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5)
혈점은 남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양피지를 보면서 강엽이 눈매를 얇게 떴다.
“강진현(江津縣)으로 가려나 본데...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저쪽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말에 하후진과 청수가 잠시 경공을 멈추고 강엽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달렸지?”
“어... 대충 반시진 좀 넘었나?”
“그럼 못해도 팔십 리는 달렸을 거다. 홍가려가 무공을 익혔어도 우리보다 빠르지는 않겠지. 두 발로 달린다면 말이야.”
“말을 탔군요.”
청수가 눈동자를 빛냈다.
“이 야밤에 말을 구하는 게 문제이긴 한데... 근처에 역참이 있으면 어렵지 않았을 거다.”
“허, 평생 금(琴)만 탔다는 여자가 알고 보니 무공도 익히고 말도 잘 탄다고? 뭐 하는 여자야?”
“놀랍긴 하지만 못 쫓을 건 없지 않습니까?”
물론 말을 따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행의 속도라면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전에 술법이 끝나겠지.”
“....”
“반시진을 달렸는데도 못 따라잡았어. 그리고....”
강엽이 밤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이 남았으나, 그때까지 못 찾으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리라.
게다가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말을 탄 게 문제가 아니야. 하필이면 강진현 쪽으로 가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배를 타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배요?”
“장강을 타고 운남까지 가려는지, 노주에서 내린 다음 귀주로 빠지려는지 모르겠지만... 사천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라면 뱃길이 가장 빠르다. 강진현은 포구를 꼈으니 날이 밝으면 바로 배를 탈 수 있을 테고.”
“...!”
“...!”
강엽의 말에 하후진과 청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홍가려가 아무렇게나 도망치는 게 아니라 목적을 정해두고 도망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만약 사천을 벗어나면....”
“찾기 어려울 거다.”
“자, 잠깐! 그 여자, 시비들이 입는 옷을 훔쳐입었잖아? 그럼 사람들에게 그런 옷차림을 한 여자를 봤냐고 묻는다면....”
“일리가 있군요.”
하후진이 간만에 꾀를 냈지만, 결과만 놓고 말해서 그 방법은 시작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장강 어귀에서 하늘하늘한 시비옷과 당혜가 강변에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야, 우리 망한 것 같은데?”
하후진이 어처구니없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뭐, 아무 집에 들어가서 훔친 거 아니겠냐?”
굳이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옷을 갈아입은 것은 사원루에서 자신을 쫓아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말도 지쳤을 테니 강을 들렸을 테고... 겸사겸사 여기서 옷을 갈아입은 거겠지.”
“아직도 강진현 쪽으로 가냐?”
“그래. 방향이 바뀌진 않았어.”
“진짜로 배를 타려나 본데. 배짱 두둑한 여자인걸. 정말 사천을 빠져나갈지도 모르겠어.”
“글쎄, 쉽지 않을 거다.”
“뭐?”
“생각해봐라. 우리가 쫓고 있는 동안 흑접은 놀고만 있겠나?”
홍가려가 이토록 빨리 도망칠 줄은 몰랐다고 해도, 대비책도 없이 예고장을 보냈을 리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흑접의 그물질을 피할 수 있었다면 흑접의 악명이 그리 높지도 않았겠지.
청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보탰다.
“장 분타주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흑접엔 도망친 사람들을 추적할 수단이 있을 거라고요.”
“젠장, 정말 그 여자가 죽으면 우리만 뺑뺑이치는 거잖아?”
의뢰를 시작하기 전에 호위 대상이 덜컥 죽어버리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의뢰비는 건지지도 못하지 않겠는가?
강엽이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이 밝기까지는 네 시진 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간은 아직 우리 편이야. 그 여자가 배를 타기 전에 잡자고.”
* * *
숲 한복판에 한 무리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전원이 검은 피풍의와 흑립(黑笠)을 쓰고, 복면으로 입을 가린 자들이었다.
