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흑접 (8)
강엽이 침묵하는 동안 칠호는 시체를 눕혀놓고 좀 더 상세히 살펴봤다.
“늑골을 피해 심장을 한 방에 찔렀어. 깊이나 넓이로 봤을 때 아마 단검 종류겠지. 죽은 지는 한 식경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장검으로 적당히 찔렀을 가능성은?
“그럼 등까지 관통했을걸. 이 시체가 누워있던 벽에도 관통한 흔적이 남았을 테고.”
칠호가 엄지로 벽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벽은 깨끗한 편이었다. 바닥에만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웅덩이가 져있었다.
“좀 이상한데.”
“뭐가?”
“길거리에서 고문했잖아. 편하게 고문하려면 납치하면 될 텐데. 그렇다고 성심껏 고문한 것 같지도 않고... 어디 보자. 음, 손가락은 밟아서 부러뜨렸고, 목숨에 지장을 주지 않는 곳만 쑤셨네. 이 사람은 처음엔 반항했지만, 고통을 못 이겨서 자백한 것 같아. 눈물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선 살려달라고 질질 짰겠지.”
“결론만 간단히.”
“이 사람은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야. 흉수는 이 사람이 아니어도 딱히 상관없었을걸. 낭인전 소속이기만 하면 말이지. 원하는 걸 알아냈는데도 죽인 건... 아마 입막음이었겠지. 살인멸구 말이야.”
그러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칠호였다.
죽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도 잠깐 보고 순식간에 이 많은 것들을 알아낸 게 놀랍기만 했다.
강엽도 시간이 있었다면 거기까지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토록 빨리 알아낼 자신은 없었다.
“이런 걸 알아내는 것도 살수의 소양인가?”
“당연하지. 살수의 덕목은 인내심, 신중함, 관찰력이야. 셋 중 하나도 없으면 일류 살수는 못 돼.”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아, 이 새....”
차마 욕은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작게 구시렁거린 칠호가 흠칫 굳어졌다.
강엽이 죽은 사람의 피를 호리병에 담더니,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와 섞었던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별거 아니다. 이런 짓을 한 놈이 어딨는지 알아보려는 거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엔 참견하지 않는 주의지만,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게 없기도 했고.
“이만큼 피가 흘렀다면 고문한 놈의 옷이나 신발에도 피가 튀었겠지.”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찾을 수 있다.
강엽이 양피지에 섞은 피를 묻히고 진언을 외우자 칠호는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망혼소는 술법 같지 않아서 실감이 안 났는데, 혈종술을 쓰는 것을 보니 강엽이 술법을 익혔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와닿았다.
‘무공도 강하고 죽지도 않는 놈이 술법까지 잘 쓴다고? 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그녀가 흑접에 와서 느낀 것은 무공만 강한 놈들은 뜻밖의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반면 술법에 능한 놈들은 온갖 상황엔 능란하게 대처하지만, 고수를 만나면 죽기 딱 좋았다. 특히 이쪽은 일대일 대결엔 쥐약이었다.
‘이놈은 강하고, 뒈지지도 않고, 온갖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고... 씨발, 약점이 없네?’
틀렸다. 강엽에게는 약점이 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다만 그녀가 모를 뿐이었다.
애당초 강엽이 그녀와 만났을 때는 시간과 장소가 한정되어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연공실에서 만나거나, 밤에 만나거나, 흐린 날에 만나거나....
다만 머리가 영민해도 햇볕이 약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비상식적인 일이었으니까.
“찾았다.”
“벌써?”
“그래. 북쪽에서 멈췄군.”
“쫓으려고?”
“으음.”
양피지를 접은 강엽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굳이 흉수를 족칠 생각은 없었다.
하나 그렇지 않다면 조심해야겠지.
“넌 청송객잔에 돌아가라. 예감이 안 좋아. 일단은 나 혼자 가야겠어.”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
어이없어하던 눈초리를 보낸 칠호가 돌연 무언가를 깨닫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흑접의 짓이라고 생각해?”
“헛다리일지도 모르지만, 흉수가 가는 방향이 집이 있는 쪽이라서.”
하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별일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나, 흑접이 왔다면 칠호와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신뢰한다 쳐도 무공을 회복하지 못해서 도움이 안 된다.
“괜히 다른 데로 도망칠 생각은 말고.”
칠호가 정신을 잃은 동안 그녀의 피는 확보해놨다.
원래는 흡혈욕을 달래기 위해 뽑은 피였지만, 남은 피로도 혈종술을 쓸 수 있었다. 설령 칠호가 중경을 벗어나도 얼마든지 쫓을 수 있으리라.
칠호도 강엽이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그게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싸우게? 상대가 정말 흑접이라면 한 자릿수일 텐데? 몇 명이서 왔는지 알고?”
“많지 오진 않았을 거다.”
이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강엽이 죽은 낭인의 시체를 칠호의 어깨 너머로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흉수가 흑접이라고 가정해보자고. 이놈들은 뭘 알아내려고 낭인을 고문했을까?”
“널 찾기 위해서겠지. 정확히는 네가 있는 곳.”
“그랬다면 내가 청송객잔에 있는 것도 알았을 텐데, 굳이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갔어.”
“청송객잔의 낭인들이 몰려올까 봐 걱정했다고?”
“글쎄, 그보다는 내가 청송객잔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우려한 게 아닐까 싶은데. 어차피 나도 집에 돌아갈 테니까 먼저 도착해서 기다릴 생각이었을 테고. 내 집이야 딱히 비밀거리도 아니니 죽은 녀석이 불었겠지.”
