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6화 (45/450)
  • 9화. 거룡 (3)

    봉절현.

    장강삼협의 시작이자 과거 삼국지의 유비가 숨을 거둔 백제성이 있는 곳이었다.

    조천방이 그렇듯 거룡방의 거점들도 장강을 따라 이어졌다. 개중엔 조천방과 겹치는 곳도 많았다.

    “봉절현 분타는 가장 먼저 화를 당한 곳이오. 그래서 그런지 노기를 참기 힘들구려.”

    그렇게 말한 자는 조천방주의 제자인 정욱이었다.

    조천방주는 아들이 없는 대신 딸만 셋인데, 조카인 문자경도 몸이 약해서 무공을 전수하지 못했다.

    대신 임무 중 객사한 방도들의 자식들 중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제자로 골라 무공을 가르쳤는데, 정욱은 그중 셋째 제자였다.

    “후우, 약속대로 우린 놈들의 거점 바깥에서 포위망을 펼칠 것이오. 하지만 정녕 괜찮겠소?”

    혼자 싸울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다.

    “그 얘기는 진작 끝났을 텐데.”

    “하지만....”

    정욱은 뭔가 말하려다 그만뒀다.

    무슨 얘기를 해도 강엽이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대신 이건 가져가시오. 위험해지면 하늘로 쏘시오. 즉시 도우러 갈 테니.”

    그는 신호탄을 건넸다.

    실과 연결된 밑둥을 잡아당기면 부싯깃에 의해 장약에 불이 붙으면서 밤하늘로 쏘아지는 구조였다.

    강엽은 이것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나중에 봅시다.”

    장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적의 소굴로 들어간다.

    정욱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자신을 따라온 방도들에게 명을 내렸다.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틀어막아라. 민가에 피해 가지 않게 하고.”

    적의 거점 주변엔 민가도 꽤 많았다.

    무인들이 나타나자 겁먹은 주민들은 대문의 빗장을 걸어잠고 창문까지 닫은 채 불안해하고 있었다.

    정욱은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곧 다가올 싸움을 예감하며 애써 각오를 다잡았다.

    * * *

    달빛이 희미하게 내리쬐는 어두운 밤이었다.

    강엽은 가만히 있어도 혈공진기의 공력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면서 골목길을 거닐었다.

    봉절현에 있는 거룡방의 거점은 거대한 창고였다.

    외지로 나간 표국이나 상단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위탁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석조 건물.

    야심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앞을 지키는 험상궂은 사내들은 사주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다.

    흑색 단삼의 소매를 찢어 우람한 팔뚝을 드러낸 사내들은 강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우연히 지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걸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멈춰라!”

    “누구... 흡!”

    확인 절차는 과감히 생략한다.

    그딴 거 없어도 흑색 단삼 위에 새긴 거룡이라는 글자가 그들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암신을 이용, 삽시간에 거룡방도들의 배후를 점한 강엽이 길어진 손톱으로 뒷목을 베어버렸다.

    “제기랄, 침입...!”

    빠악!

    호쾌한 일권을 맞고 턱주가리가 나간 거룡방도의 입에서 설육 조각과 피가 튀어나왔다.

    혀가 잘린 충격으로 비명도 못 지른 거룡방도는 이어지는 일권을 맞고 절명했다.

    두 명의 문지기를 가차없이 처리한 강엽은, 굳게 잠겨 있는 쇳문 앞에 섰다.

    딱히 자물쇠가 없는 걸 보면 안쪽에서 따로 잠근 모양이지만....

    “방법이야 만들면 그만이지.”

    개의치 않고 냅다 일권을 갈겼다.

    “흡!”

    쾅!

    통짜 무쇠로 만든 쇳문은 끄떡없이 버텨냈다.

    콰앙!

    하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고 용린투를 낀 주먹을 계속 두들겨댔다.

    ‘맙소사.’

    굉음을 듣고 기겁해서 몰래 따라온 정욱은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신음했다.

    조천방 역시 비슷한 창고를 썼기 때문에 저 쇳문이 얼마나 두꺼운지 짐작이 되었던 것이다.

    두께만 일 촌(3cm)이 넘는 쇳문을 무식하게 두들기다니?

    그만 놀란 게 아닌지 쇳문 안쪽에서도 기막혀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용없어, 이 새끼야! 그거 방검문(防劍門)이야!”

    내공으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힘을 발하는 무림인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쇳문이었다.

    재질도 평범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장인이 백 번 이상을 단련한 백련정강(百鍊精鋼)이다. 그런 게 주먹질 좀 한다고 부서질 리가....

    쩌엉!

    “뭐, 뭐야!?”

    안에 있는 자들이 식겁했다.

    강엽의 무모함에 질렸던 정욱은 숫제 전율했다.

    쇳문 위로 주먹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던 것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돼.”

    피식 웃은 강엽이 계속 주먹질을 했다.

    딱히 내공을 쓰지 않아도 사람 몸쯤은 육포마냥 찢어버릴 수 있는 흡혈귀의 괴력이다.

