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진조의 시험을 통과한 뒤, 강엽은 푹 쉬었다.
거룡방과의 전쟁부터 시작해서 시련을 빙자한 진조와의 싸움까지.
아무리 흡혈귀의 육신이 강건해도 진력이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나마 구양익의 피를 마신 덕에 여유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심상공간에서 나오자마자 기절한 강엽은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후, 죽다 살아난 기분이군.”
아닌 게 아니라 삼도천에 머리까지 푹 담그고 온 기분이었다. 참 용케도 살아남았다 싶을 정도로.
새벽 무렵 운기조식을 해본 강엽은 깜짝 놀랐다.
‘내공이 늘어났다?’
진조의 말에 의하면 원래 자신이 품은 내공은 팔십 년 안팎.
그동안 내공을 쌓으면서도 양을 가늠하지 못했던 강엽은 그 덕에 자신의 내공 수위를 정확히 깨달았다.
평범한 무인이 팔십 년을 연공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었다.
이걸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 쌓은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거기서 반의 반가량 더 늘어나서 말 그대로 백년 내공이 되어 있었다.
아마 진조의 힘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능력을 각성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공까지 늘어난 모양이었다.
‘평범한 무림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삼십 년도 못 채운다고 하던데....’
진조와의 재회도 놀랍지만, 새삼 혈공진기가 얼마나 사기적인 심법인지 알 수 있었다.
남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내공을 반년도 안 되는 기간에 달성한 것이다.
물론 내공만 많다고 무조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투로를 올바르게 가져가지 않으면 자신보다 내공이 적은 자와 싸워도 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공이 많을수록 유리한 것도 사실.
몇 번 움직이면서 감각을 조정한 강엽은 기감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이제....”
길게 숨을 흘리며 손을 들자, 장심에서 파동이 흘러나와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육안으로 보이는 파동은 아니다. 피부로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강엽은 파동이 연공실의 석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것을 감지했다.
과연 이 파동이 어디까지 퍼질 것인가.
연공실 밖으로 나간 강엽은 밤인 것을 확인하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혈공진기를 담은 손가락을 허공에 찍자 허공이 물결치듯 흔들린다.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강엽이 눈썹을 굽혔다.
‘생각보다 훨씬 멀리 퍼져나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금보다 더 많은 공력을 담아 허공을 찍자 파동이 다시 한번 멀리 퍼져나갔다.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이게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방을 바라볼 때였다. 불현듯 날개를 홰치는 소리가 들은 강엽은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식겁했다.
“이런 미친!”
위이잉...!
수백, 수천 마리는 족히 넘을 벌레들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은 나방들만 날아왔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벌레들의 종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으헉!”
수천 마리나 되는 벌레들이 구름처럼 뭉쳐 날아오는 광경 앞에선 흡혈귀도 답이 없었다.
특히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커다란 나방을 봤을 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아, 안 돼. 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저것들을 집 안에 들일 수는 없다!
두려움에 질린 강엽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담장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나방들도 힘차게 날갯짓하며 그를 따라왔다.
마치 나방들이 그를 향해 구애하는 것 같았지만, 강엽은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써보면 재밌을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냐!’
강엽은 탄식했다. 진조가 눈웃음을 치며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을 때 알아봤어야 했거늘!
설마 수천 마리의 나방들에게 위협을 당할 줄이야. 이래서야 자기 능력에 당한 꼴이 아닌가?
‘이 원한, 잊지 않겠다...!’
졸지에 수난 시대를 맞이한 강엽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채 산길을 따라 뛰었다.
도저히 저것들을 집 안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일단 저것들이 쫓아오지 않을 곳까지 도망쳐야 했다.
그런 그를 구원하는 손길이 찾아왔다.
끼익!
아니, 정확히는 또 다른 날갯짓이었다.
“저건 또 무슨...?”
나방들보다 훨씬 커다란 무언가.
“박쥐?”
강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될 법한 박쥐 떼가 배가 터지도록 나방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 * *
초음(超音).
그것이 강엽이 얻은 능력이었다.
‘이건 평범한 인간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다. 어지간한 무림인들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고절한 경지에 오른 자들이 아니면 감각하지도 못할 것이야.’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솔직히 이걸 어디다 써먹나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듣지 못한다 하여 짐승들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방으로 잔치를 벌인 박쥐들은 강엽의 머리 위를 한참을 빙빙 돈 뒤에야 돌아갔다.
“박쥐와 나방을 부리는 능력이라....”
사실 초음의 공능은 그것만이 아니다. 진조의 말에 의하면 강호인에게도 써먹을 수 있었다.
다만 진조는 써먹는 방법을 가르쳐줬을 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냥 직접 경험해보는 게 이해가 빠를 거라면서.
‘그 작자도 진짜....’
강엽은 한숨을 쉬었다.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절히 깨달았다. 진조는 가르치는 재주가 절망적으로 없다는 것을.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자신이 잘 한다고 하여 남에게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천재들이 그런 경향이 심하긴 하지만....’
자신은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
범부를 기준으로 잡고 이론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한다.
초음의 공능을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강엽을 골려주려는 의도 이전에 초음의 공능을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설명할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암신을 응용하는 법을 가르칠 때도 그랬지.’
대충 보여주고 알아서 배우라는 식이었다.
그나마 진조의 영성을 물려받아 영감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몇 달이 지났어도 깨우치지 못했겠지.
가르침은 개떡 같아도 자신의 재능까지 물려줬으니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할까?
‘양심은 염병. 그런 게 있다면 멀쩡한 사람 흡혈귀로 만들 생각을 못하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집에 돌아온 강엽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이채를 띠었다.