“표식을 보고 오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홍가려가 도망쳤다.”
“호오. 사원루주가 발 빠르게 행동하는군. 설마 흑접을 받은지 하루 만에 홍가려를 빼돌리다니....”
“아니, 사원루주의 짓이 아니다. 홍가려가 제 발로 도망쳤어. 사원루도 혼란에 빠진 모양이더군.”
“허, 일개 기녀 따위가 도망쳤단 말인가?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을 줄 알았건만.”
“사원루 놈들이 하는 얘기를 주워들어보니 홍가려는 비밀리에 무공을 익혔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도망칠 마음을 먹었던 걸지도 모르지.”
“성취는 어떻지?”
“뛰어난 편은 아니라던데.”
“그렇겠지. 무공을 익힌 건 놀랍지만... 도주 자체는 예상했던 범주 내다.”
흑접의 살수들은 놀라긴 했어도 당혹스러워하진 않았다.
그동안 흑접의 예고장을 받은 이들 중에 발 빠르게 행동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홍가려는 어디로 가고 있나?”
살수들의 시선이 평평한 너럭바위에 앉아있는 동료를 향했다. 흑립을 잠깐 벗어둔 중년인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눈꺼풀을 들어올린 그의 안구엔 검은자위 없이 흰자위만 가득했다. 온몸으로 사특한 기운을 풍긴 그가 입가를 씨익 들어올렸다.
“찾았다. 남서쪽으로 가고 있군. 거리는 육십 리쯤 떨어져 있다.”
“남서쪽이라. 장강을 통해서 사천을 벗어날 작정인가.”
회합을 주관하는 흑립인 역시 강엽처럼 홍가려의 행선지만 듣고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중경 근처의 지리를 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천만 벗어나면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우리도 쫓는다.”
“그전에 알릴 게 있다. 사원루주가 어젯밤에 낭인전에 호위 의뢰를 맡겼다. 귀영과 사자염도, 그리고 근자에 선풍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무장의 본산제자가 그 여자를 쫓고 있다던데.”
“자세히 말해봐라.”
흑접은 사천의 고수들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하지만 강엽은 이름을 떨친 지 오래되지 않았고, 하후진과 청수는 다른 성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사천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사자염도부터 말하지. 그는 염왕도문의 후계자이자 섬서에서 오래 활동한 은천패 낭인이다. 일월신교의 고수들을 여럿 죽였다더군.”
“잠깐, 염왕도문이라면...!”
염왕도문이라는 말에 흑접의 살수들이 술렁거렸다.
하후진의 이름은 몰라도 염왕도문의 이름은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오십 년 전, 흑룡교주를 협공해서 죽인 세 명의 절대고수 중 한 명이 염왕이었지. 사자염도는 그의 사손이 아닐까 짐작된다.”
“놀랍군. 염왕도문의 맥이 남아있을 줄이야....”
“무당 제자는 어떻지?”
다른 살수가 물었다.
“그자의 내력 역시 범상치 않다. 선풍룡 청수. 알고 보니 삼청검(三淸劍)의 제자였어.”
“무당제일검...!”
살수들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흑룡교주를 죽인 염왕도문의 후예도 모자라서 무당제일검의 제자까지 있다니?
“귀영이라는 자는?”
“그는... 모른다.”
“시간이 부족했나?”
“그보다는 내력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요살마녀를 죽이고 철권긍룡을 쓰러트린 것밖에는.”
“정체는 몰라도 절정고수라고 봐야겠군.”
무시할 수 없는 고수가 세 명이나 달라붙었으니 흑접이라 한들 방심할 수 없다.
살수는 기습과 암습에 특화된 존재지, 무인들처럼 정면대결에 능한 존재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정면에서 싸울 수는 있으나 그런 방식은 선호하지 않는다.
“어쩔 거지, 이십구호(二十九號)?”
“홍가려를 쫓는다.”
