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1화 (121/450)
  • 19화. 혈룡 (5)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운기조식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일단의 무리가 일행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저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조심해야 하오. 적일 수도 있으니까....”

    화섭자(火攝子)를 들고 있는 건지 작은 불빛이 일렁거리고 있는 불청객들.

    그때쯤 눈을 뜬 강엽이 시선을 멀리 향한 백서희를 향해 물었다.

    “적인가?”

    “글쎄, 혈교는 아닌 것 같아.”

    물론 혈교가 아니라고 꼭 같은 편은 아니었다.

    황충팔객처럼 혈교와 손을 잡은 고수들일 수도 있으니까.

    ‘무림맹이라고 딱히 같은 편은 아니지만.’

    사실 후개를 데려가지 않으려는 것엔 그가 무림맹의 일원이란 이유도 한몫했다.

    강엽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서희와 상관추영 모두 뒤가 켕기는 입장 아닌가?

    “뭐, 적이라도 상관없어. 주변에 은혼사를 잔뜩 깔아뒀거든. 덤비는 순간 저 새끼들은 엿 되는 거야.”

    백서희는 그리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지만 한 사람만은 태연하게 넘기지 못했다.

    바로 후개였다.

    “자, 잠깐! 저 사람들이 무림맹이나 귀주성의 정파 무림인들일 수도 있소!”

    “그럼 함부로 덤비진 않겠지.”

    잠시 후 척후로 보이는 청년이 화섭자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 역시 이쪽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만큼 긴장감이 잔뜩 곤두선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 거기서 멈춰.”

    백서희의 경고에 청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만약 그가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발밑에 깔아둔 은혼사에 발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시, 실례했소. 여러분은....”

    청년이 말하는 도중 후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개방의 후개이십니까?”

    “그러는 형장께선 뉘시오?”

    “소생은 조검문주님의 제자인 고규라고 합니다! 여기서 후개를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검문의 무복을 입고 계셨구려. 하면 뒤에 계신 분들도...?”

    “그렇습니다. 귀주성 무림 방파들의 제자들이지요.”

    후개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청년의 눈길은 다른 일행들을 꺼림칙하게 훑어봤다.

    그제야 후개도 퍼뜩 정신 차리고 민망해했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이쪽은....”

    소개를 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이름 말고는 일행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 않은가?

    “저분 얼굴은 기억이 납니다. 운가장주님과 함께 합류하신 분이셨지요.”

    상관추영은 고개만 까딱였다. 흑룡교도인 그가 백도 정파의 무림인을 살갑게 대할 까닭이 없었다.

    일행을 어떻게 소개할지 머리가 복잡해진 후개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적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소. 우리와는 다른 방향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니까.”

    같은 편이란 건지 아니란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필이면 그 말을 한 당사자가 후개인 탓에 청년은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였다.

    “아, 무림맹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

    졸지에 무림맹의 맹도로 오해받은 강엽과 백서희는 꽤나 오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오히려 후개가 진땀을 빼며 변명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뭐랄까, 그게....”

    억지로 변명을 쥐어짜는 모습이 더욱 이상했지만 청년의 착각을 정정하지는 못했다.

    청년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렸다.

    “호, 혹시 비밀조직에 속한 분들입니까?”

    “어엉?”

    “그, 그게 소문으로 들어본 적 있습니다. 무림맹엔 알려지지 않은 비밀조직이 잔뜩 있다고요. 그런 곳의 사람들은 정체를 숨기고 다닌다고 하던데....”

    터무니없는 오해에 후개가 입을 쩍 벌렸다.

    물론 청년의 말마따나 무림맹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조직이 있긴 했지만....

    보다 못한 강엽이 끼어들었다.

    “우리 신분은 알려줄 수 없으니 그만 물어보시오.”

    “아, 알겠습니다. 소생이 결례했습니다.”

    강엽의 말로 인해 청년의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일신에 묵직한 격조를 두른 강엽이나 어둠 속에서도 범상치 않은 용모를 뽐내는 백서희, 고개를 삐딱하게 앉은 채 그들을 흘겨보는 상관추영 등등.

    상관추영은 바깥 마을 사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젠 그도 비밀조직의 대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청년은 움츠러들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초면에 염치없지만 근처에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저희 일행 중 크게 내상을 입어서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어차피 그들은 곧 떠날 예정인 만큼 여기에 누가 자리를 잡든 알 바 아니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청년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자기 무리에게 돌아갔다.

    피곤에 찌든 그들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건량과 육포를 깨작깨작 씹을 때였다.

    돌연 한 명이 선지피를 울컥 토했다.

    “하 소저! 괜찮으시오?”

    “이, 이런! 역시 내상이 심한 것 아니오!?”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구르던 그들이 이쪽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결국 후개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자 백서희가 물었다.

    “가려고?”

    “내가 간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뒷머리를 긁적인 후개가 멋쩍게 웃었다.

    그때 백서희가 무언가를 던졌다.

    “이건?”

    “요상약. 내상 입었다며.”

    “오오! 백 소저,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고우시구려! 다시 봤소!”

    “...다시 봐? 쓸데없는 사족을 붙인다?”

    “아차차, 입이 방정이지! 내 얼른 갔다 오겠소!”

    백서희가 가자미눈을 뜨자 앗 뜨거라 하면서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는 후개였다.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지 코가 석 자면서 남을 돕네.”

    “그러는 너도 약을 줬잖나?”

    “여유분이 있어서 준 거야.”

    코웃음을 친 백서희가 강엽을 향해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우리도 슬슬 가봐야지 않겠어?”

    “그래야지.”

    비록 휴식이 필요했다고는 하나 몇 시진이나 지체한 만큼 갈 길이 급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려던 때였다.

