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5화 (44/450)

9화. 거룡 (2)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조천방 내부에 있는 대회의장.

상석에 앉은 은발의 건장한 노인이 중경 조운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천방주였다.

“조천방을 이끄는 문 모요. 본방을 도우러 와주신 명숙 여러분, 그리고 여러 강호 동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객의 입장에서도 예를 갖추는 게 마땅한 도리였다.

중경의 무림 명숙들이 포권을 쥐며 화답했다.

“별말씀을.”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하나 늠름하고 중후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고집불통 늙은이 같으니.’

‘태화문을 상전으로 받들기 싫어도 그렇지. 낭인 나부랭이들 따위들에게....’

그들이 태화문, 정확히는 이공녀 조영옥의 밀명을 받고 온 바람잡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천방을 도와주세요.’

‘예? 하오나....’

‘여러분이 무얼 염려하시는지 알아요. 처음부터 태화문을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조천방이 빠져나갈 구멍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여론을 만드세요. 태화문의 품에 들어오지 않으면 거룡방, 나아가 구양세가를 못 막는다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조천방주 그 완고한 늙은이가 넘어올는지....’

‘구양세가가 단단히 칼을 빼들었습니다. 조천방주의 수완이 대단해도 거센 풍랑을 넘기는 쉽지 않겠지요. 여러분의 역할은 그가 풍랑에 삼켜지기 전에 구명줄을 건네주는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참, 변수가 하나 있긴 한데....’

‘예?’

‘...아니에요. 아무튼 여러분의 역할이 참으로 큽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확신하는지는 그들도 몰랐다.

단순히 구양세가의 저력이 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천방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는 것인지.

같은 목표를 갖고 조천방을 찾아온 이들은 남몰래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순순히 협조하는 수밖에....’

그들이 신색을 정리하는 동안 시비들이 다과를 놓았다.

맑은 차향이 장내를 퍼질 무렵 조천방주가 문자경을 불렀다.

“총관.”

“방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문자경은 그의 조카였다.

슬하에 딸밖에 없는 그에게 있어선 아들과 같은 존재.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조천방주는 문자경을 철저히 직위로 대우했고, 문자경도 거리를 지키며 회합을 이끌어갔다.

“방주님을 대신하여 내빈 여러분께 지금까지 일의 경과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실엔 중경 무림의 명숙들뿐만 아니라 초대를 받고 온 낭인들도 몇 명 있었다.

강엽을 제외하면 전원이 은패급의 강자들.

중경부(重慶府) 각지의 분타에서 온 그들은 각자가 분타를 대표하는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흑풍사우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흑풍사우가 은퇴한 작금의 중경 분타에 은지패급 이상의 고수는 없다. 장경이 강엽에게 양질의 의뢰를 몰아주겠다고 약속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강엽을 중경 분타를 대표하는 간판급 고수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강엽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문자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왕가진을 포함하여 총 열세 곳의 분타 중에 일곱 군데가 공격받았습니다. 그중 봉절현(奉節縣), 운양현(雲陽縣), 충현(忠縣) 세 개 분타는 건물이 완전히 전소하였으며 사상자 역시 가장 많습니다.”

담담한 표정을 견지했지만 목소리에 노기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 분타는 미처 대책을 짜내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기에 속절없이 밀린 것이다.

“지금까진 수세를 강요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거룡방의 거점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한편 끈이 닿은 권력자들을 통해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거룡방의 배후인 구양세가의 뒷공작으로 인해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조천방은 낭인들을 고용해서 분타에 배치하는 한편, 싸울 줄 모르는 분타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본타로 불러들였다.

“다행히 적들의 일차 공세는 막아냈습니다. 이제부턴 본방이 반격할 차례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문자경의 눈빛은 칼을 간 것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인명 피해도 크지만, 거룡방과의 전쟁으로 거래처들과의 계약을 상당수 파기해야 했던 것이다.

방회의 살림과 출납을 관리하는 총관의 입장에서는 방회의 앞날을 통째로 저당 잡힌 기분.

