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6)
쿠구구구궁......!
“지긋지긋하네, 정말.”
마치 용틀임을 하듯 메아리치는 둔중한 소리.
또 다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에 백서희가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상관추영을 앞세워 올바른 길을 간다고 해도 시시때때로 길이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멀쩡한 길이 막히거나, 엉뚱한 곳에서 길이 이어지거나, 갑자기 땅바닥이 꺼졌던 것이다.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다.”
“다르다니?”
“나도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관추영에게 길안내를 맡긴 것과 별개로 강엽은 기관진식이 움직일 때마다 초음을 발동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파동을 받아들이며 일대의 구조를 손금 보듯 들여다봤다.
“지금은 갑자기 아귀가 맞물린 것 같은 느낌이야.”
지금까진 억지로 맞춘 듯 불협(不協)을 이루었던 기관진식이 이 순간 하나로 이어졌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게 제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아귀가 맞물렸다고?”
“확실한 건 아니다.”
“넌 뭐 아는 거 없어?”
화살은 상관추영에게 돌아갔다.
“...어쩌면 기관진식이 완성됐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흑룡교주의 안배였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
말해도 탈이 없는 것만 입밖에 내야 했다.
“기관진식이 격렬하게 움직였던 건 침입자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건 결과론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이 개미를 밟기 위해 걷진 않습니다.”
“뭐?”
“걷다 보니 개미를 밟을 뿐이지요.”
“....”
그제서야 백서희도 대강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상관추영의 말대로라면 기관진식은 사람들을 흩어놓으려고 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불경한 침입자들을 떨어트릴 의도가 아예 없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일부일 뿐.”
기관진식을 이루는 구궁팔괘의 이치가 완성되면서 무엇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하아, 대체 이 망할 기관진식은 언제쯤 끝나는 거람?”
상관추영도 시간을 허비할 마음은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교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으니까.
‘그리고 교주께서 뜻을 이루시면....’
앞서가는 백서희를 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당장 흑룡교를 재건하진 못하더라도, 비고를 열기만 하면 교의 신공들을 익힐 수 있으리라.
“혹시 모르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상관추영은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엽의 눈에 일순간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는 것을.
‘술법진이 놈의 백회(百會)를 잠식하고 있다.’
그때부터 놈의 태도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다.
마치 옥좌에 가기만 하면 다 끝날 것처럼 말이다.
* * *
“팽 단주!”
“...야차마곤?”
팽관후는 건너편에서 나타난 야차마곤의 모습에 긴장감을 풀었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교성이나 교령 같은 강자들이 나타났다면 더욱 궁지에 몰렸을 테니까.
야차마곤은 팽관후의 발치를 굴러다니는 시체들을 알아보고 불호를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역시 팽 단주도 저들을 만났구려.”
그가 말한 ‘저들’은 혈교에 붙은 사파의 고수들이었다.
팽관후 역시 여기저기 헤지고 피에 절은 야차마곤의 행색을 보고 그가 겪은 일을 짐작했다.
“마곤께선 누굴 만나셨소?”
“황충팔객이라 불리는 마구니들이었소. 하나 셋밖에 없었소. 나머지는 어딨는지 모르겠구려.”
“하나는 내 손에 죽었소. 그리고....”
팽관후가 상대한 적은 황충팔객만이 아니었다.
큼지막한 한손 도끼를 든 칠척의 근육질 거한이 상반신이 쩍 갈라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텁석부리 거한의 시체를 본 야차마곤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폭산호부...!”
“위험할 뻔했소.”
호광과 귀주, 사천까지 이어지는 무릉산맥엔 일곱 개의 녹림 산채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그중 폭산채는 귀주 북쪽에 있는 범정산(梵淨山) 부근에서 활동하는 악명높은 녹림채로, 채주인 폭산호부는 절정의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팽관후는 그런 폭산호부와 황충팔객의 협공을 이겨내고 놈들을 황천길로 보내버린 것이다.
“참으로 큰일을 하셨구려.”
