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84화 (83/450)
  • 13화. 흑접 (9)

    칠호는 강엽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한 귀로 흘려버리며 코웃음을 쳤다.

    ‘완전 웃겨. 내가 미쳤냐? 네가 시킨다고 다 하게?’

    이제 와서 흑접을 돕는다거나 강엽의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다.

    다만 강엽이 죽는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흑접이 그녀의 생존 여부를 알든 말든, 아예 먼 곳으로 가버리면 만날 일도 없지 않겠는가?

    ‘흐음, 이 기회에 항주나 소주에 가서 신분 세탁하고 강호인 행세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지금이야 내상으로 골골대지만, 무공만 회복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을 것이다.

    강엽처럼 낭인전에 들어가서 대형 의뢰 몇 번 완수하면 금세 알부자가 되리라.

    ‘후후, 내 실력이면 은패는 따놓은 당상이지!’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그녀는 행복한 꿈에 젖어 키득거렸다.

    물론 반대로 강엽이 살고 옛 동료들이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청송객잔에 가면 될 일.

    칠호는 행여나 강엽에게 들키는 불상사가 없도록 일 각이 지난 뒤에야 출발했다.

    그리고 적당히 높으면서도 몸을 숨기기 좋은 아름드리나무를 골라 꼭대기에 올랐다.

    대충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강엽의 집을 조망하기엔 좋은 그런 위치였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부처님, 옥황상제님! 태상노군님! 제발 소녀를 가련히 여겨 저 나쁜 새끼들이 다 같이 뒈지게 해주세요!’

    간절히 염원하면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들이 도와주신다고 하던데.

    과연 하늘이 무심한지는 않은지 육중한 폭음이 일어났다.

    “어?”

    칠호가 눈을 동그라게 떴다.

    달이 휘영청 뜬 밤하늘 아래서 세 명의 인영이 거듭 충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저건 뚱땡이 오호랑 칼귀신 삼호?”

    한 자릿수의 살수들은 각자 살수 비기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개성을 갖고 있었다.

    시충술을 주력으로 삼은 팔호가 그러했고, 은혼사를 주력으로 삼은 칠호 자신이 그러했듯 다른 한 자릿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쾅! 콰앙!

    살수답지 않게 육중한 오호는 가시 없는 철퇴인 산두골타(蒜頭骨朶)를 애병으로 썼다.

    은신술이나 역용술을 쓸 줄 모르는데도 삼호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큼 강하기 때문.

    얼핏 둔한 것처럼 보이는 뚱뚱한 몸은 막상 전투에 임하자 비호처럼 날랜 보법을 구사했다.

    쿠우웅...!

    막강한 내공 경파를 동반한 둥근 철퇴가 월동문(月洞門)을 가차없이 부숴뜨렸다.

    강엽이 공격 범위에서 훌쩍 벗어났지만....

    ‘삼호!’

    한달음에 코앞까지 치달은 삼호가 번갯불처럼 빠른 발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촤아악!

    칼날이 허공을 긋고 지나간다.

    ‘아, 허상이구나.’

    워낙 진짜 같아서 감쪽같이 속았다.

    그때 오호가 무어라 소릴 질렀고, 삼호는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돌연 옆으로 칼날을 내쳤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강엽이 전신을 부딪쳐서 삼호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오호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려는 찰나, 강엽이 휘파람을 불었다.

    칠호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비틀거리는 오호의 몸짓으로 강엽이 뭔 짓을 했는지 알았다.

    ‘저 술법도 사기라니까.’

    만약 오호 혼자 왔다면 전세가 기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호가 오호를 도왔다.

    ‘아니, 둘이 싸우는데 저놈을 못 이기네? 니들이 그러고도 흑접의 한 자릿수냐?’

    그만큼 강엽이 강한 것이다.

    칠호에게 상위 서열들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부터 어찌 싸울지 수도 없이 구상한 덕분.

    흑접을 치기로 했을 때부터 강엽은 상위 서열들에게 합공당하는 경우를 대비했던 것이다.

    ‘근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칠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강엽이 그녀와 싸울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 * *

    ‘점점 익숙해지는군.’

    초음과 암신, 두 능력의 조화는 절정고수 두 명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게 해주었다.