손님을 응대할 땐 감정을 숨겼지만, 복수를 부르짖는 지금은 흉중에 쌓인 살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히려 총관이 발하는 서슬 퍼런 살의에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의 가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본방이 그동안 막는 데만 급급했던 건 아닙니다. 거룡방의 거점들에 대해서 은밀히 조사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떤 역할인지, 얼마나 강한 전력이 상주하고 있는지 등등.

“본방과 달리 저들은 전쟁을 벌이면서도 멀쩡하게 사업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회에 싸움을 건 주제에, 정작 자기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으리라고 믿는 겁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자신감인가?

이걸 가만히 놔둔다면 무골호인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본방의 전력과 여기 계신 분들의 힘을 총동원할 겁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백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반문했다.

그는 홍성문의 문주인 석파검 유성홍이었다.

중경의 유지로서 조천방주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도와달라는 청을 외면하지 않았다.

물론 친분만으로 이런 일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을 잘 넘기면 조천방의 사업에 참여할 권리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한 것이다.

“공격을 반대하는 건 아닐세. 하나 최소한의 방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유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문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방어조와 공격조로 나눌 겁니다.”

방어조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조천방의 둥요 거점들을 지킨다.

반면 공격조는 거룡방의 거점을 기습한다.

“두 조의 비율은 사대육입니다. 어느 쪽에 들어가실지는 여기 계신 분들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하나 한쪽에 과중하게 편중될 경우엔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해주시기를.”

아무래도 낭인들보다는 일문을 이끄는 문주들의 의향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일부 낭인들이 불만스러워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개의치 않는 기색을 보였다.

‘어차피 우리는 공격조일 텐데.’

‘방어조에 지원해봤자 공격조로 바뀔 게 뻔해.’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조천방은 낭인들을 업계 몸값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고용했다.

당연히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공격조에 보내지 않겠는가?

‘난 방어조에 들어가도 되겠지.’

사전에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될 권리’를 얻은 강엽은 마음대로 선택해도 된다.

하지만 강엽은 방어조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공격조에 들어가겠소.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주시오.”

강엽이 운을 떼자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그러자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빈정거렸다.

“푸핫! 신예가 배짱이 두둑한걸.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겁도 없이 묏자리를 찾는 꼴이잖아.”

“그러는 그쪽은 용기가 없군.”

“뭐?”

“하기사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앵앵거릴 리가 없지. 안 그런가?”

화끈한 도발에 낭인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반대로 품위를 중시하는 무림 명숙들은 저잣거리 건달패 같은 언행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한 사람만은 유쾌하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

“유, 유 문주!?”

명숙들이 당황했다.

유성홍은 다른 이들이 놀라든 말든 무릎팍을 치면서 폭소했다.

“암, 옳은 말을 했구만! 다른 사람 뒤에 숨은 소인배는 그딴 말을 할 자격이 없지! 밴댕이 소갈딱지도 못한 배짱이 아닌가 말이야!”

유성홍만 웃은 게 아니었다.

“거 영감님 말씀 시원하게 하시는구만!”

이 자리의 유이한 은천패인 하후진이 호응하며 조소를 보냈다.

빠득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이 시건방진 새끼가...!”

그렇지만 차마 은천패에게 화를 내진 못하겠는지 벌떡 일어나서 강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소란을 지켜만 보던 조천방주가 대갈일성을 터트렸다.

“갈! 뭣들 하는 짓인가!”

손을 뻗다 말고 청년이 귀를 막았다.

강엽도 은은히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에 내공을 싣었군.’

내공이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불길을 토해낼 것 같은 눈빛으로 강엽과 청년을 번갈아본 조천방주가 싸늘히 뇌까렸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게. 내 집에서 사사로이 싸우는 건 용납 못 해.”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뜻밖에도 강엽이 먼저 사과하며 포권을 취하자 상대 역시 걸고 넘어질 명분이 없었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쳇 하며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문자경이 물었다.

“강 무사님, 정말 공격조에 들어가시겠습니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뜻일까?

하지만 강엽은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즉답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주시오.”

