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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54화 (53/450)
  • 9화. 거룡 (11)

    흔히 호사가들은 무림 고수들은 맨손으로 바위를 쪼개고 화염을 쏟는다고 일컬어진다.

    문자 말대로 그렇게 싸우는 자들이 있었다.

    쩡! 쩌엉! 꽈르르르릉!

    고수들의 결전이었다.

    일권을 부딪칠 때마다 천둥이 치고, 칼날을 맞댈 때마다 불벼락이 쏟아진다.

    양측의 방도들은 저들끼리 싸우면서도 감히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 도망쳐!”

    “십 장 밖으로 물러나라! 휘말리면 죽는다!”

    동패급 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향배를 가늠하는 분수령에서 힘으로 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강자들뿐.

    모두가 자신이야말로 닭의 무리 속 한 마리 고고한 학이라고 뽐내듯이, 가진 바 절기를 아낌없이 쏟아내며 상대를 몰아붙인다.

    “크윽!”

    신음을 토한 학검수사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상투가 잘려나간 머리는 봉두난발이 됐고, 옷도 찢기고 헤져서 볼썽사나운 꼬락서니가 된 지 오래.

    청수한 인상은 어디 갔는지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강엽을 노려보며 판관필을 찌른다.

    쐐애액!

    그러나 판관필이 찌른 것은 암신의 허상.

    바로 직전에 암신을 펼펴 학검수사를 속인 강엽은 사각을 노렸다.

    ‘아뿔싸!’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선 학검수사는 즉히 몸을 옆으로 뒤집으며 소매를 휘둘렀다.

    어느 샌가 양손에 하나씩 쥔 판관필 하나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강엽을 스친 판관필은 십여 장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거룡방도의 어깨를 뚫어버렸다.

    “끄아아악!”

    “아, 아니....”

    학검수사 역시 당황했다.

    뜬금없이 같은 편의 횡포(?)를 당한 거룡방도는 고통스러워하다 조천방도의 칼을 맞고 절명했다.

    어쩌다 보니 행운을 거저 주운 조천방도는 강엽을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고맙습니다!”

    “....”

    “...그렇다는데?”

    “닥쳐라...!”

    졸지에 아군의 죽음에 일조한 학검수사는 정수리에 김이 날 듯 시뻘게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차마 실수라고 변명하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강엽이 실소했다.

    “하긴 나도 민망한걸. 내가 한 짓도 아닌데 공치사를 들으려니 영....”

    “닥치라고 했다, 놈!”

    최소한의 예절조차 집어치운 학검수사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파가 일어나서 강엽을 압박한다.

    그러나 혈공진기가 어린 손날로 허공을 쓱 그어버리자 압박감은 씻은 듯이 흩어졌다.

    “아니?”

    “이게 전부냐?”

    “뭣이라?”

    “철권긍룡보다 나은 부분이 없는데. 하도 유세 떨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줄까 기대했더니만.”

    눈 돌아갈 만큼 빠른 공방에서도 기가 막히게 요혈을 포착해서 찌르는 안법(眼法)과 손놀림은 놀랍다.

    하나 초감각을 운용하고 있는 강엽은 학검수사가 어딜 노리는지 예상하고 한 발짝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흉내 정도라면 나도 낼 수 있겠어.”

    검결지(劍訣指)를 쥐듯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앞으로 내밀자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혈공진기를 보도처럼 벼려낸 강엽이 뛰어들면서 거골혈(距骨穴)을 찌르자 학검수사가 깜짝 놀리서 몸을 틀었다.

    거골혈은 찔리면 몸이 뻣뻣이 굳어지는 마혈.

    바깥쪽으로 크게 몸을 비튼 학검수사가 강엽의 팔꿈치 곡지혈(曲池穴)을 툭 건드렸다.

    ‘마혈엔 마혈로 갚아주마!’

    그러나 강엽은 관절부를 굽혀 타혈을 피하고는, 반대쪽 주먹을 짧게 끊어쳐서 응수했다.

    “크읏!”

    천근의 바위가 손가락 끝에 날아오는 듯한 충격에 학검수사가 잇새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내공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손가락이 부러졌을 정도로 막강한 경력이었다.

    그러나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강엽의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져서 시야의 바깥을 노려왔다.

    태양혈(太陽穴)이 지나가는 관자놀이.

    간신히 손을 들어 막았으나 앞코와 부딪친 장심에서 뿌드득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으아아아아!”

    고통을 잊기 위해 기합을 지른 학검수사가 몸을 틀며 반격했다.

    소매에서 또 한 자루의 판관필을 꺼내 상단세의 자세로 내려친다.

    “하아압!”

    판관필의 강철붓 위로 맺힌 칼날.

    마치 달빛 아래 흘러가는 구름처럼 흐릿한 칼날의 형상이 강엽의 천령개를 쪼개갔다.