    하나씩 따로 써도 강하지만, 같이 쓰면 말도 안 되는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초음으로 적들의 체내를 감시, 진기 경로를 관찰하여 놈들의 움직임을 예측한다.

    암신으로 적들의 감각을 현혹시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동선을 유도한다.

    여기에 또 하나.

    -휘리릭!

    망혼소.

    “흐읍!”

    “건방진 놈이...!”

    오호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흑접의 한 자릿수인 그들이 고작 한 놈을 상대로 고전한다는 게 악몽처럼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엽은 반쯤 무너진 본채의 모습에 가슴 아픈 한숨을 내쉬었다.

    “음, 반년도 안 살았는데....”

    곧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집의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마.”

    “....”

    삼호와 오호가 눈빛을 교환했다.

    이심전심, 굳이 전음을 쓰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헤아린 그들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그렇게 집을 아낀다면 완전히 아작내주마!”

    좌우에서 들이친 경파가 발판을 산산조각 박살내고, 강엽을 쫓아 허공을 훑었다.

    어기충소로 뛰어오른 강엽이 코웃음을 쳤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마당에 내려선 그를 향해 삼호와 오호가 득달같이 쫓아와서 각자의 애병을 휘둘렀다.

    강엽의 신형이 좌우로 흩어진 것처럼 사라지자 두 사람이 동시에 등을 돌렸다.

    이젠 그들도 강엽의 방식을 슬슬 간파한 것이다.

    투학!

    칼날과 주먹이 부딪친다. 경파로 서로를 밀어냈기 때문에 삼호는 바로 쫓을 수 없었다.

    “오호!”

    “흐아아압!”

    대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오호가 철퇴를 내리쳤다.

    천근추의 무리까지 담은 필살의 일격이 강엽의 머리를 비스듬히 강타했다.

    쿠아아아아앙!

    지면은 물론 전각까지 흔들리는 충격.

    마당에 깐 판석(板石)이 깨지고 뒤집어지면서 자욱한 흙먼지가 눈앞을 가린다.

    강렬한 손맛을 느낀 오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야말로 강엽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필시 호신기를 둘렀을 테니 죽이진 못했겠지만, 이만하면 충격이 호신기를 관통하여 뼛속까지 울렸을 테니 몸이 마비된 충격으로 꿈쩍도 하지 못할 터.

    하지만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풍경은 오호의 기대를 배신했다. 필살의 일격은 바닥은 깨부쉈을지언정 강엽을 어쩌지는 못한 것이다.

    “너, 너...!”

    “대충 알았다, 너희들의 수준.”

    산두골타의 철공을 한 손으로 잡은 강엽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삼호와 오호를 번갈아봤다.

    “시시하다. 차라리 칠호가 더 까다로웠어. 살수라는 놈이 힘 말고 쓸 줄 아는 게 없나?”

    “닥쳐라-!”

    근육을 불끈거린 오호가 강엽의 손을 쳐내고 다시 한번 산두골타를 휘둘렀다.

    하지만 강엽은 철공과 연결된 손잡이를 간단하게 낚아채서 오호를 지그시 응시했다.

    오호가 얼굴이 시뻘게질 만큼 강한 공력을 일으켰지만 강엽은 밀리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선불 맞은 멧돼지가....”

    흡혈귀의 괴력은 맨손으로 강철을 구길 만큼 강하다.

    여기에 백년의 공력까지 더해지면 오호가 전력을 다해도 힘으로는 이길 도리가 없다.

    하지만 오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쐐애액!

    퍼뜩 정신을 차린 삼호가 기습을 걸어오자 강엽도 산두골타를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호는 계속 강엽을 따라와서 면면부절 이어지는 도격을 퍼부었다.

    초감각을 썼는데도 빈틈을 찾지 못할 만큼 고절한 도법.

    그러나 삼호 역시 압도적인 반사신경과 속도를 지닌 강엽을 잡지 못하고 중도에 멈추었다.

    다행히 오호가 태세를 갖추고 합류했다.

    “괜찮은가?”

    “젠장, 이런 굴욕이....”

    “괘념치 말게. 평범한 적수가 아니야. 나도 저자를 잡지 못하지 않았나?”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건지.”

