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7)
흑접의 총단 곳곳에서 경파가 터지고 굉음이 일었다.
구파의 고수와 마교의 후예가 충돌하고, 돈을 쫓는 낭인과 살수가 충돌한다.
일호와 싸우던 청수는 상위 서열에 대한 정보를 미리 들어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내가 죽었겠지!’
상위 서열의 최강자인 일호는 살검의 고수였다.
단순히 살기가 짙은 검법을 구사해서 살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검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살검.
무심하게 급소를 쑤시고 갑자기 사라져서 기습을 가하기에 평범한 살검보다 무섭다.
그럼에도 청수는 의외로 할 만하다고 느꼈다.
‘강 도우만은 못해.’
일호의 살검이 무서워도 강엽의 암신을 넘진 못했으니까.
강엽의 암신은 상대의 감각을 비틀고 움직임을 유도하여 허점을 찌른다. 자신의 감각마저 의심해야 하기에 알면서도 당한다.
그에 비하면 일호의 살검은 두세 수는 아래였다.
‘물론 상대하기는 어렵지만!’
촤악!
사각의 검세가 허리를 치기 직전, 청수는 몸을 회전시켰다.
벼락같이 쇄도한 검이 목을 노렸지만, 그조차 검신을 비스듬히 뉘여 흘려내는 데 성공했다.
“...잘 막는군.”
일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들이 보면 간발의 차로 막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검을 찌른 당사자는 그게 아님을 알아보았다.
정말로 간발의 차로 막았다면 불똥이 튀겼을 텐데, 청수는 그런 과정 없이 흘려냈다.
유능제강으로 천하를 논하는 도가 무공의 정수.
촤악!
동시에 일호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 겨드랑이 아래부터 타고 올라온 청수의 검이 어깻죽지를 단숨에 갈라버린 것.
날랜 보법과 호신기 덕에 생채기로 그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부지불식간에 허를 찔렸음에도 일호는 멈추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고, 청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도 때도 없이 위치를 바꾸며 공방을 교환한다.
쿠우우우웅!
한쪽에선 사호와 육호가 낭인전의 은천패 고수들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호와 육호는 근접전을 선호하는데, 창비도 이후명과 소살관철 진린은 반대로 원거리전을 선호했다.
“푸하하, 느리군! 잘 좀 따라와보게!”
이후명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자 뒤를 따라오는 사호와 육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개자식들, 잡으면 곱게 죽이진 않겠다.”
“살가죽을 벗기고 골수까지 갈아마셔주마.”
바로 그때 두 사람을 겨냥한 작은 철전(鐵箭)이 날아왔다. 소살관철 진린의 솜씨였다.
어렵잖게 피했지만 잠시 멈칫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후명이 그 틈을 노려 비도를 날렸다.
비도에 실을 매단 것도 아닌데 살아있는 것처럼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린다. 어떤 것은 직선으로, 어떤 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다.
심지어 앞서가는 비도의 뒤에 숨어 인식의 허점을 노린 시간차 공격까지 섞여 있었다.
엎드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즉시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이후명이 놓치지 않고 하늘 위로 비도를 날렸지만....
카앙-!
“제법이군. 하지만 멀었어.”
사호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비도술은 흑접의 살수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무공이다. 이후명이 어떻게 나올 건지 예상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사호에게도 있었다.
“컥!”
“어엇?”
사호가 깜짝 놀랐다.
그와 함께 하늘로 피신한 육호의 복부에 이후명의 비도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늘로 피할 줄 알고 있었네.”
땅에 납작 엎드리면 운신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두 살수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 행동해주었다.
쐐애애액!
그리고 진린이 쏜 화살이 두 사람을 노렸다.
사호는 급한 대로 허공에 체류한 상태에서 육호를 걷어차고, 본인은 몸을 틀며 화살을 튕겨냈다.
“크윽!”
화살에 실린 경력 때문에 균형을 잃은 사호가 아슬아슬하게 지붕에 내려서며 신음했다.
“설마 비도끼리 튕긴 건가?”
대답은 없었지만 사호는 이후명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이후명은 탄자결의 공력을 담아서, 비도끼리 부딪쳤을 때 어디로 튕길지 계산하고 던진 것이다!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 공력을 세심하게 조절하며, 두 비도의 속도를 달리해서 던져야 한다.
그것은 사호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기예였다.
“난 자네들처럼 다양한 병장기를 다루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한 우물만 죽어라 팠다네.”
“육호, 일어설 수....”
잠시 육호를 돌아본 사호가 석상처럼 딱딱해졌다.
떨어진 충격으로 복면이 흘러내린 육호의 낯짝이 퍼렇게 질려 있었기 때문.
‘독!’
흑접의 살수들은 독에 얼마간 내성이 있다. 이호처럼 악랄한 극독을 쓰지 않는 한 오래 버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중독됐다는 것은 이후명의 비도에 묻은 독이 예삿독이 아니라는 뜻.
“독이 꼭 살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지. 낭인들도 경우에 따라선 독을 쓴다네.”
“....”
좌우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이후명과 진린의 모습. 사호는 손바닥이 진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 * *
총관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장 호위, 내 아들을 부탁한다.’
흑룡교의 총단이 화마에 휩싸인 날, 주군은 기절한 소년을 맡기며 유언을 남겼다.
그가 모신 주군은 흑룡교주의 핏줄이었다.
첩실의 소생이라 후계자의 자리에선 멀었으나, 존귀한 신인(神人)의 피를 물려받은 몸이었다.