    순간적으로 검기(劍氣)를 내뿜어 상대를 베어버리는 필검(筆劍)이라는 구명절초였다.

    “인정해주마! 네놈은 일생일대의 대적이다!”

    “흠.”

    그러자 강엽은 태극의 심상이 깃든 보법으로 원을 그리듯 자신과 학검수사의 위치를 반전시켰다.

    태극의 무리를 안 쓰겠다고 했던 강엽이 마지막에 말을 뒤집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학검수사는 대경하면서도 일단 몸이 시키는 대로 필검을 횡소천군의 기세로 휘둘렀다.

    하나 검기는 머리카락 몇 올을 베어버릴 뿐.

    강엽은 다리를 굽혀 몸을 한껏 낮추고는, 하체에서부터 끌어올린 발경력을 주먹을 담아 호쾌하게 올려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뒤늦게 강엽의 노림수를 깨달은 학검수사가 아연실색하면서 자세를 바꾸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아앙!

    “크엑!”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난입.

    강엽도 눈앞의 현실을 쫓아가지 못해서 엉거주춤했다.

    “...뭐야?”

    적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포탄처럼 날아온 무언가가 학검수사를 덮치는 바람에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다.

    “아이고, 엉덩이야....”

    하후진이 엉덩이를 잡으며 앓는 시늉을 했다.

    머리카락은 타서 꼬불꼬불해졌고, 얼굴 곳곳에 피와 검댕이 묻어 칠칠맞기 짝이 없었다.

    “어, 강엽. 여기서 뭐하냐? 그 학검인지 뭔지 하는 먹물쟁이랑 싸우던 거 아니었냐?”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다만.”

    “오, 이겼냐?”

    “아니.”

    “뭐? 왜!?”

    “네가 깔아뭉갰잖냐.”

    “...!”

    그제야 자기가 뭘 쳤는지 깨달은 하후진이 호다닥 일어났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하후진이 덮쳤을 때 팔을 높게 치켜들었던 학검수사는 판관필이 정수리에 박혀 죽어버린 것이다.

    사혈 중의 사혈인 백회혈(百會穴)에 말이다.

    “....”

    “한 명 잡은 거 축하한다.”

    “...고맙다, 짜식아.”

    “설마 엉덩이를 흉기로 쓸 줄이야.”

    “...그만 좀 말해.”

    “내가 왜?”

    코웃음을 친 강엽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건 나한테 양보해주나?”

    기둥짝만한 구환도를 든 거룡방주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 * *

    거룡방주가 탄식했다.

    “학검수사도 죽었나.”

    철권긍룡은 잡혔다.

    사월유성과 학검수사는 죽었다.

    오선자는 수적들과 드잡이질을 하며 시간을 버느라 전력에서 이탈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 피해도 없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피해가 이토록 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구양세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전부 받았다.

    한데 몇 가지 변수가 겹치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줄이야?

    “낭인전... 예전부터 그랬지.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하고 어깃장을 놓았어.”

    거룡방주 역시 낭인전과 엮인 적이 많았다.

    그들과 아군으로 함께 싸운 적도, 적으로 만나 죽일 듯이 싸운 적도 있었다.

    개똥도 약에 쓸 땐 없다고, 같은 편일 때는 버러지만도 못했던 놈들이 막상 적으로 나타나면 엄청 성가시게 굴면서 하는 일마다 재를 뿌려댔다.

    공교롭게도 그가 적으로 낭인전을 만났을 때만 은패급 이상의 강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지. 네놈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

    거룡방주가 원한을 곱씹는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철권긍룡이나 사월유성 등의 고수들이 죽거나 붙잡히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후진이 콧방귀를 킁 뀌었다.

    “억울하면 먼저 우릴 고용하셨어야지.”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낭인전은 의뢰인을 가리지 않는다.

    만약 거룡방이 먼저 그들을 고용했다면 그들은 조천방에 칼을 겨누고 있었겠지.

    “다음에 참고하지.”

    “하, 내가 만전이었으면 혼자 상대해도 이길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우리 둘이 상대면 아무리 댁이라도....”

    그때 강엽이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난 빠진다!”

    “엉? 야, 잠깐...!”

    강엽은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을 돌렸다.

    거룡방주가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앞을 지키는 하후진 때문에 섣불리 뒤를 치지 못했다.

    하후진도 이내 강엽이 무얼 보고 갑작스레 이탈했는지 깨닫고 견제의 눈빛을 던졌던 것이다.

    웬 흑의인이 은패급 낭인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서 조천방주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암검주였다.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서, 암검주 구양익이 은패급 낭인들 다수에게 둘러싸였을 때였다.

    [저쪽에 남아있을 줄 알았건만.]

    [나도 그러고 싶었소. 하지만 남아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

    [조천방주의 호위는?]

    [삼제자 정욱이 조천방주를 돌보고 있고, 유성홍을 비롯한 명숙들이 호법을 서고 있소.]

