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4화 (63/450)

12화. 호위 (2)

“물어보기만 하면 되나?”

“그래, 쫓아내는 건 바라지도 않아.”

“조건이 있다.”

장경이 자신을 위해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는 만큼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확답을 받아야 했다.

“크흠, 나도 맨입으로 해달라는 건 아니야. 낭인전의 모든 건 의뢰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조직과 관련된 문제인데, 당연히 의뢰를 해야지.”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면 하는데.”

이쪽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낭인들을 쭉 둘러보자 다들 딴청을 피웠다.

장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구파랑 안 좋게 얽히면 얼마나 골치 아픈데. 문제 일으키는 놈들은 명부에서 지울 거야. 알아들었냐, 이 새끼들아!”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다. 아무리 속이 타고 짜증이 나도 구파의 제자에게 덤비는 간 큰 놈은 없었다. 다만 자신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

“그럼 의뢰비는....”

“잠깐!”

그때 누군가 외쳤다.

강엽과 장경이 누군가 하고 고개를 돌리자 하후진이 보무도 당당하게 낭인들을 헤치며 들어왔다.

“밖에서 들었다! 꽤나 곤란한 것 같은데, 이 은천패 낭인인 사자염도 하후진이 도와주마!”

“오, 오오...!”

“과연 사자염도!”

뜻밖의 지원군에 낭인들이 환호했고, 강엽과 장경은 이 새끼가 왜 이러나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낭인들의 환심을 사겠다고 이런 짓을 할 놈이 아닌데...?

“대신 의뢰비는 천 냥으로 받겠다!”

“야, 이 양심 터진 간나 새끼야! 네가 은천패라도 이런 일로 천 냥이 말이 되냐!”

장경이 정수리까지 시뻘게져셔 손가락질을 하자 하후진이 훗하고 실소했다.

“장 분타주, 생각보다 순진하군?”

“뭐, 뭣?!”

장경이 경악했다. 수많은 인간 군상을 상대하며 닳고 닳았다는 소리를 듣는 그가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장경뿐만 아니라 강엽과 낭인들도 희대의 개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짓자 하후진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사내들끼리 진솔한 얘기를 하려면 술이 필요한 법. 그냥 찾아가서 너 언제 꺼질 거냐고 묻는 것보단 같이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넌지시 물어봐야지.”

“그걸 누가 몰라? 술 마시면서 얘기해. 여기 오기 싫으면 아무데나 가고. 근처에 주루 많잖아!”

“에헤이, 명색이 무당 제자를 대접하는데 그저 그런 주루를 가면 쓰나. 사원루 정도는 가줘야지.”

“너야말로 개소리 좀 하지 마! 사원루가 싸구려 홍루는 아니지만 엄연히 기루인데, 청정도량 무당의 제자가 그런 데를 갈 리가 없잖냐!?”

“아니, 그건 아니다.”

강엽이 갑자기 끼어들자 장경과 낭인들이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청수는 사원루에 간 적 있거든.”

“뭐? 그럴 리가.”

“본인이 갔다고 말했다.”

“....”

장경은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당 제자가, 그것도 본산의 제자가 기루에 들락거리다니?

“그냥 술만 먹자고 하면 거절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원루에 가자고 하면 무조건 나온다.”

확신이 담긴 말에 하후진이 왠지 아련한 표정이 되어 말을 보탰다.

“그날 내가 사원루에서 그 말코 도사놈을 봤지. 나름 변장을 했지만 내 안목을 속이진 못했어. 여자들 보면서 헬렐레했던 얼굴이 참으로 인상깊었지....”

“.......”

“아무튼 사원루에 가려면 돈이,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말씀.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꼭 사원루에 가야 한다!”

“.......”

장경과 낭인들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강엽만 한숨처럼 딴죽을 걸었다.

“그냥 네가 사원루 가고 싶다고 하지 그러냐.”

* * *

단가상단(段家商團)의 총관은 밤 늦은 시간에 찾아온 강엽과 하후진의 용건을 듣고 떨떠름해했다.

명성 높은 귀영과 사자염도를 무시할 수 없어 들이긴 했지만, 설마 청수를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장님의 친구라고 하셨소?”

“그렇수다. 칼을 맞대면서 친구가 된 사이지. 우리가 비무대회에서 맞붙은 거 모르시나?”

“듣긴 했는데... 으음.”

“청수 그 인간 나간 거요?”

“아니, 그건 아니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내 청수 도장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총관이 살짝 당황하면서도 두 사람을 두고 나갔다. 아무래도 상단의 귀빈과 관련된 일이니 본인이 직접 알아보려는 듯했다.

“작은 상단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보단 크구만. 그 말코 자식은 왜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데? 도사라면 풍찬노숙해야 하는 거 아니여?”

딱히 도사라고 무조건 이슬 맞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하후진은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단가상회에 오기 전에 청수가 어떻게 단가상회에 식객으로 들어왔는지 들은 것이다.

강엽이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상단주의 딸을 구했다니 초대받을 만하지.”

“그 새끼가 도사라면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상단주 딸이 예뻐서 헬렐레하며 온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일 것 같진 않은데.”

“아니야. 합리적 의심이 들어. 그 새끼는 상단주 딸이 예뻐서 홀딱 빠진 거라고.”

“합리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지껄이냐?”

“몰라. 뭔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졸지에 두 사람의 시중을 드느라 오가는 대화를 들은 시비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미친놈들아, 우리 아가씨는 여덟 살이란 말이다....’

그녀는 이 미친놈들이 정말 점잖고 사려깊은 청수 도장의 친구가 맞기는 한지 의심이 들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선을 넘기 전에 총관을 따라 청수가 들어왔다.

강엽과 하후진이 눈을 껌뻑였다.

