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8)
“조금 얕았나?”
흑접주가 낮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삼 장쯤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나타난 강엽이 앞섬을 길게 찢긴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원래는 바로 재생이 되었어야 하나, 검격의 공력이 암경처럼 침투해서 재생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씩 재생되었기에 들숨과 날숨을 다섯 번쯤 반복할 때쯤엔 아물었지만, 침투한 공력은 여운처럼 남아 근육과 혈도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눈앞에서 괴이를 본 흑접주가 자색 안광을 번뜩였다.
“재생이라... 흑룡교에도 비슷한 효능을 가진 마공들이 몇 개 있었지.”
마(魔)는 힘을 추종한다. 상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인륜이라는 굴레를 뛰어넘어 맹목적으로.
불사를 추구하여 어떤 상처를 입든 즉각적으로 치유하는 마공 역시 존재한다.
“재밌군. 사마외도가 구파와 협력한다니. 네 동료들은 네놈이 마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자색의 빛줄기와 함께 사라진 흑접주의 신형.
강엽이 급히 암신을 펼쳐 빠져나왔음에도 흑접주가 쥔 자성검은 아귀처럼 따라붙었다.
손바닥을 감싼 용린투가 검격을 막아냈다.
카가가가각!
검붉은 진기에 휩싸인 장갑이 베이지 않고 불똥을 튀기자 흑접주가 비로소 흥미로워했다.
“신병을 가졌군.”
“아무렴 자성검만 할까.”
내력 싸움에 돌입하자 반발력이 팽창하며 서로를 밀어낸다.
강엽은 일곱 걸음을, 흑접주는 다섯 걸음을 물러난 채 서로를 노려보다 다시금 격돌했다.
투아아앙...!
묵직한 굉음을 시작으로 지하 석실을 종횡무진 누비는 두 인영.
몇 자락의 호흡만으로 내력을 짜낸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공기가 겹치듯 연쇄적으로 터져나간다.
‘무공만 보면 나보다 몇 수 위.’
초음으로 살펴보면 흑접주 역시 정기신 합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중단전이 발달하여 정과 기가 소통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축기량 역시 근소하게 윗줄이라서 내공으로 찍어누르기도 여의치 않은 마당.
뭐 하나 앞서나가는 게 없는데도 대등하게 겨루는 것은 전적으로 흡혈귀의 능력 덕분이었다.
초감각과 초음 덕분에 흑접주의 투로를 한발 앞서 예상하고 대응함으로써, 본래라면 몇 합 만에 기울었을 승부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태가 오래가진 않겠지.’
과연 흑접주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움직임을 가져갔다.
눈을 희롱하는 허초나 초식에 변화를 주는 변초 따위가 아니다.
마치 중간 과정을 생략하듯 공간을 격해서 쪼개버리는 검격.
깨달았을 땐 자색 검기가 머리 위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막을 수는 없다. 피하기도 늦었다.’
암신을 펼칠 새도 없다. 뼈를 내주더라도 살을 취하는 것밖엔 다른 방법이 없다.
위기를 직감하자마자 몸을 빠르게 틀며 맞찌르는 식으로 대응한다.
정수리를 비껴난 검격이 어깻죽지를 가르는 것과 발경 권파가 교차한 것은 동시였다.
투아아앙!
“큭...!”
튕겨나간 강엽이 신음을 삼켰다.
다행히 결정적인 순간 어깨를 비튼 덕에 머리가 쪼개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처가 얕은 것은 아니었다.
어깨 근육이 잘려나간 것은 물론, 뼈까지 반쯤 잘려나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으니까.
‘그나마 놈에게 피해를 줘서 다행이지.’
이 공방에서 일방적인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흑접주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크윽!”
그 순간, 강엽은 앓는 신음이 들려온 곳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손톱을 휘둘렀다.
흑접주는 다른 쪽으로 목소리를 들리게끔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검으로 조풍을 쳐낸 흑접주가 아쉬워했다.
“안 낚이는군.”
“그딴 잔재주로 낚으려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거리 아닌가?”
“원래 잔재주가 은근히 잘 먹히지. 그리고 살수가 양심 챙기는 거 봤나?”
하긴 양심이 있었다면 흑룡교를 재건할 생각도, 살인청부로 돈을 벌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때 흑접주가 몇 걸음 물러나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귀영, 넌 뭘 위해 싸우나?”
“싸우다 말고 뭔 개소리냐?”
“난 흑룡교를 재건하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넌 뭘 위해 싸우는지 모르겠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게 협력해라.”
“뭐?”