    “자성검호 수준이라고 생각하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죽네.”

    “....”

    석년의 자성검호는 각종 극독에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흑접의 전력 절반을 갈아버렸다.

    삼호는 강엽을 그만큼 위험한 적수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폭혈(爆血)을 쓰겠네.]

    “...!”

    귓가에 들리는 전음에 오호의 안면이 굳어졌다.

    삼호의 무공을 전부 꿰뚫진 못하나, 그가 익힌 무공 중에 그러한 수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잠력을 격발시키는 동귀어진의 마공.

    [그걸 쓰면 무사치 못할 텐데?]

    [다른 방법이 없어.]

    둘이 덤비는데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강엽이 그들을 근소하게나마 앞서고 있었다.

    결심을 한 삼호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리는 순간, 그의 머리가 하늘을 향해 쭈뼛 곤두섰다.

    강엽은 두 사람의 전음을 듣지 못했지만, 삼호의 체내에서 진기가 폭주하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크아아아아!”

    삼호의 눈에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대신 눈 옆의 동자료혈을 타고 핏줄이 삐죽 돋았다.

    “크으으...!”

    검붉은 기운에 휩싸인 삼호는 용솟음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쾌감과 고통이 번갈아 혈도를 괴롭히는 가운데, 한 줄기 전율이 척추를 타고 사지로 뻗어나갔다.

    “흐아아압!”

    삼호가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폭발적인 속도로 쏘아졌다.

    한 박자 빨리 암신을 펼쳤음에도 강엽은 어깨 근육이 베이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초감각으로도 잡지 못했어.’

    암신에 속임수를 써서 삼호의 감각을 희롱해봤지만 삼호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 그딴 잡술은 안 통한다!”

    강대한 경력을 머금은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살갗이 베이고 상처가 벌어진다.

    여기에 오호까지 가세해서 난장을 피웠다.

    “죽어라, 괴물 같은 놈!”

    삼호처럼 잠력을 격발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힘을 아끼지 않고 모조리 쏟아부었다.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강엽도 삼호와 손속을 겨루는 상황에서 오호가 끼어들면 부담스러웠다.

    기어이 오호의 산두골타가 강엽의 등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흡사 화탄이 터진 것마냥 장대한 폭음과 함께 강엽의 신형이 담장을 부수고 그 너머까지 튕겨나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었을 위력이다. 하지만 호신기를 두른 절정 고수를 죽이기엔 모자랐다.

    두 사람이 담장을 박차고 나왔을 때 강엽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평정산의 숲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다리로 어딜 도망가!?”

    “놓치지 않는다!”

    삼호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계를 맞기 전에 폭혈을 풀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으리라.

    두 사람 모두 그걸 알기에 머릿속에 강엽을 쫓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박쥐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녔다.

    * * *

    강엽은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괜히 불리한 곳에서 싸워줄 필요가 없거든.’

    일단 두 놈을 떼어놓는 게 먼저였다.

    삼호와 오호가 죽일 듯이 쫓아왔지만, 강엽은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적당한 장소를 찾았을 때쯤, 마침내 숨겨둔 한 수를 꺼내들었다.

    여태껏 그를 따라온 아군이 부름에 응했다.

    “응?”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삼호와 오호가 눈을 부릅떴다.

    “시충술?”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놈이...!?”

    한데 뭉쳐 몰려오는 수천 마리의 나방들.

    흑접의 술법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가장 먼저 시충술을 떠올렸지만, 금세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뒤를 이어 나타난 박쥐 무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버린 것이다!

    “이, 이런!”

    “으윽!”

    마치 바다에 표류한 것처럼 두 사람은 압도적인 물량의 파도에 떠밀렸다.

    열심히 죽이고 으깨도 그보다 많은 수가 몰려오니 답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합격술이 깨진 두 사람은 밀리고 밀려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

    오호가 마구잡이로 산두골타를 휘둘렀다.

    나방들이 들러붙고 박쥐들이 눈알을 파내려고 하니 본능적으로 악다구니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검은 파도의 안에서.

    “일단은 너부터다.”

    “네놈...!”

    흡혈귀는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향해 붉은 안광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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