“아직 끝나지 않았소. 단혼마백은 물론이고 다른 자들의 행방도 묘연하오.”
“으음...!”
야차마곤이 침음했다.
그 역시 황충팔객이나 혈교도들을 때려눕혔지만, 다른 고수들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귀하의 사제라는 사람도 행방이 묘연하오.”
“사제는 이런 데서 목숨을 잃을 사람이 아니오.”
“상대는 단혼마백이오.”
“누구든 마찬가지요. 사제의 공력은 마구니들에게 극독이나 다름없소.”
그 말에 팽관후가 입을 다물었다.
하북팽가의 혈족으로서 젊은 시절에 무림맹에 들어갔던 그였다.
덕분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강호의 비사에 대해서도 몇 가지 들은 게 있었다.
그중 하나인 외소림은 백도 정파의 무림인들조차 실존을 의심하는 강호 전설.
소림사는 외소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총군사와 친분이 있는 그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잔영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단혼마백은 분명히 기관진식이 발동하기 전에 야차마곤의 사제를 외소림이라고 불렀다.’
달리 말하면 야마차곤 역시 외소림이라는 뜻.
팽관후가 신중히 운을 뗐다.
“귀하가 어느 사찰의 파계승이라는 소문은 들었소. 하나 외소림 출신일 줄은 몰랐구려.”
“....”
야차마곤의 두툼한 입술이 다물렸다.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심경이 복잡한 눈빛이었다.
“...그건 세월의 풍상에 묻힌 이름이오.”
굳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단호한 거절을 느낀 팽관후는 포권을 쥐었다.
“실례했소. 사과하리다.”
“얼른 움직이기나 합시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혈교의 음모를 막으려면 최대한 빨리 흩어진 자들을 모아서 놈들을 저지해야만 할 터.
그렇게 발을 떼려고 할 때였다.
“...야차마곤.”
“나도 봤소.”
무언가를 발견한 두 사람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았다.
분명 조금 전까진 그들 말고 아무도 없었건만, 어느 샌가 정체불명의 사내가 서 있었던 것.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게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고인께선 뉘시오?”
-....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한데 야차마곤은 사내의 행색을 보고 무언가 떠올렸는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설마?”
“왜 그러시오?”
“저자의 옷을 보시오!”
야차마곤이 지적하고 나서야 팽관후는 사내의 행색이 비상식적임을 깨닫고 입매를 굳혔다.
비록 새카맣긴 해도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오조룡의 용포를 입은 것은 역도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미친. 실성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옷을!”
“예전에 방장 스님께 들은 적이 있소.”
소림의 주지를 운운한다. 옛일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던 야차마곤답지 않은 동요였다.
“흑룡교주, 그 간악한 마구니가 제 주제도 모르고 저따위 옷을 입고 설쳤다고 말이오.”
“...소림의 방장 대사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소?”
아무렴 소림의 방장쯤 되는 인사가 저렇게 저렴하게 말했을까.
야차마곤도 자기가 너무 사견을 섞어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겸연쩍어했다.
“다소 과장은 섞였어도 흑룡교주가 저런 옷을 입었던 건 사실이오. 제 딴엔 흑룡포(黑龍袍)라고 이름 붙이고 다녔다던데.”
“생각해보니 나도 가문의 어른들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소. 하면 저게...!”
-가련한 중생들이여.
혼란에 빠진 두 사람을 향해 흑룡교주의 인영이 공기를 울리는 전성(顫聲)을 발한다.
-그대들의 희생은 본교를 부활시킬 초석이 되리라.
“이런 마구니놈이 감히...!”
노기를 억누르지 않은 야차마곤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황충팔객의 칼날을 발등으로 걷어올렸다.
그리고는 칼머리인 도수를 후려쳐서 흑룡교주를 향해 쏘아보냈다.
막강한 경력을 싣은 만큼 막거나 피할 수밖에 없었지만, 호쾌한 궤적을 그리며 쏘아진 칼날은 흑룡교주의 인영을 통과했다.
“정말 귀신이란 말인가?”