“놀랄 이유가 무엇인가. 너나 나나 무림에선 배척당하는 몸. 동병상련의 처지끼리 아웅다웅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내게 협력히면 원하는 걸 주마. 금은보화가 됐든 절세미녀가 됐든 얼마든지 말이다.”
“....”
강엽이 입을 다물었다. 흑접주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황당해서였다.
“믿기지 않나 보군. 난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다. 적어도 얘기는 해볼 수 있다고 보는데.”
방금까지 사투를 벌였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엽 역시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기에 기꺼이 대화에 응했다.
“내가 원하는 게 있긴 한데... 그전에 한 가지 묻지. 당신이 쓴 검법, 자성검호의 검법인가?”
자색 신광 자체가 자성검호의 상징과도 같았다. 자성검호라는 별호 역시 자줏빛에서 따온 것이니까.
우연히 같은 무공을 익힌 게 아니라면, 흑접주가 자성검호의 무공을 훔쳤다고 볼 수밖에 없을 터.
‘그럼 몇 달간 폐관 수련을 한 것도 말이 되지.’
비급을 훔친 건지, 아니면 다른 수단이 있어 자성검호의 무공을 훔친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자성검호에 대해 제법 잘 아는군. 그래, 네 말대로 자성검호의 검법이다.”
“비급을 훔쳤나?”
“비슷하지. 질문은 끝인가?”
“아니.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장로라는 노인이 펼친 술법진. 이름이 뭐지?”
“그걸 왜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대답해주마. 흑무미혹진(黑霧迷惑陣)이다.”
혹시나 했는데 흑무암쇄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관은 있겠지. 같은 계통의 술법진일 가능성이 커.’
어쩌면 흑접주나 장로가 흑무암쇄진에 대해 알거나 무언가 단서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엽은 속내를 곧이곧대로 내뱉는 대신 입술을 핥으며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흑룡교의 술법진이 필요하다.”
“어떤 술법진을?”
“구천호법이 썼던 술법진.”
강엽이 개떡같이 말해도 흑접주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렇군. 흑무암쇄진을 원했는가.”
“갖고 있나?”
“그래. 갖고 있다. 그렇다면....”
흑접주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강엽이 냅다 기습을 가하는 게 아닌가?
당황해서 주의가 흐트러질 만도 한데 흑접주는 차분히 대응했다. 강엽이 앞에 나타나는 찰나에 맞춰 검기를 흩뿌린 것이다.
강엽이 피하거나 막을 경우도 염두에 두고 다음 수를 준비했다.
하지만 강엽의 행동은 예상을 벗어났다. 앞으로 뛰어든 순간 태극반을 운용, 검격의 타점이 흔들린 틈을 타서 손톱을 휘둘러 팔뚝의 살점을 한 움큼 뜯어버렸다.
눈매를 구긴 흑접주를 보며 강엽이 작게 웃었다.
“둘이서 손을 잡자고? 내가 왜?”
어차피 현 시점에서 흑접이 흑무암쇄진을 정말 갖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암경으로 침투한 흑접주의 진기를 몰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했기에 어울려줬을 뿐.
“정말 흑무암쇄진이 있다면 널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지. 구파 둘에 낭인전까지 적으로 돌릴 선택을 내가 왜 하나?”
만약 흑접주와 손을 잡고 아군을 배신한다면, 이는 낭인전의 의뢰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낭왕삼칙에 의해 척살령이 떨어질 터.
그런 바보짓을 하느니, 흑접주를 쓰러트리고 가져가는 게 백번 낫지 않나.
“그리고 너도 시간만 끌 속셈이었을 텐데?”
흑접주가 되도 않는 제안을 한 이유.
초음으로 쭉 흑접주의 체내를 관찰했기에, 바닥의 술법진을 통해 받아들인 기운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술법진의 기운이 바닥을 보호하는 바람에 부수지는 못했지만, 흑접주의 속내는 진작 눈치챘다.
설령 협상이 결렬되어도 손해볼 것은 없다고 판단했을 터.
“정말로 원하는 건 그 검은 기운을 안정시킬 시간일 뿐, 나를 회유하는 게 아니지 않나.”
“...!”
흑접주의 만면이 미미하게 경직됐다.
강엽의 말마따나 그는 체내에서 마구 날뛰는 기운을 다스리느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쯧, 첫 수로 죽였다면 말을 섞을 필요도 없었을 것을.’
속전속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시간을 끌어 기운을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알고 있었다니 놀랍군.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둔 건 더 놀랍고.”
빠르게 신색을 되찾은 흑접주가 싸늘한 안광을 토해내며 짓씹듯 일갈했다.