어떤 대단한 고수가 붙어도 마찬가지다. 흑접은 목표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놈들이 무공은 강할지 몰라도 술법을 쓰는 우리보다 더 빨리 홍가려를 찾진 못할 거다.”
살수들은 짐작도 못했다. 그들이 술법을 쓰듯 강엽 일행도 술법을 써서 홍가려의 위치를 가늠했다는 것을.
* * *
흑접보다 먼저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진현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일행은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홍가려도 지쳤을 테니 날이 밝을 때까지는 객잔에서 쉬고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포구를 낀 마을이 그렇듯이 이 마을 역시 강과 가까운 곳에 객잔들과 주루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차례대로 네 군데 객잔을 뒤적거린 강엽은 다섯 번째 객잔에 들어가고 나서야 의심되는 사람을 찾았다.
“어서 오십쇼!”
점소이가 와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묵고 가실 겁니까요? 아니면 식사부터 드릴깝쇼?”
“뭐가 되지?”
“만두랑 전병이랑 오리고기를 넣은 소면이 있습지요. 회과육(回鍋肉)이랑 궁보계정(宮保鷄丁)도 저희 객잔이 자신 있게 내놓은 명물입니다요!”
“소면 빼고 다 주문하지.”
“예에? 야, 양이 꽤 많은뎁쇼?”
“일행이 있어서 말이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자리는... 엇, 손님!?”
강엽은 당황한 점소이를 뒤로하고 식당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걸어가서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소면을 호로록 먹고 있던 청년이 경계의 시선을 보냈지만,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소면만 먹으면 배고프지 않나?”
“...초면에 뉘신데 이러시오?”
“도망치느라 고생이 많아.”
“...!”
청년의 목이 꿀꺽하는 소리를 내며 물결쳤다. 긴장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침을 삼킨 것이다.
“크흠,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형장이 누군지 모르나 엉뚱한 사람을 찾아오신 듯하오.”
“헛짚었다면 사과하지. 근데 당신이 내가 쫓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두 개나 되거든.”
여기 오는 동안 혈종술의 효과는 다했지만, 혈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말을 타야 하니 활동하기 편한 옷을 골랐겠지. 하지만 그렇게 훔친 옷이 몸에 맞을 리가 없을 테고... 너무 급하게 훔쳐서 목을 가릴 생각도 못했군.”
“그게 무슨...?”
“목울대.”
“...!”
아무래도 여인들이 사내들에 비하면 목울대가 덜 튀어나오는 편이었다.
맞은편에서 입술을 깨문 수려한 청년도 마찬가지. 애써 남장을 하고 목소리를 깔았지만 여인의 티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점소이에게 당신이 말을 타고 왔는지 물어보면 더 확실해질 것 같은데.”
“...당신 뭐야?”
“난....”
“만두 나왔습니다!”
점소이가 만두를 가져오는 바람에 강엽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난 사원루에서....”
“전병 나왔습니다!”
“....”
강엽이 황당해하며 점소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뭔 놈의 음식이 주문하자마자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미처 강엽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점소이는 주방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
“잠시 말이 끊어졌군. 나는....”
“회과육 나왔습니다!”
“....”
연달아 말이 끊긴 강엽은 기어이 점소이를 잡고 추궁했다.
“이봐, 음식이 왜 이렇게 빨리 나오는 거냐?”
“아, 그, 그게... 헤헤, 실은 좀 전에 오신 손님들께서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주문을 취소하시는 바람에... 더, 덕분에 빨리 나왔습지요.”
굳이 이 음식들을 추천한 것은 만들어둔 음식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깊은 빡침을 느낀 강엽이 짓씹듯 내뱉었다.
“마지막 음식은 취소한다.”
“예? 거의 다 만들었는데요?”
“필요없어.”
“예....”
점소이가 풀이 죽어 가버리자 강엽은 얼굴을 덮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자기 소개도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