“사실 어디든 다 위험합니다. 적들의 전력을 대략적으로 알아내긴 했지만 그 사이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니까요. 어쨌든 강 무사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용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용기를 가지고 결단한 건 아니지만 상대가 치켜세워주는데 사실대로 말할 이유가 없었다.

강엽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천방주가 입가를 끌어올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신예가 가장 위험한 전장에 자원했소이다. 뭇 강호 동도들께서도 용기를 내주실 거라 믿겠소.”

그 말로 인해 장내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별안간 하후진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 외쳤다.

“이 하후 모도 가장 위험한 곳에 가겠수다! 저 친구랑 같이 가도 되고, 아니어도 상관없소!”

“젊은이의 의기가 가상하군. 이름이 뭔가?”

“사자염도 하후진이올시다!”

“자네 뜻대로 해주겠네.”

“고맙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자 어지간히 낯짝이 두꺼운 사람도 후방으로 빼달라고 할 수 없었다.

‘젠장, 저놈들이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양평이 얇게 뜬 눈으로 강엽과 하후진을 번갈아 노려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조천방주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은천패가 한 명 더 있었군. 자네가 비호창 양평인가?”

“그렇습니다, 방주님.”

회합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조천방주와 독대하기를 원한 양평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입맛이 썼다.

‘당했군. 외통수에 걸렸어.’

강엽이 위험한 임무를 자처하고, 낭인들 중에 한 명이 시비를 걸고, 조천방주가 분위기를 바꾸는 일련의 과정이 사전에 짜맞춘 것처럼 이루어졌다.

뭔가 구렁이 담 넘어간 것처럼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따지고 들기도 애매한 노릇.

양평이 내심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역시 어디든 가겠습니다.”

* * *

“감사합니다.”

문자경이 머리를 숙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양평이 의심한 대로 강엽이 먼저 나선 것은 계획된 일이었다.

낭인들이 몸을 사리지 못하도록 조성하기 위해 강엽으로 하여금 먼저 나서도록 부탁했던 것.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구양세가의 암검이 있는 곳은 봉절현 분타입니다.”

강엽은 구양세가의 암검이 있는 곳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조천방 역시 암검은 부담됐기 때문에 신중하게 조사했다.

강호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망을 지닌 개방(丐幇)과 하오문(下午門)에 의뢰를 넣고, 거룡방도 몇 명을 돈으로 구워삶아 내부자들만 알 수 있는 정보를 빼내서 교차 검증했다.

“그렇지만 강 무사님께서 구양세가의 암검을 먼저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강엽이 쓰게 웃었다.

문자경이 고수의 피를 마셔야 연명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어찌 알까?

“한데 정말 혼자 싸우셔도 괜찮겠습니까?”

“오히려 그쪽이 편하오.”

하후진처럼 자신과 비견할 만한 고수라면 모를까, 괜히 합도 안 맞는 사람들하고 같이 싸워봤자 신경 쓸 것만 많아질 터.

“그렇다고 나랑 하후진을 같은 곳에 보내진 않을 것 아니오?”

“그건... 네, 맞습니다.”

문자경은 부정하지 못했다.

은천패급 전력을 한 군데에 투입하는 건 전력 낭비였다. 거룡방의 거점도 꽤 많은 만큼 전력을 분산시켜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리라.

“정 걸리면 내가 싸우는 동안 포위망이나 만들어주시오.”

“하긴 싸우다 보면 도망치는 놈들이 나올 수 있겠군요.”

아무리 강엽이 강해도 모두 족칠 수는 없다.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거룡방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망치는 놈들도 있을 테니까.

“하나 더. 웬만하면 하후진과 양평은 가까이 두지 마시오.”

“예?”

“하후진이 양평에게 원한이 있는 것 같았소. 예전에 양평이 죄를 짓고 도망쳤다고 하던데....”

하후진에게 들은 양평의 과거를 말하자 문자경이 아연실색했다.

“그런 일이...! 비호창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한쪽의 일방적 주장이니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오.”

“예. 유념하겠습니다.”

“그럼 난 가보겠소.”

“무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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