대문 틈새에 꽂힌 하얀 봉투.
강엽의 집을 알며, 서찰을 보낼 사람은 장경밖에 없었다. 장경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뜯자 장경의 필적으로 적힌 서찰이 나왔다.
“으음....”
서찰의 내용은 크게 둘.
하나는 동천패가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흑무암쇄진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훔쳐볼 것을 염려했는지 흑무암쇄진이나 흑룡교에 대한 것은 밝히지 않았다. 강엽이 찾는 것의 단서를 찾았다는 말뿐.
원래 당분간은 청송객잔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엽은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 * *
청송객잔에 온 것은 이십여 일 만이었다.
원래라면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면 낭인들이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부터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술에 취해 떠드는 소리가 아니라 화가 나서 주체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한다.
“그 개 같은 도사가 우리 일을 가로챘다고!”
“어이, 말조심해.”
장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화가 났는지는 알겠어. 나도 기분이 좋진 않아. 하지만 화만 낸다고 능사가 아니야.”
“그럼 이대로 내버려두자고? 그놈이 협객 놀이하는 바람에 우리 일거리가 줄고 있는데?”
“어쩌라고?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가서 협박이라도 하랴?”
“그래야 한다면 해야지!”
뭔지 몰라도 낭인들이 항의를 하고 있었고, 장경은 팔짱을 끼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 화상들아, 정신 차려라. 애초에 시비를 가리면 너희들이 문제 아니냐? 거기 가서도 사흘이나 미적거렸다면서?”
“미, 미적거린 게 아니야. 사전 답사를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촌장이 트집 잡은 거라고!”
“지랄한다. 떡이 되도록 술 처먹은 게 사전 답사냐?”
“반주 좀 한 거야!”
“마을 처녀한테도 수작 부렸다고 하던데?”
“썅, 모함이야! 우린 말만 걸었어!”
“왜?”
“즈, 증언 좀 들으려고.... 에잇, 진짜야! 촌장 새끼가 돈 주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 거라고!”
“좋아.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는 조사하면 알겠지. 너희 말이 진짜라면 촌장한테 경고할 거다. 하지만 아니라면 한동안은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그게 무슨...!”
낭인들은 속이 부글거리는 눈초리였지만 장경은 이런 부분에선 냉정했다.
그래도 낭인들의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꽤 많아. 그럼 의뢰인이 돈 주기 싫어서 트집을 잡기고 하고.”
“우리 말이 그거라니까?”
“그러니까 트집 잡힐 구실을 주지 말아야지. 일하는 곳에 가서 술 처먹고 노는데 어떤 의뢰인이 곱게 보냐? 그럴 거면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든가.”
“.......”
“무당 도사에 대한 건은 참아. 괜히 복수하겠다고 설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본 강엽이 근처에 있는 다른 낭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야. 어떤 새끼가... 헙!”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한 낭인이 뒤늦게 강엽을 알아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귀, 귀영?”
“저건 무슨 상황이지?”
“아, 그, 그게... 저놈들이 의뢰를 받은 마을에 사람을 해치는 맹수가 나타났는데, 저놈들이 늑장을 부렸거든. 그 사이에 무당 도사가 맹수를 잡은 거지.”
“무당 도사?”
“왜, 있잖아. 청수 도장 말이야.”
“그자가 아직도 중경에 있었나?”
“뭐라더라. 무슨 상단의 식객으로 있다던데.”
대체 무슨 사정으로 상단의 식객이 되어 낭인들의 일을 가로챘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협객짓을 하는 모양이야. 비적들을 잡아서 관에 넘기기도 하고. 요새는 선풍룡(旋風龍)이라 불린다고 하더라고.”
선풍은 회오리바람을 일컫는데, 청수가 싸울 때마다 바람이 불었기에 그런 별호가 붙은 것이다.
“근데 그 비적들도 원래는 우리가 할 일이었어. 관에서 맡긴 건이었거든. 하필이면 그 무당 도사가 나서는 바람에 우리 일이 취소됐지만....”
“흐음.”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하니 청수로 인해 낭인들이 의뢰를 망친 듯싶었다.
낭인은 칼질로 먹고 사는 족속이다. 한데 협객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면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물론 청수가 낭인전의 의뢰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기웃거리는 건 아니지만, 일을 망친 낭인들이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낭인들의 입장에서 협객은 자기들 상권을 위협하는 백해무익한 존재인 것이다.
‘힘으로 겁박하자니 감당이 안 되고, 항의할 명분도 마땅치 않고... 진퇴양난이겠군.’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장경이 돌아왔다.
“왔냐?”
“곤란한 것 같던데.”
“종종 겪는 일이야. 표주를 나온 구파의 제자들이 사람들 돕는 일이야 흔하니까. 그렇다고 좋은 일 하는 사람들에게 썩 꺼지라고 할 수도 없잖냐? 문제는 의뢰인들이 의뢰비를 돌려달라고 하는 거지.”
“순순히 돌려주나?”
“미쳤다고 그러겠냐? 애초에 계약할 때 명시를 해놔. 이런 일이 생기면 절반만 돌려준다고. 그런데도 의뢰인들이 낭인들은 쥐뿔도 한 게 없는데 왜 돈을 받냐고 지랄을 해대서.... 그러니까 꼬투리 잡히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었는데.”
울화통이 터지는지 한동안 쌍욕을 퍼부은 장경이 눈치를 살피면서 은근히 물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넌 청수 도장과 아는 사이잖냐. 좀 언제 떠날지 물어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