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8화 (67/450)

12화. 호위 (6)

본의 아니게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덕분에 팽팽했던 분위기가 느슨해진 것도 사실.

전병을 하나 집어먹은 강엽이 접시를 홍가려 쪽으로 밀었다.

“먹어라. 생각보단 먹을 만하군.”

“뭐예요?”

홍가려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억지로 사내를 가장한 좀 전과는 달리 듣기 좋은 미려한 목소리.

듣는 이로 하여금 귀가 호강하는 기분을 안겨주는 맑은 목소리였다.

“밤새 말을 탔으니 배고플 텐데? 소면 가지고는 좀 모자라지 않나?”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홍가려가 애써 도도하게 거절했지만 눈동자는 강엽이 내민 접시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니, 비단 전병뿐 아니라 식탁에 오른 음식들의 향이 미친 듯이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본능은 당장 젓가락을 뻗으라고 종용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의 충동을 꾹꾹 눌러참았다.

‘아직 이 사람 정체도 모르는데, 이걸 받아먹으면 내가 뭐가 돼?’

내면의 걸신과 사원루 제일의 예인으로서 우아한을 지켜야 한다는 자존심이 충돌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도 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싫으면 말고. 이따 내 일행이 오면 그놈들이랑 같이 먹어도 돼.”

접시를 치우려는 기미를 보이자 홍가려가 실로 번개같은 속도로 접시를 잡았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뭐?”

“으, 음식이 아까우니까 먹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당신을 믿는다고 착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전병을 입가에 가져갔지만,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홍가려 역시 말고 안 되는 변명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쥐구멍에 숨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기 전에 든든히 먹을걸....’

그녀는 후회했다. 시비들을 속이겠다고 끼니도 거른 채 병자 행세를 했던 게 화근이 될 줄이야?

속으로 울상을 지은 홍가려를 가만히 보던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뺏어먹으니 천천히 먹어라.”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나저나 같이 온 사람들이 있다고요?”

홍가려는 삶은 돼지고기를 우물거리면서도 강엽이 일행이 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두 명. 다른 객잔을 뒤지고 있지. 우리 모두 사원루주가 보내서 온 거다.”

“루주님이 보냈다면... 절 찾아오라는 거군요. 하지만 전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흑접 때문에?”

민감한 단어가 나오자 홍가려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단호한 결의를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엽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사태를 너무 가볍게 보는군. 아니, 흑접을 우습게 본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요?”

고운 아미가 쌍심지를 돋웠지만 강엽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도망친다고 흑접이 포기할 리가 없거든.”

애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태도는 높이 살 만하나, 결국 제 명줄만 재촉할 뿐.

그러자 홍가려가 발끈했다.

“제가 어디로 도망칠지 알고요? 장강을 타면 운남에 갈 수 있어요. 귀주로 갈 수도 있고요.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호광이나 광동이 나와요.”

“그 생각 자체가 흑접을 우습게 본다는 거다. 당신이 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은 못했을까?”

“....”

“그들도 별별 짓을 다 했는데도 죽은 거다. 도망치는 건 해결책이 되지 못해.”

“그럼 저더러 어쩌라고요? 가만히 앉아있다 얌전히 목이나 내주라고요!?”

“싸워야지.”

“그게 무슨... 저도 알 만큼 알아요!”

흑접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부자든, 무림 고수든 공평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괜히 그녀가 흑접의 예고장을 받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도망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강엽은 홍가려가 눈에 핏발이 설 기세로 노려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도망치면 갈 데는 있나?”

호사가들이 사천삼미니 중경제일미녀니 띄워줘도 결국 사원루에 속한 예기일 뿐.

언제부터 이 바닥에서 일했는지 몰라도, 필시 나름대로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일가친척 피붙이가 멀쩡한 여자가 예기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원루를 나올 때 가지고 나온 패물들이 있어요. 이걸 돈으로 바꾼다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어요.”

“그 뒤엔?”

“예?”

“적당히 때를 봐서 돌아가려고?”

“....”

정곡을 찔린 홍가려가 입을 꾹 닫자 강엽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흑접을 뿌리치지도 못하겠지만, 뿌리치더라도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야 할 거다. 당신이 이제껏 이룬 모든 걸 포기해야겠지. 그럴 수 있나?”

설마 홍가려가 단순해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내 말을 믿어. 도망치는 것보단 싸우는 게 나아.”

“당신이 절 지켜줄 수 있나요?”

“나 혼자선 힘들지. 근데 저 녀석들도 있으니까.”

강엽이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하후진과 청수가 객잔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분들은...?”

“아까 말한 내 일행이다. 좀 미친놈들이긴 해도 실력은 보장할 수 있어.”

“진짜 미친놈이 누구 더러 미쳤다는 거야?”

가당치도 않다는 기색을 드러낸 하후진이 허락도 없이 의자에 앉으며 홍가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홍가려는 당황했다.

‘뭐야, 이 인간들은?’

초면에 만났으면 통성명을 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범절 아닌가?

그나마 청수만 흠 잡을 데 없는 태도로 포권을 쥐었지만, 그도 희한한 시선을 보내기는 매한가지였다.

“뭐, 뭐예요? 왜들 그렇게 봐요?”

“아니, 신기해서. 댁이 홍가려 맞지?”

“맞아요.”

“어째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좀....”

하후진이 떨떠름해하며 청수를 힐끔거리자 청수도 동조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물론 홍가려는 남장을 한 지금도 요모조모 뜯어보면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하지만 사천삼미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에잉, 실물이 소문만 못하구만.’