    여기에 혈공진기의 경력을 때려박았고, 용린투로 주먹을 완벽히 보호하기까지 했다.

    방검문인지 뭔지 몰라도 계속 때리면 언젠가는 망가질 터.

    꽝! 꽈앙! 꽈앙!

    충격을 견디지 못한 쇳문이 우그러지면서 이음매가 벌어졌다.

    안에서 울린 비명과 괴성은 연일 계속되는 충돌음에 파묻혔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틈새 사이로 얼핏 드러난 정경.

    “방검문이 뭐 어쨌다고?”

    그 사이로 무장한 거룡방도들을 발견한 강엽이 피식 웃으며 문 틈새를 좌우로 당겼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빗장이 괴력을 버티지 못하고 뜯겨나가며 차가운 밤공기가 흘러들어온다.

    찰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밝혀둔 호롱불들 일부가 훅 꺼지면서 장내는 한층 어두워졌다.

    “.......”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면은 물론 계단 위쪽, 이층 복도까지 빼곡하게 메운 거룡방도들의 얼굴엔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강엽을 향해 걸쭉한 욕지거리를 쏟아냈던 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단지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손에 쥔 무기를 다시 한번 고쳐잡으며 눈알에 힘을 줄 뿐.

    “흐음.”

    족히 백이 넘는 적들의 면면을 쭉 둘러보는 강엽의 시선이 이층 난간 중앙에서 멈추었다.

    칼등에 아홉 개의 고리가 달린 구환도(九環刀)를 한쪽 어깨로 짊어진 텁석부리 사내의 기도는 적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이다.

    “그쪽이 좌장인 것 같은데.”

    “흐, 바로 알아보는 건가. 그래, 네놈 말대로 내가 좌장이다. 거룡방주님의 제자인 귀백량이니라.”

    스스로 거룡방주의 제자를 자처하는 적장의 얼굴엔 강엽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왕가진에서 도망친 놈들이 검은 장갑을 낀 고수에 대해 떠들어댔지. 귀영이랬나?”

    “...별호까지 알려졌나?”

    아무래도 그날 낭인전의 낭인들이 떠들었던 것을 거룡방도들이 주워 들은 모양이었다.

    “뭐 들리는 소문으로는 꽤 유명한 낭인이라지? 방검문을 부수고 들어온 걸 보니 마냥 허명만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살아서 돌아갈 거라 생각하지 마라.”

    “글쎄, 그건 어깨를 견주어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구양세가의 암검은 어디 있나?”

    “...!”

    설마 암검을 언급할 줄은 몰랐던 걸까.

    일순 눈에 띄게 경직된 적장의 얼굴을 본 강엽은 암검의 존재를 확신했다.

    ‘적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둘러봤지만 지난번에 만난 놈들보다 은신술이 뛰어난지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이번엔 좀 강했으면 좋겠군.”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지난번에 만난 암검 놈들은 약했거든. 그나마 한 명은 봐줄 만했는데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

    생각지도 못한 도발에 적장이 어이없어했지만, 강엽은 싹 무시하고 기감을 곤두세웠다.

    그를 노려보는 거룡방도들 사이에서 유독 날카롭게 반응한 기척을 찰나에 헤아렸다.

    ‘느껴지는 숫자는 셋.’

    기척은 이내 희미해졌다. 죽은 동료가 모욕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감정 수습이 빨랐다.

    “흥, 뭔 홍두깨 같은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쳐라!”

    “와아아아아아아!”

    거룡방도들이 악다구니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 * *

    싸움엔 상식이란 게 있다.

    한 사람이 다수와 싸우면 에워싸이지 않도록 좁은 구석에서 싸우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강엽은 정석을 거부했다.

    “놈이 사라졌어!”

    “젠장, 어디야! 어디 숨었냐고!”

    적을 놓친 거룡방도들은 혼란에 빠졌다.

    불현듯 비명이 메아리쳤다.

    “아악!”

    “거기냐!”

    주변에 있던 거룡방도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목이 부러져서 죽은 동료의 시체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강엽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들의 귀에 이번엔 다른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놈이 나타났다!”

    “제길,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시체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숨 쉬던 동료가 안면이 반쯤 갈라진 처참한 몰골이 되어 널브러진 모습.

    “이럴 수가!”

    위층에서 내려다본 덕에 그나마 사태를 빨리 파악한 귀백량은 아연해졌다.

    분명 먼 곳에 있던 강엽이 부지불식간에 아래쪽에 나타나서 거룡방도의 얼굴을 할퀴었던 것이다.

    “은신술을 익혔단 말인가?”

    그는 강엽이 구양세가의 암검들처럼 극한의 은신술을 구사하는 고수라고 판단했다.

    구양세가의 암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익힌 은신술과는 궤가 다르지만, 강엽은 적들에게 둘러싸이고도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중구난방으로 날뛰면서 혼전을 유도했다. 전방과 후방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놈이 또 도망쳤다!”