일전에 경호 의뢰를 맡긴 만큼 청송객잔을 드나드는 낭인들은 강엽의 집이 어딨는지 알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청송객잔에 들어간 이후 놈들이 청송객잔 근처에 왔고, 마침 청송객잔을 혼자 나온 낭인을 붙잡아 고문했다고 볼 수 있겠군.”
물론 이 모든 추측은 다 틀렸을 수도 있다.
애당초 터무니없는 가정에서 출발한 만큼 낭인을 죽인 흉수와 흑접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흉수들이 멈춘 곳이 집이 있는 평정산 근처인 만큼 강엽은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리면 무진장 쪽팔리겠지만.’
청수나 하후진에게 도움을 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강엽이 빠진 지금도 그들은 사원루에서 먹고 자며 홍가려를 호위하고 있었다.
* * *
칠호를 청송객잔에 보낸 뒤 강엽은 홀로 평정산에 올라 집에 돌아갔다.
“.......”
삭막한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간다.
얼핏 밖에서 보면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혈종술의 혈점은 이곳에 낭인을 죽인 흉수가 숨어들었노라 주장하고 있었다.
암신을 펼친 채 대문을 넘은 강엽은 양피지를 보며 혀를 찼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더니만.’
죽은 낭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체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저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깨달았으니.
‘하지만 다음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해두어야겠군.’
모산파의 술법엔 허락받지 않는 자를 격퇴하는 술법도 있었다.
지금까진 다른 술법을 우선하느라 이쪽은 상대적으로 소홀했지만, 혼자 살아가는 이상은 좀도둑을 막기 위해서라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잘 숨었군. 여기 있는 걸 아는데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강엽조차 흑접의 살수들이 어디 숨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무기가 있었다.
우우우웅...!
인간의 청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음파.
하지만 흡혈귀의 감각은 물체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초음의 파동으로 일대를 손금처럼 들여다본다.
살수들이 기척을 죽였음에도 강엽은 그들이 숨어있는 위치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그렇게 흡혈귀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별채 위쪽.’
지붕 위에 납작 엎드린 채 은신한 살수의 뒤를 잡고 목을 지그시 눌러버렸다.
강엽 역시 기척을 억눌렀기 때문에 발소리도,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살수는 뒤를 잡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드득!
“흡...!”
불길한 소리와 함께 목뼈가 부러진 살수가 혀를 빼문 자세로 축 늘어졌다.
‘본채 위쪽과 나무 위에도 있군.’
그들 역시 앞선 살수처럼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그렇게 바깥의 살수들을 모두 처리한 강엽은 뒤쪽의 마당으로 내려가서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건장한 장정이 통과할 만큼 커다란 창문.
이번에도 기척을 내지 않고 안으로 침투해서 초음으로 내부를 살폈다.
의외로 바깥에 비해 안쪽은 조용....
‘미친놈들인가?’
순간 강엽은 눈을 의심했다.
침실 안쪽에서 두 놈이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살수가 맞는지 의심이 되는 거구의 사내와 제법 긴 머리칼을 질끈 묶은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강엽이 접근하자 장발의 사내가 넉살 좋게 웃으며 강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왔으면 앉지 그러시오.”
“....”
“흠, 은신술이 제법이오. 분명 존재한다는 걸 아는데도 보이진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으니. 하지만 이미 들켰으니까 헛수고하지 마시구려.”
그냥 하는 말 같진 않았다. 청년의 눈은 강엽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강엽이 암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자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한 재주요. 귀신처럼 신출귀몰하다는 소문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군. 하지만 사람의 감각을 속일 순 있을지 몰라도 바람을 속이진 못한다오.”
강엽이 최대한 조용히 창문을 열었어도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바로 창문을 닫았지만 이들은 방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온 것을 알아챈 것이다.
“바깥에 숨은 놈들처럼 숨을 줄 알았는데.”
“나는 몰라도 이 친구는 그러지를 못해서 말이오. 한데 바깥에 있는 녀석들은 어찌 됐소?”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죽었을 것 같구려. 피냄새도 나지 않고 비명도 들리지 않았으니. 목뼈를 부러뜨려 죽였겠지.”
“잘 아는군.”
부하들이 죽었다는 말에도 장발의 사내는 놀라거나 분노하기는커녕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오히려 거구의 사내가 마뜩치 않은 얼굴로 강엽을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의 부하였군.’
강엽은 그걸로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했다.
똑같이 한 자릿수였지만 장발의 사내가 거구의 사내에 비해 더 높은 서열인 것이다.
“흑접의 뒤는 왜 캐는 것이오? 아, 부정할 생각은 마시오. 그쪽이 칠호를 데려간 걸 알고 있으니까. 이십구호와 칠호, 두 사람의 금제가 발동됐다는 것도 파악했으니 오리발 내밀어봤자 소용없소.”
“알려주면 뭐 순순히 물러가나?”
“하하, 설마. 우린 당신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소. 하지만 알려주면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보내드리리다. 이만하면 타산이 맞는 것 같은데....”
강엽은 혼자고, 자신들은 두 명이니 절대 패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만했다.
“흑무암쇄진. 혹시 들어봤나?”
“음?”
장발의 사내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거구의 사내 역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기만 했다.
‘이놈들도 모르는군.’
칠호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녀 역시 흑무암쇄진에 대해선 몰랐다.
“모르면 됐다. 흑접주한테 물어보면 그만이지.”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고 하는군. 고통스럽게 죽어도 우릴 원망하지 마시오. 나랑 달리 이 친구는 자제라는 걸 전혀 모르니까.”
그 순간, 거구의 사내가 철퇴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