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73화 (72/450)
  • 12화. 호위 (11)

    “토, 토할 것 같아....”

    홍가려는 바닥에 쓰러져서 골골거렸다. 온몸이 땀범벅이었고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엽을 어떻게든 때려보겠다고 격렬하게 움직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공방을 이어가는 법을 몰랐다. 무공을 배웠어도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싸워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강엽이 여러 불리한 조건을 걸었어도 초심자의 주먹을 맞을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일어서라.”

    “자, 잠깐만요. 우욱....”

    허리를 잡고 끙끙댄 홍가려는 문득 억울해졌다.

    강엽은 방어만 했는데 어째서 자기만 아프단 말인가?

    심지어 아픔의 원인이 고작 근육통이라는 사실이 더 화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으으, 열심히 수련할걸....’

    몸매를 가꾸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서 무공을 익혔지만, 근육이 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엽 역시 손가락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주먹심은 제법 세군. 본신 무공에 비해 내공도 많은 편이고....”

    초능의 파동으로 홍가려의 체내를 살펴봤더니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단전이 있었다.

    이만하면 십 년은 족히 넘었다.

    홍가려 같은 초심자가 십 년을 꾸준히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가진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약을 복용한 것 같은데.”

    “맞아요. 그게 내공을 빠르게 늘린다고 해서요.”

    “어디서 구한지 물어봐도 되나?”

    강엽도 장경을 통해 영약을 구하고 있었다. 시중에 영약이 별로 없어 많이 구하지는 못했지만.

    “음, 전 운이 좋았어요. 연이 닿아서 장안대상회가 주최하는 경매장에 참가할 수 있었거든요.”

    사천삼미의 명성은 사천뿐만 아니라 인근의 호광과 섬서, 귀주 등에도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중경을 들른 외지인들 중 하루 술값으로 수백 냥쯤은 우습게 쓸 수 있는 갑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원루에 찾아왔다.

    “그중에 장안대상회의 대공자가 있었어요.”

    홍가려의 금음을 들은 개안을 했다면서 경탄했다.

    그러면서 홍가려에게 장안대상회가 주최하는 경매장에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을 선물했다.

    “하지만 제가 장안까지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냈어요.”

    그리고 운 좋게도 경매에 나온 비싼 영약을 얻어서 내공 증진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몸에 좋은 약을 많이 복용했고.

    ‘진지하게 무공을 익혔다면 고수가 됐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무공에 늦게 입문했으니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홍가려의 무재가 떨어졌다면 성취가 더뎠을 수도 있고.

    ‘그나저나 경매장이라....’

    꼭 장안대상회의 경매장은 아니더라도 규모가 큰 경매에 참가하면 영약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홍가려의 이야기를 뇌리 한켠에 새겨둔 강엽은 한 다리를 학처럼 치켜들고 손가락 하나만 앞세우는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그럼 충분히 쉬었겠지? 덤벼.”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진짜... 내가 억울해서 한 대는 때린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당할 만큼 당했으면서도 홍가려는 오기를 떨치지 못하고 이를 뿌득 갈며 달려들었다.

    * * *

    홍가려는 근육통을 끙끙 앓았다.

    저간의 사정을 깨달은 청수와 하후진은 뭐 이런 놈이 있냐는 듯이 강엽을 바라봤다.

    청수는 강엽과 교대하러 왔고, 하후진은 사원루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늘어지게 잠자다 아침에 일어나서 청수와 만나서 같이 온 것이다.

    “대련하다 저렇게 됐다고요?”

    “확실히 그 여자가 요새 쌓인 게 많긴 한 것 같던데... 이래도 되는 거냐?”

    “더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해보든가.”

    두 사람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냥 뒀으면 폭발했을 거다. 홍가려의 정신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와 금음을 빼면 홍가려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가뜩이나 암살 위기에 시달리는 사람이 바람도 못 쐬고 갇혀 있는데 과민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풀어주는 게 낫지. 홍가려가 쓰러진다고 호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건 인정.”

    “그럼 저희도 홍 소저와 대련해야 합니까?”

    청수의 물음에 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근육에 알이 배겼으니 한동안 끙끙 앓겠지.”

    밖에 나갈 생각도 안 들 것이다.

    대련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근육과 내공을 한계까지 쥐어짰으니 말이다.

    “그보단 흑접을 걱정해야지.”