    “자, 잠깐! 강 형,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음?”

    떠났던 후개가 다시 달려왔다.

    강엽이 물었다.

    “우릴 따라오려고?”

    따라오려면 이유를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나.

    강엽이 잠자코 기다리는데 후개가 청년의 무리를 잠시 돌아보면서 입을 뗐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움직일까 하오.”

    “생각이 바뀌었군.”

    “강 형이나 백 소저보다는 저들에게 내가 더 필요할 것 같소.”

    만약 저들이 황충팔객 같은 고수를 한 명이라도 만났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후개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상을 입은 몸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그 말에 강엽은 초음으로 후개의 몸을 살펴봤다.

    무림맹과 합류한 뒤에 치료를 받은 건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완전하진 못했다.

    혈도 군데군데가 갉아먹힌 것처럼 다친 데다 여기저기 잔부상을 입는 바람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으니까.

    “못 따라가는 게 아쉽긴 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소.”

    청년의 무리처럼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이 기관진식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을 것이오.”

    “쉽진 않을 텐데.”

    이 순간에도 바깥의 기관진식은 복잡하게 변하고 있으니 사람들을 모으기는커녕 다시 흩어질 수도 있었다.

    후개가 코밑 슥 훔치며 웃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옳은 말이다.”

    신분이 불확실한 강엽 일행은 무림인들을 규합할 수 없다. 그건 후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팽 단주나 야차마곤을 만나면 한결 쉬워질 거라 생각하오. 운이 좋으면 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테고....”

    “그 사람?”

    “야차마곤의 사제라는 거한인데 개세적인 초고수였소. 단혼마백이 쩔쩔매던데. 아, 단혼마백은 혈교의 교성이라는 작자인데 수십 년 전에 악명을 떨친 노고수요.”

    “단혼마백이 누군지는 알아. 전강은 괜찮나?”

    “어라? 아는 사이요?”

    “지인이야.”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군. 그 전강이란 거한은 기관진식이 발동하기 전까진 단혼마백과 대등하게 싸웠소.”

    기관진식이 발동해서 흩어진 이후로는 누가 이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승부를 못 냈을 수도 있고.

    저간의 사정을 들은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운을 빌지.”

    “강 형도 힘내시오. 백 소저랑 상 소협도 조심하시고.”

    그렇게 일행은 귀주 무림 방파의 제자들과 함께하기로 한 후개와 헤어져서 갈 길을 갔다.

    * * *

    “괴물 같은 놈.”

    단혼마백은 진저리를 쳤다.

    “설마 그놈들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

    과거 혈교도를 비롯한 사마외도의 무리들을 쥐 잡듯 때려잡은 소림의 그림자들.

    소림의 무공을 익혔되 소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외소림으로 불렸던 음지의 아라한들.

    탕마멸사의 기치를 내걸고 천하를 떠돌았던 아라한들은 한때 사마외도의 천적이었다.

    “내분이 나서 사라졌다고 들었건만....”

    그토록 강대했던 외소림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에 의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

    당시 아라한들이 두 쪽으로 나뉘어서 싸우는 것을 목격했던 자들이 소문을 퍼뜨렸기에 단혼마백 역시 그들이 사라졌다고 여겼다.

    해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다시 나타날 줄이야....

    “커억!”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단혼마백이 선지피를 울컥 토했다.

    불문의 내가중수법에 내장이 진탕되어 삼도천이 아른거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세월과 함께 깊어진 공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기관진식에 몸을 싣어 도망치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스윽!

    “...누구냐?”

    어둠 속에 무언가 있다.

    단혼마백은 안력을 돋워 칠흑처럼 깊은 어둠 속을 꿰뚫어봤다.

    그러자 통로 양옆으로 푸른 불길이 너울지더니 흐릿한 인영이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금룡이 새겨진 화려한 흑색 용포를 입은 사내.

    “그 모습은 설마? 아니, 하지만 어찌 이런 일이...!”

    수십 년 전에 죽은 자가 귀신이 되어 돌아오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괴이란 말인가.

    흑룡교주는 지극히 무감정한 눈으로 단혼마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다리를 놀리지도 않고 멀어지는 모습이 흡사 귀신을 연상시켰다.

    ‘귀신이 아니면 말이 안 된다.’

    혈교에서 수많은 괴력난신을 접한 단혼마백에게도 죽은 자가 돌아오는 괴이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망령이나 혼백을 부리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였기에 더욱.

    물론 실제로 흑룡교주를 본 일은 없지만, 젊은 시절 풍문으로 들었던 모습과 일치했던 것이다.

    여기가 흑룡교와 연관이 있는 장소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냐.”

    멀어졌던 흑룡교주가 멈춰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시커먼 무저갱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오싹함이 치밀었다.

    “...따라오라는 것이오?”

    흑룡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몸을 돌리며 멀어질 뿐.

    ‘저자가 흑룡교주의 귀신이라고 해도 결국 이교의 죄인이다. 저자의 농간에 놀아나선 안 되거늘.’

    하지만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단혼마백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흑룡교주를 쫓아 괴물의 아가리 같은 어둠 속에 들어갔다.

    * * *

    -종복이여.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

    상관추영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오.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급하게 얼버무리며 청력을 집중했다.

    -흑룡의 신실한 교도여.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확실했다.

    ‘교주님!’

    -너는 잘해주고 있다.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라.

    딱히 스스로를 책망한 적은 없었지만, 상관추영은 잠자코 경청했다.

    흑룡교주는 그를 칭찬하면서 이대로만 하면 된다고, 옥좌로 데려오라고 했다.

    ‘역시 교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강엽이나 혈교의 교성 같은 괴물들조차 흑룡교주의 손바닥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흑룡교주의 안배대로 이루어지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