    여기도.

    “사, 살려... 케엑!”

    저기도.

    ‘이, 이런....’

    온 사방이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층에서 지켜보는 귀백량, 그리고 구양세가의 암검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강엽이 방검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농락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혼전 중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파악한 그들은 한데 뭉쳐 전음술(轉音術)로 밀담을 나누었다.

    [어떻게 합니까?]

    [방법이 없다. 뿔뿔이 흩어졌다 놈이 우연히 우리 앞에 나타나면 기습할 수밖에.]

    [상상 이상으로 신출귀몰한 놈입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뭐냐?]

    [불이 꺼지고 있습니다.]

    [...!]

    강엽은 아무렇게나 헤집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호롱불을 꺼트리면서 근처에 있는 적을 겸사겸사 잡아죽였던 것이다.

    거룡방도들은 동료의 죽음에 동요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비교적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했던 구양세가의 암검들은 강엽의 노림수를 빨리 파악했다.

    그들이 깨달은 사실은 귀백량에게도 전달되었다.

    “호롱불을 지켜! 놈이 불을 노리고 있다!”

    “호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직한 감탄음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빨리 알았는걸.”

    “이 개자식이...!”

    조롱기 가득한 말투에 귀백량은 깊은 빡침을 느끼면서 이를 갈았다.

    이번엔 다른 데서 강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그걸 알았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놈을 쳐라!”

    거룡방도들이 달려나갔지만, 강엽은 물 흐르는 보신경으로 빠져나와서 호롱불을 꺼트렸다.

    그렇게 창고의 일각이 어둠 속에 잠겼다.

    “내가 어디에 있을까?”

    콰직!

    “너희 뒤, 혹은 옆에.”

    쐐애액!

    “이층에 있을 수도 있지.”

    귀백량이 흠칫했다.

    줄곧 일층만 헤집고 다녔던 강엽이 어느새 그와 삼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삼 장은 사실상 코앞이나 다름없는 짧은 간격이다. 그러나 그가 몸을 날렸을 땐 강엽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호롱불 하나를 꺼트린 채 말이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세 명의 목이 두둥실 떠올랐다.

    자기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의 수급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강엽은 그곳에 없었다.

    “거룡방주에 대해 알아봤다. 구양세가의 빈객으로 가문의 밥이나 축내던 버러지였다지?”

    “네놈이 감히 사부님을 능멸하느냐!”

    귀백량이 모멸감에 떨며 흉흉한 살기를 토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짧은 비웃음이었다.

    강엽은 정면대결을 해주지 않았다. 귀백량과 구양세가의 암검들을 피해 잡졸들만 죽이고 다녔다.

    시간이 갈수록 거룡방도들의 안색은 귀신을 본 것마냥 해쓱해졌다.

    귀영. 귀신의 그림자. 귀신같이 움직이는 자.

    낭인들이 지어준 별호대로 강엽은 귀신같은 보신경과 툭 던지듯 내뱉는 말로 적들의 심령을 뒤흔들고 있었다.

    “열을 센다. 그 안에 저 문을 나가는 자는 쫓지 않겠다. 하나.”

    물론 숫자를 세는 동안에도 강엽은 적들의 숨통을 끊으면서 호롱불을 꺼트렸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운신 범위가 늘어났다.

    “둘.”

    “크악!”

    구양세가의 암검들은 깨달았다.

    이게 동료가 지르는 비명임을. 자신의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비명을 지른 것이다.

    “피맛이 제법 좋은 걸 보니 구양세가의 암검 같은데. 이제 둘 남았나? 아, 이제 셋.”

    ‘우릴 이미 파악했구나!’

    귀백량이 빠득 이를 갈았다.

    “비겁한 놈 같으니! 당장 나오지 못하겠나!”

    “넷.”

    이제 호롱불은 모두 꺼졌다.

    유일하게 남은 빛은 강엽이 들어왔던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뿐.

    “다섯. 절반 지났다.”

    “으... 으아아아아!”

    결국 누군가는 목숨을 선택했다.

    귀백령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돌아오라고, 도망치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소용없었다.

    “저 말은 듣지 마라. 너희들을 살릴 수 있는 건 너희들 자신뿐이다. 여섯.”

    강엽은 약속했던 대로 쫓지 않았다.

    바깥에도 포위망이 펼쳐져 있으니 도망친 놈은 머지않아 잡히겠지만 얌전히 항복하면 죽진 않을 터.

    “일곱.”

    “사, 살려주십쇼! 전 도망치겠습니다!”

    “나, 나도! 나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굶어죽는다고!”

    봇물 터지듯 무기도 내던지고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했다. 귀백량의 협박은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강엽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느긋하게 여덟을 셌다.

    가느다란 협봉검을 쥐고 덤빈 구양세가의 암검이 머리를 맞고 푹 쓰러졌다.

    “아홉.”

    도망치는 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열.”

    창고를 가득 메웠던 거룡방도들은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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