주군의 아들 또한 흑룡교주의 자손이니 목숨 바쳐 지켜야 할 터.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흑룡교를 재건할 날만을 꿈꾸며 쓸개를 핥는 심정으로 흑접주를 모셨건만, 하늘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본교를 불태운 구파의 악적이여....”
오십 년의 세월 끝에 원수를 다시 만났다.
흑룡교가 멸문한 시대에 혜정 사태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구파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총관이 그녀를 증오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물며 흑접을 짓밟기까지 했으니 징치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원통하구나! 쿨럭!”
선지피를 컥컥 토한 총관이 낯짝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몰골은 만신창이였다.
여기저기 찢기고 베여 흉하게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웅덩이를 이루었다.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온 피엔 내장 조각까지 섞여 있었다.
이미 반은 저승 문턱을 넘은 것과 다름없었다.
“잡초 같은 존재군요, 흑룡교....”
혜정 사태가 시름 섞인 탄식을 토했다.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피를 본 것은 그녀도 매한가지였으나, 총관처럼 상처가 깊진 않았다.
“잔당을 토벌하는데도 자꾸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잊을 만하면 나와서 골치를 썩히는군요.”
“큭큭... 본교의 명맥이, 끊길 것 같으냐?”
죽음의 기운이 짙게 드리웠음에도 불구하고 총관은 피로 물든 누런 이빨을 씩 들어올리며 웃었다.
“쿨럭! 설사 노부가 죽어도, 본교의 명맥은... 끊이지 않을 것이야, 큭큭큭....”
툭툭 끊기듯이 유언을 읊조린 총관이 고개를 푹 꺾고 나서야 혜정 사태는 길게 한숨을 삼켰다.
총관의 마공은 삼화취정의 경지를 엿보는 그녀도 섬뜩함을 느낄 만큼 고절했다. 정과 기의 합일을 이뤄 진전을 이루지 않았다면 승패는 바뀌었으리라.
총관의 시신을 일별한 혜정 사태는 문득 그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건....”
검은 연기가 향한 곳은 교룡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총관뿐만 아니라 아군에게 죽은 살수들의 시체에서 크고 작은 연기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교룡전으로 향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계인을 찍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가 교룡전을 감싼 순간부터 불안했는데, 또다시 영문 모를 괴사가 벌어지니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부디 무탈하기를....’
그녀는 눈을 감으며 염불을 외웠다.
* * *
강엽은 한 사람과 대치했다.
“어서 오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흑접주.
사위가 어두컴컴한 암흑 천지였지만, 강엽과 흑접주 모두 상대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문득 중년인이 툭 내뱉듯 물었다.
“이름이 뭐냐?”
“강엽.”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모로 기울이던 흑접주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 해어화를 암살하는 일에 훼방을 놨던 놈의 이름이었지. 네가 귀영이었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무슨 말이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흑접주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널 죽일 작정이었다. 한데 다 쓸모없게 되었어.”
흑접주는 명민한 사람이었다.
강엽의 이름을 듣자마자 여기까지 쳐들어온 과정, 그리고 살수들의 금제를 발동시켰음을 떠올렸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라도,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그게 곧 정답이었다.
“설마... 금제를 풀었단 말인가?”
실제로 강엽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은 내부자의 협력 없이는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흑접이 검각에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아냈을 것이며, 알아냈다 한들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나.
금제술을 건 장로는 한번 금제를 걸면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한다고 단언했지만, 이 세상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영세토록 존재할 것만 같았던 흑룡교도 끝내 잿더미가 되어버렸는데, 금제가 풀리는 건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엽은 침묵했지만 흑접주는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무겁게 침음했다.
“어떻게 금제를 푼 거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 흑룡교주의 후예.”
의표를 찔린 흑접주가 움찔했다.
그가 흑룡교주의 혈손이라는 사실은 장로와 총관을 빼면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비밀을 떠벌릴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강엽이 실소했다.
“교룡전이라는 이름. 당신이 지었다면서? 자기 거처에 그런 이름을 붙였으면 뻔하지.”
교룡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이니, 흑접주가 스스로를 어찌 여기는지 알 만했다.
언젠가 진정한 용이 되어서 흑룡교를 재건하겠다는 포부였겠지.
“흑룡교주의 제자나 핏줄이 아니면 누가 그런 이름을 쓸까. 쓸데없이 자의식이 과한 이름이야.”
“.......”
흑접주이 말없이 불쾌감을 표출했다.
강엽의 말마따나 언젠가 흑룡교를 재건하여 진정한 용이 되겠다는 의미로 저런 이름을 지은 건데 모욕당하니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그걸 알아낸 건 칭찬해주마. 본접을 짓밟고 내 앞에 온 것도 인정해주지.”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네놈은 실수했다.”
차라리 밖에서 싸웠다면 일말이나마 승산이 있었으리라. 하나 이곳은 그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장이었다.
쿠구구구구궁......!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일대 공간이 요동친다.
장내의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 강엽은 기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워 현상의 이면을 파악했다.
‘평범한 석실이 아니군.’
벽면에 벌집만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 꺼림칙한 검은 연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내 검은 연기는 바닥에 난 무늬를 통해 중앙에 선 흑접주에게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흑접주의 입꼬리가 말아올려졌다.
“이 석실 자체가 거대한 기관진식이지. 이 안에서 나는 무한히 강해진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자줏빛 기파가 피어오른 것과 동시에 한 자루 검이 뽑혀져나왔다.
검신 전체에 자줏빛 신광이 흘러내리는 신검.
“자성검(紫晟劍)이라고 한다.”
사천 무림을 대표하는 초절정의 검객인 자성검호가 목숨처럼 여겼던 애병.
그 검이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것과 동시에 강엽의 상반신이 갈라지며 선혈이 뿜어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