팽관후가 목구멍을 쥐어짜자 대갈일성을 토했다.
“갈-!”
불문의 공력이 깃든 사자후(獅子吼)!
과연 이번엔 효과가 있는지 흑룡교주의 인영이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끝끝내 사라지지 않은 흑룡교주가 두 사람을 향해 낮게 뇌까렸다.
-모든 것은 본 교주의 뜻대로.
“닥치지 못하겠느냐!”
설핏 웃음을 흘린 흑룡교주가 스스럼없이 등을 돌리자 야차마곤은 혈압이 치솟았다.
팽관후가 그의 어깨를 잡고 만류했다.
“진정하시오! 저자의 정체가 뭐든 섣불리 상대할 자는 아니오!”
흑룡교주는 꺼질 듯 말 듯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야차마곤이 혀를 찼다.
“일단 따라가봅시다.”
“정말 그래도 되겠소?”
“당연히 우릴 함정에 빠트릴 심산이겠지.”
“하면 왜?”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드르륵!
묘한 기관음과 함께 야차마곤이 지나쳤던 통로가 닫히기 시작했다.
“우린 이미 함정에 빠졌소, 팽 단주.”
“...그런 것 같군.”
유일한 길은 흑룡교주의 귀신이 있는 곳뿐이다.
설령 이게 함정이라도 힘으로 깨부수는 수밖에 없으리라.
결연한 얼굴로 대도를 잡은 팽관후의 전신에서 팽가의 혈족들이 익히는 벽력(霹靂)의 기운이 푸른 불티를 튀겼다.
“좋소. 가봅시다.”
* * *
동정귀옹과 도비사음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면도, 친분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협력을 꾀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비사음은 음공밖에 관심이 없었고, 동정귀옹은 음공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어르신.”
“왜 그러나?”
“아까부터 길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소녀가 착각한 건지요?”
“아닐 걸세.”
어느 순간부터 기관진식이 움직이지 않았다.
동정귀옹같이 경험 많은 노강호가 수상쩍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동안 어느 쪽이 더 극심하게 피해를 입었을지....’
그는 내심 혈교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기를 바랐다.
그래야 일이 끝났을 때 단혼마백이 그들을 토사구팽할 마음을 먹지 못할 테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이 걷는 통로의 저편에 거대한 철문이 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거대한 용이 양각된 문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나운 용이 한 손엔 초승달을 쥐고 태양을 삼킨 채 승천하고 있는 형상.
문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열렸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찰나였다.
[들어오게.]
통로 전체를 메아리치는 전성이 두 사람을 반겼다.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연상시키는 신묘한 공능.
눈을 얇게 뜬 동정귀옹이 물었다.
“뉘시오?”
[허어, 섭섭하군. 자네가 거래했던 사람을 몰라보다니.]
“단혼마백?”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이 기억하는 단혼마백의 목소리와는 너무 달랐던 탓이었다.
[의심하는 건 이해하네. 한데 자네들에게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
불길하다.
말을 섞을수록 한기가 뼛속까지 흘러들어와서 심장을 옥죄인다.
하지만 단혼마백의 말대로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은 없겠지.”
“어르신.”
“일단 가보세.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아.”
도비사음이 체념 어린 한숨을 터뜨렸지만, 군말하지 않고 동정귀옹을 따라갔다. 여차하면 음공을 격발할 수 있도록 비파를 든 채.
그렇게 철문으로 들어갔다.
“왔군.”
“...?!”
웅장한 옥좌에 앉은 청년.
그들이 알고 있는 단혼마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작긴 해도 군살은 쫙 빠진 단단한 근육질의 몸.
허연 백발도 젊은 시절처럼 시커멓게 변했으며 피부 역시 윤기가 흘렀다.
젊은 시절 단혼마백을 만난 적 있는 동정귀옹은 그 모습에서 과거의 편린을 엿보고 경악했다.
“저, 정말 마백이시오?”
“내가 좀 많이 변하긴 했지?”
“어찌된 것이오? 하루 아침에 젊음을 되찾다니, 설마 그 사이에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오른 거요?”
