만....”

괴뢰인들을 따라가면 술법진의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는 촉이 왔던 것이다.

충돌하지 않도록 뒤에서 따라왔는데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일행이 있는 곳이었다.

“한데 전강이라는 분과 싸우고 있는 양반은 누구요? 저렇게 엄청난 고수가 단혼마백 말고 또 있었소?”

“저자가 단혼마백이야.”

“어... 지금이 농담하기에 좋은 때는 아닌데?”

“농담 같나?”

강엽의 눈빛이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오자 말문이 막힌 후개였다.

“미안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어. 우린 옥좌에 간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

“으음, 뭘 하면 되겠소?”

“호위.”

강엽은 옥좌에 앉는다면 흑룡교주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방비해진 동안 지켜줄 전력이 필요했다.

“아, 알겠소. 목숨 걸고 지키리다.”

괴뢰인들을 막고 후리면서 옥좌로 다가갔다.

전강과 공방을 나누면서도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린 단혼마백이 격분했다.

“멈춰라! 네놈들이 탐할 것이 아니다!”

강엽 일행을 향해 일장을 격발하려고 했던 그가 백서희를 보고 일순 멈칫했다.

그 틈을 탄 전강이 어깨를 집어넣어 단혼마백을 저 멀리 떨쳐냈다.

바위처럼 굴강한 어깨에 튕겨나간 단혼마백이 치를 떨었다.

“언제까지 방해할 셈이냐, 이교의 죄인!”

“당신의 목숨이 다하는 때까지.”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부딪치는 동안 강엽은 옥좌에 도착했다.

“어때?”

“아무 느낌도 없는데.”

백서희가 낭패감에 휩싸이자 사정을 모르는 후개의 안색도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설마 실패한 거요?”

“...나도 앉을까?”

만약 백서희가 옥좌에 앉았는데 강엽은 멀쩡하고 그녀만 영향을 받는다면 최악의 실패였다.

고개를 가로저은 강엽이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눈꺼풀을 내린 채 조금씩 내면으로 빠져든다.

과거 심상세계에서 진조를 만났듯이 의식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확장시킨다.

조금씩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흑룡교주.’

검은 용포를 입은 사내.

암전되어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날선 시선을 보낸다.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흑룡교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애써 만난 게 무색하게도 대화를 할 의지가 없는 듯한 태도.

그러자 강엽의 의식이 더욱 넓게 확장하여 흑룡교주가 물러난 거리만큼 쫓아갔다.

한껏 벌렸던 거리가 다시 가까워지자 놈이 곤혹스러워했다.

-혈마....

‘엉?’

여기서 혈교의 시조가 왜?

‘이놈, 뭔가 알고 있다.’

차라리 괴물이나 마인이라면 모를까, 혈마라고 콕 찝어 말한 것이 우연일 리가 만무.

흑룡교주는 계속 멀어지려고 했고, 강엽은 그런 흑룡교주를 쫓아가려고 의식을 확장시켰다.

‘이놈이 어딜 도망가?’

밑도 끝도 없는 술래잡기에서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평선처럼 계속 쫓고 쫓기는 둘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깥에선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강과 단혼마백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주변까지 불똥이 튀었 것이다.

강엽을 호위하는 백서희와 후개 등 무림인들도 괴뢰인들에게 둘러싸여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사매, 이러지 마라!”

“성아야!”

지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짖는다. 여기저기서 사형제와 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

운가장주는 자식들이 눈을 허옇게 치켜뜨며 달려오는 꼴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후개는 끝내 내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괴뢰인이 된 하 소저를 보고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살수를 쓰진 못하고 점혈을 하거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선에서 싸우고 있지만 무작정 막기엔 한계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점혈은 통하지도 않았고 사지가 전부 부러지는 게 아니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심지어 사지가 부러져도 쓰러진 채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백서희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오래 버티진 못해.’

죽이지 않는다면 괴뢰인들의 파도가 그들을 덮칠 것이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강엽이 일이 생각대로 안 되는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그때 강엽이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성공했어?”

“아니, 놓쳤다.”

술법진의 근원을 파고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결국 흑룡교주는 놓치고 말았다.

“네가 필요해.”

놈을 낚으려면 미끼가 필요하다.

그냥 지나치고는 못 배길 크고 아름다운 미끼가.

“야, 그러다 쫄딱 망하면....”

“백서희.”

강한 확신이 어린 결기.

입맛을 씁 다신 백서희가 짐짓 쌍심지를 돋웠다.

“망할, 죽으면 귀신 돼서 평생 너 따라다닐 거야.”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길게 숨을 내쉰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면서 강엽의 다리 위에 앉았다.

야릇한 자세에 강엽도 남사스러워졌지만 옥좌가 크지 않았기에 다른 수가 없었다.

우연히 두 사람을 돌아본 후개만 경악했다.

“어어? 두, 두 분? 남녀가 유별한데 그건 좀...!”

“닥치고 앞이나 봐!”

백서희가 홍시처럼 시뻘게져서 외치자 후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옥좌에 직접적으로 엉덩이를 붙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가 앉자 술법진의 기운이 반응했다.

의식이 아득히 떨어졌다.

* * *

“여기는....”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곳이었다.

안력을 집중해도 눈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절로 경계심이 곤두섰다.

그때 안갯속에서 무언가 손목을 잡아챘다.

“헉!”

헛숨을 들이킨 그녀는 상대의 팔을 꺾으면서 무릎을 걷어찼다.

의외로 상대는 저항할 마음이 없는지 순순히 쓰러졌다.

“손속이 꽤 매서운데.”

“가, 강엽?”

“그래, 나다.”

백서희가 당황한 틈을 타서 일어난 강엽이 손목을 털었다. 재생력 덕분에 고통은 빠르게 가셨다.

“어, 미, 미안. 너인 줄 몰라서....”

사실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게 이 안갯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옆에 반드시 강엽이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내공은 어때?”

“...쓸 수는 있는 것 같아. 근데 여긴 어디야?”

또 환상 속인가 싶었는데 몸도 내공도 멀쩡히 움직이는 걸로 봐선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아마 심상세계일 거다.”

“그게 뭔데.”

답은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마음 속 세상이지.

안개가 양옆으로 쭉 나뉘며 드러난 대지.

검은 용포를 입은 사내를 알아본 백서희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흑룡교주...!”

-다시 보는구나, 내 후손이여.

흑룡교주는 그녀의 곁에 선 강엽을 보고 찝찝해하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저주받은 혈족.

“날 혈마라고 불렀지.”

-설마 옛 전설이 진짜였을 줄은 몰랐다. 혈귀놈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건만.

“혈마가 흡혈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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