    [낭인들은 모두 끌려왔다?]

    [그렇소.]

    [좋군.]

    [...무슨 뜻이오?]

    [협력해라. 이 떨거지들을 치우고 곧장 조천방주의 신병을 확보해야겠다.]

    [드러내놓고 협력하라고? 내가 당신한테 붙었다는 걸 동네방네 알릴 일 있나?]

    택도 없는 요구를 하는 구양익을 향해 양평이 같잖다는 조소를 보냈다.

    여기 있는 낭인들을 전부 죽인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드러내놓고 구양익에게 협력하는 건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완수금을 못 받고 싶나?]

    [그렇다고 내 무덤을 팔 순 없지. 완수금은 아쉽지만... 선금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본디 낭인전엔 선금이나 완수금 개념이 없다.

    의뢰인이 의뢰비를 분타에 맡겨놨다가 의뢰가 완수되면 낭인들이 되찾아가는 식이다.

    하지만 거간꾼인 분타주를 제치고 이중의뢰를 받은 양평은 그런 식으로 의뢰비를 챙길 수 없었다.

    상대가 언제 뒤통수를 칠 줄 알고 완수금만 받겠는가?

    해서 선금으로 절반을 받고, 남은 절반은 거룡방이 이 싸움에서 이겨 조천방을 병탄할 시에 받기로 했다.

    [나를 협박한다는 수작은 마시오. 내가 이중의뢰를 맡았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선금은 만약을 대비해서 추적하기 쉬운 고액 전표가 아니라 금전으로 받았다.

    [하지만 협력은 해주겠소. 솔직히 나도 완수금을 날리는 건 아까우니까.]

    [...어떻게 말이냐?]

    [드러내놓지 않는 선에서. 사전에 합을 맞추면 되지 않겠소? 하면 의심을 피할 수 있겠지.]

    어떤 식으로 합을 맞출지 의논한 뒤에야 구양익은 만족하며 전음을 날렸다.

    [그런 식으로 하면 되겠군. 좋아, 준비해라.]

    구양익과 싸우는 은패급 낭인은 양평을 포함해 세 명.

    구양익이 좌측의 낭인을 검격으로 쳐서 빈틈이 드러나자 양평이 기합과 함께 절초를 날려왔다.

    회전력을 가미한 창이 일도양단의 기세를 실어 바닥을 내치자 거센 경파가 일대를 뒤집었다.

    같이 싸우던 은패급 낭인들도 아찔함을 느끼고 막고 피하느라 분분한 사이 구양익이 경공을 펼치며 후방으로 날아갔다.

    조천방주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조천방주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면 결사항전의 각오로 무장한 놈들이라 한들 별수 없이 항복하리란 계산.

    하지만 한 사람이 그 꼴을 두고 보지 않았다.

    “감히!”

    은밀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구양익은 경공을 전개하는 와중에도 몸을 돌려 검격을 퍼부었다.

    세 줄기의 검기가 허공을 가르면서 쏟아졌지만, 강엽은 태극반을 펼쳐서 궤적을 틀었다.

    ‘생각대로 잘 안 되는군.’

    구양익의 검격이 너무 강하고 빨라서 방향을 트는 게 고작이었다.

    “너는....”

    구양익이 강엽을 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강엽이 외쳤다.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니 거룡방주를 쳐라!”

    그 말에 구양익에게 달려들려던 세 낭인이 움찔해서 거룡방주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지치고 부상을 입은 하후진이 헉헉거리면서 거룡방주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유감이외다.]

    [도와주지 않을 건가?]

    [여기서 내가 뭘 하겠소? 둘이 협력해서 그놈을 도모하자고?]

    [....]

    [잘 해보시구려. 당신 구양세가의 암검주잖소. 그깟 애송이한테 설마 지겠소?]

    구양익이 빠득 이를 갈았지만, 양평은 어깨만 으쓱였다.

    “후우....”

    구양익이 숨을 골랐다.

    이마를 쓸어올린 그가 깊고 우묵한 눈으로 노려봤다.

    “귀영, 정말 귀찮은 놈이구나.”

    “피차 마찬가지 같군. 나도 당신을 찾느라 고생 좀 했거든.”

    구양익이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강엽은 그가 암검주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널 죽이면 더 이상 방해하는 놈도 없겠지.”

    “해볼 수 있으면 해봐라.”

    하지만 강엽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 붙어본 게 아님에도 직감했기 때문이다.

    ‘철권긍룡이나 학검수사보다 강하다.’

    눈앞의 사내가 이제껏 상대한 두 절정고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한두 수, 어쩌면 그 이상.

    ‘일단 멀리 유인하는 게 관건이겠지.’

    조금만 틈을 주면 조천방주를 노릴지 모른다.

    강엽이 달려들자 구양익 역시 흑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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