    “하긴. 놈들이 슬슬 쳐들어올 때가 되긴 했지. 그때 만난 살수들은 답지 않게 어설펐는데 말이야.”

    “그자들도 우리를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어리석긴 했지요.”

    먼저 홍가려의 상황을 파악해서 일행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이번에 오는 살수들은 적어도 그때 만난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하고 은밀할 것이다.

    “한 자릿수 놈들이 올 것 같은데.”

    “저번에 만난 자가 이십구호였지요?”

    지금쯤이면 흑접도 이쪽의 전력을 파악해서 홍가려를 죽이기 위한 준비를 끝냈을 터.

    별안간 청수의 안색에 근심이 드리웠다.

    “한두 번 막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홍가려의 호위를 맡은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러나 흑접이 몇 번 실패한다고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고작 힘없는 여인을 죽이지 못해서 물러난다면 흑접의 평판에 금이 가지 않겠는가?

    “아마 이번만 막으면 될 거야.”

    “그게 뭔 소리야?”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강엽은 대답하기 앞서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수였다.

    “말 그대로다. 흑접의 살수를 생포해서 놈들의 총단 위치를 알아내고, 역으로 칠 작정이거든.”

    “...!”

    “...!”

    “물론 쉽진 않을 거다. 놈들은 금제가 걸려 있어서 입을 열지 않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진 않아.”

    지난 며칠간 죽치고 앉아서 호위만 한 건 아니다.

    흑접의 살수들에게 걸린 금제를 역산, 금제를 폭주시키지 않으면서 파훼할 방안을 궁리했다.

    모산파의 술법 전반에 대한 지식을 공부한 덕에 몇 가지 방안을 구상했고, 망혼소와 초음이 있다면 해볼 만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잡졸들은 다 죽여도 상관없어. 하지만 한 자릿수 놈들은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왜?”

    단지 적의 본거지를 찾는 게 목적이라면 아랫놈들을 족쳐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이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강엽은 잠시 말을 골랐다. 두 사람에게 설명할 이유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상위 서열이 아는 게 더 많을 테니까. 이를테면 흑접주를 포함한 상위 서열의 실력이나 적을 막기 위해 마련한 방어책 같은 것들 말이야.”

    “한데 그자들이 실토하겠습니까?”

    설령 한 자릿수를 생포하고, 금제를 벗겨내고 고문한다고 쳐도 순순히 불까?

    청수가 걱정하는 반면 하후진은 어깨만 으쓱였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근데 해본다고 손해볼 건 없잖아. 사로잡는 게 좀 까다롭지만.”

    다만 하후진이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뭐, 나야 상관없는데. 이거 의뢰 범위를 벗어난 건 알지? 우리가 흑접까지 쳐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없어. 우린 의뢰서에 적힌 일만 하면 그만이야.”

    사원루주가 맡긴 의뢰는 홍가려를 지켜달라는 것뿐, 흑접을 토벌해달라는 얘기는 없다.

    물론 넓게 보면 흑접을 토벌해야 홍가려가 안전해진다. 하지만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과 흑접에 쳐들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원루주를 구워삶아야지. 그건 장경이 할 거다.”

    사원루주를 설득해서 흑접을 토벌하는 의뢰를 받아내는 것도, 흑접의 총단을 칠 만한 전력을 꾸리는 것도 장경이 알아서 할 일.

    “뭐야. 둘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거냐?”

    “그래. 물론 흑접의 총단이 어딨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말짱 헛거지만....”

    아닌 말로 흑접의 살수를 사로잡는다고 해도 모든 게 계획대로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계획이 빠그러진다고 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혈종술을 쓰기도 할 테고.’

    이전에 이십구호를 쫓았던 것처럼 한두 놈을 놓아준 뒤에 혈종술로 추적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다만 놈들을 놓아준다고 반드시 총단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어서 예비책으로 남겨놨을 뿐.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굴러가도 나 혼자선 무리다. 너희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난 돈만 많이 주면 상관없어.”

    강엽이 청수를 바라보았다.

    청수는 낭인이 아니기에 흑접을 토벌한다고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물론 따로 챙겨줄 수는 있지만 아마 청수가 거절할 것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청수가 툭 물었다.

    “흑접을 토벌한다고 살수들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니.”