말은 안 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서 노골적인 실망감이 그러나자 홍가려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이 새끼들이 진짜.... 남은 죽느냐 사느냐 그게 문제인데 니들은 얼굴이 대수냐?’

비록 남장을 했어도 그녀의 용모는 원래 얼굴로 돌아다니면 주변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에 덜 띄게끔 수수하게 꾸민 건데, 이놈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바가지를 긁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꾸민 모습을 보여줘서 이놈들의 혼을 쏙 빼놔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요. 사원루로 돌아간다고 쳐요. 그럼 저를 지켜줄 수 있다고 어떻게 보장하죠?”

어차피 강엽 일행에게 따라잡힌 시점에서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하지만 홍가려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했다.

강엽이 의자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보장은 못해. 우리가 무슨 천하팔존이나 구파 장문인도 아니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아가씨.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 우리는 행동으로 증명할 테니까, 댁이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해 봐.”

하후진이 눈을 찡긋하며 강엽을 따라 일어선다.

“시기가 참 공교롭군요. 강 도우의 말이 맞았어요. 일각만 늦었어도 후회할 뻔했습니다.”

청수 역시 허리춤의 검파를 잡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요?”

세 남자가 같이 일어서자 홍가려가 어깨를 움츠렸다. 특히 청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청수 도장.”

“놈들이 홍 소저의 몸엔 손 하나 대지 못하도록 지키겠습니다. 주인장과 점소이도요.”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해 주인장과 점소이를 지킬 의무는 없지만, 애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막아야지 않겠나.

“이거 참, 손님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온다.”

강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피풍의와 흑립을 뒤집어쓴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장내를 쭉 둘러본 흑립인들이 전음을 나누었다.

[저중에 홍가려가 있나?]

[저기 얼굴 곱상한 놈이다. 술법의 기운이 저쪽을 가리키고 있어.]

[남장을 했나 보군. 체형도 맞는 것 같고... 한데 나머지 놈들은 뭐지?]

[우연히 만난 거 아닌가?]

[기다려. 사원루주가 보낸 세 명과 인상착의가 일치한다.]

[...우리보다 먼저 왔다고?]

우연일 리가 만무했다.

홍가려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아무래도 사원루주가 홍가려가 어디로 갈지 짐작해서 말해준 것 같은데... 공교롭군. 이쪽에 홍가려의 지인이 살고 있었나?]

설마 강엽 일행을 맞닥뜨릴 줄 몰랐는지라 당혹스러웠다.

만약 저들이 이미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실수했군. 미리 알아보고 움직였어야 했거늘....’

척후를 보내서 홍가려의 상황을 미리 살폈으면 이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을. 상대가 무공도 변변치 않은 여인이라 방심했다.

하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때 손님을 맞으려던 점소이가 하후진에게 어깨를 잡혀 어정쩡하게 굳어졌다.

“소, 손님?”

“주인장이랑 같이 주방에 들어가있으쇼. 우리가 나오라고 할 때까진 절대 나오지 말고.”

우격다짐으로 점소이를 주방에 넣은 하후진이 흉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흑립인들을 노려봤다.

“이거 웃기는 놈들일세. 살수라는 것들이 대놓고 들어와?”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와 대도. 네놈이 염왕도문의 후계자라는 놈이구나.”

“오호라, 나를 아는 놈들인가?”

“홍가려의 앞을 막은 샌님 검객은 무당 삼청검의 제자인 선풍룡 청수 도장. 그리고....”

흑립 아래 숨겨진 눈동자가 강엽에 이르러 번뜩인다.

“네놈이 귀영이군.”

“정보가 빠른걸. 보통은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게 먼저일 텐데 말이야.”

강엽의 눈빛이 깊게 침잠되었다.

“역시 사원루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나.”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

“홍가려가 변장까지 했는데 단번에 찾았지. 술법을 쓴 것 같은데....”

강엽이 술법으로 홍가려를 찾았기에 그쪽으로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중얼거리듯 묻는 질문을 여상하게 받아친 흑립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고장이 술법을 걸기 위한 촉매제였군.”

그 말에 흑접의 살수들은 당장 공격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석상처럼 빳빳해졌다.

그들뿐만 아니라 하후진과 청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홍가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다. 처음에 예고장을 찾았을 때, 봉투에 들어 있었지? 꺼내려다 손을 베었고.”

“그렇긴 한데 그게 왜....”

“여기서부터는 내 추측인데, 흑접의 예고장을 처음 만졌을 때 놈들이 당신을 쫓을 수 있는 술법을 발동한 게 아닌가 싶다. 추종향을 썼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당신 말고 예고장을 만진 다른 사람들한테도 추종향이 묻었을 테니 아마 아닐 거야.”

술법의 술도 모르는 홍가려는 강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고장이 함정이었다는 말에는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래졌다.

흑접의 살수들도 멈칫했다.

“...살려둬선 안 될 놈이었군.”

암살 대상인 홍가려보다, 술법의 비밀을 대략적으로나마 눈치챈 강엽이 더욱 우선 순위가 높아졌다.

만약 강엽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이 밖으로 퍼져나간다면 추후 흑접의 살행에 심대한 지장이 생길 터.

“멍청한 놈. 네놈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일 수밖에 없다.”

“개소리는 작작해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죽일 셈 아니냐?”

주인장과 점소이까지 죽일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일일이 사정을 봐주면서 싸우지는 않았겠지.

강엽이 차가운 시선을 뿌리자 맨앞에 나선 흑립인이 복면 너머로 입매를 비틀었다.

“죽어라.”

어린아이 주먹만한 검은 구슬이 일행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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