“이젠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쿠구구구구궁......!
그리고 석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흑접주의 전신에서 칠흑처럼 시커먼 마기가 피어올랐다.
‘원래 이렇게 쓸 힘이 아니건만.’
흑접주는 아쉬움을 느꼈다.
원래 이 석실은 그가 자성검호의 무공을 빼앗아 폐관 수련을 들기도 전에 만들어진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흑접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살행이 이 석실을 위한 것이었다.
‘암룡승천술(暗龍昇天術).’
흑룡교주의 피를 물려받은 혈손들은 특별한 대법을 받는다.
특정한 술법에 닿은 이들이 죽으면 그들의 혼백을 흡수하여 중단전을 개척하고, 나아가 상단전까지 여는 방문좌도의 사술.
본래는 어렸을 적부터 행하여야 하지만, 흑룡교가 멸문하는 바람에 흑접주는 수혜를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흑접을 장악하고 나서야 늦은 나이에 암룡승천술을 써서 혼백을 모아 중단전을 열었다.
비록 사술을 썼을지언정 정과 기를 합일시켰으니, 한 발만 내딛으면 정기신을 합일하여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적으로 인해 삼화취정에 오를 날을 먼 훗날로 미루어야만 했다.
“이렇게 쓰고 싶진 않았다.”
암룡승천술엔 한 가지 쓰임새가 더 존재한다.
아니,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편법이라고 해야 하리라.
대법의 기운을 폭주시켜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마기를 일시적으로 얻는 것.
당초 목적대로 자성검법(紫晟劍法)으로 쓰러트렸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예상을 웃돈 강엽의 힘이 선을 넘도록 떠밀었다.
‘안정시킨 기운을 남발하고 있다.’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본래 중단전으로 갈무리했어야 할 기운이 흑접주의 경맥을 거칠게 휘돌고 있었다.
주화입마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천만한 짓거리다.
실제로 흑접주는 동자료혈 주변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에 흰자위만 남아 있었다.
지난날 잠력을 격발시켰던 삼호와 비슷한 몰골.
차이가 있다면 밤하늘을 잘라다 붙여둔 것처럼 시커먼 마기를 내뿜으면서 석실 전체를 자신의 존재감으로 꽉 채웠다는 것이리라.
‘날 죽이고 지상에 올라 죄다 쓸어버릴 셈이겠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아군이 장로나 총관을 물리치고 도우러 올 때까지 버티는 게 가장 좋겠지만....
‘반드시 여기서 끝장낸다.’
아무런 대책 없이 싸움에 임한 것은 아니다.
자성검이나 대법은 예상하지 못했어도 흑접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무공과 흡혈귀의 능력만으로 쓰러트릴 수 없다면, 아껴뒀던 세 번째 방법을 쓸 수밖에.
손톱으로 손바닥을 긋자 피가 살갗을 따라 점점이 흘러내려 바닥에 고인다.
혈종술, 망혼소에 이어 모산파의 비급을 고찰하여 터득한 세 번째 술법.
“.......”
수인을 맺고 진언을 중얼거리자 바닥에 고인 핏물이 소용돌이친다.
혈종술이 그렇듯 이 술법 역시 대상의 피가 필요했으나, 흑접주의 피를 가져왔기에 쓰는 데는 지장 없었다.
“뭘 한 거지?”
흑접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엽이 술법을 쓸 때만 해도 경계했건만, 막상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 의아할 수밖에.
“겪어보면 알 거다.”
“음?”
의구심은 금세 풀렸다.
앞서 강엽이 무리하게 공격하면서 헤집었던 팔뚝이 검게 물드는 게 아닌가?
비단 피부색만 변하는 게 아니라 상처가 났던 상완 전체가 돌이 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술법독(術法毒)이라니...!”
팔뚝을 넘어 어깨까지 올라오려는 조짐을 보이자 흑접주는 지체없이 혈도를 짚었다.
덕분에 독기가 침투하는 것은 막았지만, 망가진 오른팔은 움직일 수 없었다. 우수검을 쓰는 검수에겐 어지간한 부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오는 손실이었다.
‘설마?’
앞서 제안에 귀 기울이는 척 기만술을 쓴 것도, 굳이 오른팔의 살점을 헤집은 것도 사실은 이 술법을 쓰기 위한 포석이었단 말인가.
심장이나 머리처럼 목숨과 직결된 급소를 공격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쪽은 단단히 방비했기에 아쉬운 대로 오른팔을 노린 것.
그제서야 자신이 여태껏 강엽의 손아귀에서 춤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흑접주의 낯짝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