    강엽은 확신했다. 사천의 살문들이 어떤 곳이 있는지는 잘 몰라도 흑접 하나만 존재하진 않으리라.

    “흑접이 사라진 자리엔 다른 살문이 들어서겠지. 하지만 흑접을 토벌하는 일이 쓸모없진 않을 거다. 사람들이 별 같잖은 예고장을 받고 벌벌 떨진 않을 테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수의 입술이 엷은 호선을 그렸다.

    강엽과 함께 싸우겠다는 뜻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때 하후진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킁, 다 좋은데 흑접 새끼들이 모습을 드러내야 잡든 말든 하잖냐? 그치들이 대놓고 오진 않을 텐데.”

    “그게 걱정이긴 한데... 홍 소저를 노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건 너무 도박수 아니냐?”

    두 사람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그라면 무슨 방법을 낼 거라고 믿는다는 듯이.

    강엽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나라고 놈들을 당장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애초에 흑접이 어떤 수를 쓸 건지 예측이 안 돼서 방비를 튼튼히 한 게 아닌가?

    그렇다고 강엽이 손 놓고 기다리는 건 아니다.

    “뭐, 최대한 방비책을 짜놓긴 했는데... 놈들이 내 상상력을 벗어나지 않길 바라야지.”

    * * *

    칠호는 실소를 흘렸다.

    ‘이건 뭐 성채가 따로 없네.’

    사원루는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했다.

    보표들과 낭인들이 사원루의 장원 곳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담장 바깥과 경내는 물론이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서 사주를 경계하는 등 감시망이 촘촘했다.

    제법 야심한 시간인데도 파고들 틈이 없었다. 억지로 파고들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전각 내부는 더 삼엄하겠어.’

    다만 모든 곳의 방비가 철저한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아랫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은 감시망이 덜했기 때문에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었다.

    안쪽에서 표식을 찾은 그녀는 똑같이 표식을 남긴 뒤, 약속 장소에 갔다. 일시는 그녀가 정했어도 장소는 앞서 표식을 남긴 자가 정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 씨발. 하필이면 뒷간이 접선 장소냐?’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그녀는 뒷간의 천장에 매달린 채 존재감을 낮추었다.

    순찰을 도는 보표들도 냄새 나는 곳을 자세히 둘러보는 건 꺼렸기에 대충 둘러보는 시늉만 하고 나왔다.

    설마 살수가 시비들이 사는 곳에 숨어들 거라곤 생각도 안 한 탓이었다.

    구린내가 배기도록 몇 시진을 천장에 매달린 채 기다리고 있을 때쯤, 별안간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혼자서 이 시간에 왜 나온 것이냐? 가급적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건만!”

    “그, 그게 속이 좋지 않아서... 송구합니다, 무사님들.”

    마침 밖으로 나온 시비가 보표들과 마주쳤던 것이다.

    시비가 허둥대면서 변명하자 보표들도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뒷간에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크흠, 볼일 마치면 방에 돌아가도록. 언제 살수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보표들이 가버리자 시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살수를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뒷간에 들어간 그녀가 전음을 썼다.

    [삼가 백팔십이호가 칠호님을 뵙습니다. 이런 곳에서 뵈어 면목이 없습니다. 사원루 전체의 경비가 삼엄한 탓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낮엔 둘씩 짝지어 다녀야 합니다. 보표들과 낭인들은 물론 시비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낮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난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밤엔 통금이 떨어져서 뒷간에 가는 게 아니면 밖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시비들은 함께 살기 때문에 방에서 뵙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쯧, 어쩔 수 없지.]

    [...송구합니다.]

    [안쪽 상황은 어때?]

    [표적은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담 숙수와 시비들을 따로 뒀는데, 그들이 사는 곳도 떨어져 있어서 접근하는 게 여의치 않습니다. 또한 그들 역시 엄중히 호위받고 있습니다.]

    [몰래 접근하는 건 어렵겠네.]

    [그렇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귀영과 사자염도, 선풍룡이 하루 네 시진씩 번갈아가며 표적을 지키고 있습니다.]

    칠호의 머릿속에 대략의 상황이 그려졌다.

    아무리 그녀의 은신술이 출중해도 절정고수가 지키는 곳을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럼 팔호의 작전대로 갈 수밖에 없겠는걸.’

    칠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전음을 보냈다.

    [네 얼굴 인피면구지? 그 얼굴 나한테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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