“하하, 설마. 반로환동은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닐세. 삼화취정에 오른 노부도 까마득하지.”
“하면 그 모습은?”
“기연이 좀 따랐네.”
대체 어떤 기연이길래 반로환동 같은 효과를 누린단 말인가.
도비사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흑룡교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요?”
“맞네.”
단혼마백이 흔쾌히 인정하자 동정귀옹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무슨 일을 겪은 것이오?”
“간단하네. 흑룡교주는 자신이 운명의 패배자임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노부에게 넘겼네.”
“그게 무슨?”
“이해하기 힘들 테지. 하나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군. 노부야말로 흑룡교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전인이나 다름없네.”
“흑룡교로 갈아타시려고?”
“후후, 그럴 리가. 이 힘을 본교로 가져갈 걸세. 지금이라면 팔대교왕(八大敎王)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군.”
팔대교왕은 흑룡교의 구천호법처럼 혈교주를 보필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구파 장문인과 팔가주에 버금가는 초강자들이었다.
“모산혈조 그 늙은이가 왜 그토록 불로불사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것 같군. 그래, 한때는 노부에게도 이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지....”
눈을 감고 용솟음치는 기운을 음미한 단혼마백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마치 날카로운 기운이 뇌를 헤집는 감각에 두 사람은 아찔해졌지만, 이를 꽉 물고 주먹을 쥐었다.
나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단혼마백이 피식 웃고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 했던 제안 기억나나?”
“제안?”
“혈교에 귀의하라고 했던 것.”
“그건 거절했을 터인데.”
“그랬지. 하지만 상황이 변했네. 자네들이 원하는 비급은 모두 내가 쥐고 있거든.”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단혼마백이 순순히 비급을 내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문제는 지금의 단혼마백이라면 두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이자가 정말 팔대교왕만큼 강해졌다면 승산이 없다.’
망설이는 두 사람을 향해 단혼마백이 얇은 입술을 말아올렸다.
“싸움이 끝날 때쯤엔 답을 들려주게나.”
“싸움?”
무슨 말인지 몰라 의하해하던 두 사람이 무언가 깨닫고 몸을 돌렸다.
목에 염주를 건 거구의 사내와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도객이 들어오고 있었다.
“야차마곤과 비호탈명...!”
“역시 함정이었군.”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옥좌에 앉아있는 청년을 보며 미간을 좁힐 뿐.
“당신은 누구요?”
“마구니일 게 뻔하지.”
진각을 쿵 밟은 야차마곤이 단혼마백을 향해 철곤을 겨누었다.
“놈, 순순히 정체를 밝혀라!”
“가련하구나, 외소림의 고아야.”
“뭣이?”
“후후, 내 말이 가당찮게 들리는가? 하지만 너흰 그런 놈들이다. 너희가 없어졌을 때 누가 너흴 애도했더냐? 소림이 너흴 챙겨주었더냐? 오히려 너희의 흔적을 없애느라 급급했을 것이다.”
“네놈이 감히...!”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어찌 고아라 부르지 않겠느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야차마곤의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동정귀옹과 도비사음도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한 살기였지만, 정작 단혼마백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아쉽구나. 네놈이 아니라 다른 놈이 왔다면 재밌었을 텐데... 그래도 가볍게 몸 풀기는 좋겠지.”
옥좌에서 일어난 단혼마백이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이보시오, 마백...!”
“자네들은 가만 있게. 파계당한 나한승과 팽가의 벽력도를 함께 상대하는 게 날이면 날마다 즐길 수 있는 유희거리는 아니지 않나.”
단혼마백의 위로 핏빛 기운이 뱀처럼 꼬이며 두 사람을 굽어본다.
야차마곤과 팽관후는 심장이 떨릴 만큼 거대한 기운에 긴장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팽 단주.”
“합공합시다.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지 않소.”
어차피 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곧 핏빛의 혈광과 불문의 금광, 시퍼런 벼락이 섞이며 굉음이 일고 충격파가 일대를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