“...누구세요?”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총관과 시비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강엽과 하후진이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이 기억하는 청수는 후줄근한 마의를 입은 청년 도사였다.

한데 가난뱅이 도사는 어디 가고 때깔 고운 비단 무복에 보옥이 박힌 영웅건을 쓴 헌앙장부가 왔단 말인가?

다행히 주변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청수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하하, 두 분 오랜만입니다!”

“모, 목소리를 들어보니 말코가 맞긴 한 것 같은데?”

“저 청수 맞습니다. 제가 좀 달라졌지요?”

“아니야. 그 가난한 도사놈이 이딴 기생오래비일 리가 없어. 비단옷을 입고 사치 부리는 무당 도사라니 그딴 게 존재할 리가....”

하후진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뜯자 청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상단주님 따님께 선물로 받은 거라 도저히 입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안 입으면 토라지시거든요.”

그 말에 하후진이 거 보라는 듯이 강엽을 돌아보자 강엽도 심각한 낯빛이 되었다.

하후진이 청수의 어깨를 잡았다.

“후우, 축하한다. 예쁜 사랑해라.”

“예?”

뭔가 대화가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에 청수가 의아해하자 두 사람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단주 딸이 선물해줬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둘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상단주님 따님은 이제 겨우 여덟 살입니다.”

“...!”

“...!”

그제야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는지 깨달은 두 사람이 통나무처럼 뻣뻣해졌다.

같이 죽기는 싫었던 강엽이 잽싸게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난 아무 말 안 했다.”

어떤 생각을 했든 말만 하지 않으면 빠져나갈 구석이 있는 법.

강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편을 갈아타자 하후진이 부들부들 떨었다.

‘두고 보자, 이 자식....’

물론 그 혼자 쓰레기가 된 시선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청수의 말에 의하면 상단주의 딸을 구한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중경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고자 길을 나섰는데, 저자를 지나던 중에 웬 복면인들에게 공격받는 마차를 발견하고 구해주었던 것이다.

“당시엔 마차에 누가 탔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백주에 복면을 쓴 자들이 떳떳할 리가 없으니 일단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복면인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청수의 상대는 아니었던지라 싸움은 금세 끝났다.

“마차에 탄 사람이 단가상회주님의 따님인 건 싸움이 끝난 뒤에 알았습니다. 복면인들은 악명높은 흑도 방회였는데, 경쟁 상단의 사주를 받고 상단주님의 따님을 납치하려고 한 것이었죠.”

원래 중경을 떠날 계획이었던 청수는 생각을 바꿔서 상단주의 딸을 상단까지 호위했다.

“그때부터 상단에 신세를 졌습니다.”

상단주가 은인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면서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은 하후진이 물었다.

“그럼 그 옷이랑 영웅건은 뭔데?”

“상단주님의 따님이 강호를 동경하셔서요. 영웅은 이런 걸 입어야 한다면서 선물해주셨습니다. 원래는 부담스러워서 안 입으려고 했는데 그럼 또 삐지셔서.... 하핫, 제가 후줄근하게 입는 게 마음에 안 드셨던 것 같습니다.”

“댁은 사람이 좋은 건지 거절을 모르는 건지 헷갈리는구만. 뭐, 팔면 돈은 꽤 되겠네.”

청수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두 사람이 온 것은 이런 이야기나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강엽이 물었다.

“혹시 지금 바쁜가?”

“도사가 바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심신을 가다듬으며 수양을 하는 것 말고는....”

“사원루에 같이 가려고 했는데.”

“...없지만, 애써 찾아오신 손님들의 청을 거절하는 것도 강호의 도리가 아니지요. 갑시다.”

“....”

실로 뻔뻔한 철면피에 강엽과 하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사원루.

달리 중경제일주루라고 불리는 이곳은 운화장과 더불어 중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원으로 꼽혔다.

특히 천하진미와 명주, 그리고 아리따운 예인들의 음률과 가무는 중경의 명물로 꼽힐 정도.

술 몇 병만 마셔도 은전 수십 냥은 우습게 깨지기 때문에 부자들이 아니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원루의 예기들은 자존심이 드높아서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옷고름을 풀지 않아.”

“그런데도 손님이 그렇게 많나?”

“원래 이런 데 오는 놈들은 몇백 냥 가지고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부자들이야. 기녀들 옷고름 풀려고 가는 게 아니라고.”

“아,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오죽하면 중경에서는 사원루에서 놀지 않으면 부자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하더군요.”

강엽은 할 말을 잃었다. 중경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들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다니.

“하지만 그렇게 돈 많은 놈들도 중경제일미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지.”

“그건 또 누군데?”

“중경에 사는 놈이 중경제일미를 모른다고?”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치 인생의 절반을 손해본 사람처럼 불쌍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강엽은 억울함을 느꼈다.

“그것 좀 모른다고 그따위 시선을 받아야 하나?”

“중경제일미 해어화(解語花) 홍가려는 사원루를 대표하는 예인이야. 태화문의 흑호선(黑狐仙) 조영옥과 사천당문의 독묘화(毒妙花)랑 함께 사천삼미로 꼽힌다고.”

“그래도 미모만 보면 홍가려가 제일이라고 하지요. 돈 많은 거부들조차 그녀를 보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뭐, 홍가려는 못 봐도 예쁜 여자들 많으니까....”

하지만 세 사람이 사원루로 갔을 때, 그곳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일찍이 사원루에 와본 하후진과 청수도 어마어마한 인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워, 원래 이렇게 줄이 길진 않았는데? 뭔 일 생겼나?”

“그러게요. 왜 이렇게 많지?”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왜 들어가지 못하는 거요! 어제까지 멀쩡히 장사했으면서 갑자기 휴업이라니!”

세 사람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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